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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구]1750년 임동빈 준호구 1750년 임동빈 준호구(소장: 규장각) 乾隆十五年 月 日 漢城府건륭 15년(1750) 월 일 한성부에서 발급한 준호구다. 考庚午成籍戸口帳内경오년(1750)에 작성[成籍]한 호구대장을 살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部俊秀坊舊司圃署契第 統第 戸住嘉義大夫行龍驤衛副護軍林東彬年六十辛未生本扶安북부 준수방(俊秀坊) 옛 사포서계(司圃署契) 제○통 제○호에 거주하는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임동빈(林東彬)은 나이가 60세이고 신미년(1691)에 출생했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夏蕃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하번(夏蕃)이다. 祖通德郎震格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진격(震格)이다. 曾祖老職通政大夫仁榮증조부는 노직(老職)으로 통정대.. 2019. 9. 10.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 ‘성리학’과 ‘사대부’ 개념의 문제 - 2019.09.06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의 영정.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해 왔다. 신흥사대부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주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견해를 검토하여 기존 연구의 시각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우선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주장이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 살펴보자... 2019. 9. 6.
[맹자] 양下-2. 문왕의 동산, 제 선왕의 동산(文王之囿) 양혜왕장구下 (2) : 문왕지유(文王之囿) 齊宣王問曰: “文王之囿, 方七十里, 有諸?” 孟子對曰: “於傳有之.” 제 선왕이 물었다. “문왕(文王)의 동산[囿]은 사방이 70리였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옛 기록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囿者, 蕃育鳥獸之所. 古者四時之田, 皆於農隙以講武事. 然不欲馳騖於稼穡場圃之中, 故度閒曠之地以爲囿. 然文王七十里之囿, 其亦三分天下, 有其二之後也與. 傳, 謂古書. ‘囿’(유)는 새와 짐승을 번식시키고 기르던 곳이다. 옛날에는 사시(四時)의 사냥은 모두 농한기에 하여 무사(武事)를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곡식을 심고 거두는 채마밭[場圃] 안에서 말을 달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한가롭고 빈 땅을 헤아려 동산을 만들었다. 그러나 문왕의 70리 동산.. 2019. 8. 26.
[맹자] 양下-1. 음악을 좋아해도 괜찮습니까?(莊暴見孟子) 양혜왕장구下 (1) : 장포견맹자(莊暴見孟子) 莊暴見孟子, 曰: “暴見於王, 王語暴以好樂, 暴未有以對也. 曰好樂何如?” 孟子曰: “王之好樂甚, 則齊國其庶幾乎!” 장포(莊暴)가 맹자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왕을 알현하자 왕이 제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이 음악을 몹시 좋아하신다면 제나라는 아마도 치세(治世)에 거의 가까워질 것입니다.” 莊暴, 齊臣也. 庶幾, 近辭也, 言近於治. 장포(莊暴)는 제의 신하다. ‘庶幾’(서기)는 가깝다는 말이니, 잘 다스려지는 경지에 가까워진다고 말한 것이다. 他日見於王, 曰: “王嘗語莊子以好樂, 有諸?” 王變乎色, 曰: “寡人非能好先王之樂也. 直好世俗之樂耳.” 다른 .. 2019. 8. 26.
[맹자] 양上-7. 근본으로 되돌아가십시오(齊桓晉文) 양혜왕장구上 (7) : 제환진문(齊桓晉文)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 可得聞乎?” 제 선왕이 물었다. “제 환공과 진 문공에 관한 일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齊宣王, 姓田氏, 名辟彊, 諸侯僭稱王也. 齊桓公晉文公, 皆霸諸侯者. 제 선왕은 성이 전씨(田氏)이고 명이 벽강(辟彊)이며, 제후로서 왕을 참칭하였다.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모두 제후들의 우두머리였던 사람들이다. 孟子對曰: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則王乎!” 맹자가 대답했다. “중니(仲尼: 공자)의 문도에 환공과 문공에 관한 일을 말한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없는지라 신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고 하신다면 왕도(王道)에 관해 말해보겠습니다.” 道, 言也. 董子曰: “仲尼之門.. 2019. 8. 25.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김건태, 2011,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한국문화』 55 2019.08.06. 1.서론 19세기 농촌 사회에는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다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그런 현상이 빚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농업에 관한 개인의 관심이 재산 규모에 차이를 빚어내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 후기에 들어 농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했던 농민을 두 부류로 범주화했다. 借地를 활용해 부를 축적한 經營型富農과 자신의 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부를 늘린 經營地主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들이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입장에 회의적이다. 근대의 지표로 발굴된 경영지주와 경영형 부농이 사실은 농업에 관심을 가졌.. 2019. 8. 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2019.08.05. 1. 근대로의 관점 저자는 이 글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재검토하고 ‘소농사회론’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타당성을 따져보기 위한 비교사적 준거로 서유럽(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지표를 제시한다. ①농촌경제에서 보조적 위치에 있던 가내수공업(특히 衣類공업)이 사회적 분업의 일환으로 농업에서 분리되었다. ②신분제와 결합된 중층의 토지소유가 해체되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 ③보편주의적 세계와 중세의 공동체적 질서로부터 ‘합리적인 개인’이 등장했다. ④자율적인 시장경제가 경제의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시장과 국가가 서로 분리되었다. ⑤세계시장ㆍ세계체제를 전제로 지.. 2019. 8. 5.
청의 조선사행 인선과 ‘대청제국체제’ 구범진, 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 2019.08.02. 1. 서론 그동안 조선이 명ㆍ청에 파견한 使行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명ㆍ청이 조선에 파견한 勅使에 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책봉-조공체제’였다면 ‘조공’의 측면 뿐 아니라 ‘책봉’의 측면에서도 양국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 人選 문제를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 저자는 『同文彙考』 「詔勅錄」에 기록된 조선사행 칙사의 관직과 이름을 검토했다. 그 결과 청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을 선발할 때 줄곧 漢人 배제의 원칙을 준수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논문은.. 2019. 8. 3.
『대의각미록』과 조선 후기 화이론 김홍백, 2011, 「『大義覺迷錄』과 조선 후기 華夷論」, 『한국문화』 56 2019.08.02. 1. 서론: 중세 동아시아 비한인계 지식인의 화이론 저자는 曾靜역모사건(1728)으로 드러난 한족 지식인의 華夷論과 그것을 비판한 옹정제의 『大義覺迷錄』이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살펴보고 그 사상사적 의미를 검토했다. 이 글에서 저자가 탐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박지원 등 북학파 지식인에게 ‘華’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이렇다. ①『대의각미록』에서 한족 화이론을 비판하는 쟁점을 검토한다. ②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대의각미록』을 어떻게 수용하고 논평했는지를 살펴본다. ③『대의각미록』에 관한 조선 후기 지식인의 논평과 입장의 의미를 小中華主義ㆍ北學論라는 측면에서 검토한.. 2019. 8. 2.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배우성, 2003,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아카넷 2019.07.31. 1. 머리말 17세기 조선에서 富國과 安民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다양한 사회경제정책론이 쏟아진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의 사회경제정책론을 검토한 연구들은 학문적 차이 혹은 정치세력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사회경제정책론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17세기 사회경제정책의 차이를 일관되게 학문적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다. 각 학파=정파의 차이는 예론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경제정책론은 예론과 같은 차원으로 보기에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다. 학파=정파간 정책론의 차이는 오히려 반세.. 2019. 8. 1.
조선초기 ‘시왕지제’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최종석, 2010, 「조선초기 ‘時王之制’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 52 2019.07.30. 1. 머리말 필자는 이전 작업에서 여말선초의 사회적ㆍ문화적 변동의 성격을 재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성황 제의와 입지는 여말선초에 이질적인 명의 성황 제의로 대체되었다. 그런 움직임은 중화 보편을 추구하는 담론 환경에서 ‘時王之制’를 준용하여 중화 보편 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필자는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時王之制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연구의 기본적인 관점은 ‘중화 보편 질서’ 속에서 제후국의 分義를 준수하려는 지적ㆍ사회적 분위기 아래 종주국 제도의 의미와 위상이 이전과 달라지면서 구체적인 시왕지제 수용 문제가 대두했다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기.. 2019. 7. 30.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노명호, 1999,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2019.07.23 1. 머리말 선행연구는 고려시대의 천하관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했다. 신채호는 ‘묘청란’을 화풍파와 국풍파의 대립으로 파악했다. 구선우의 연구는 두 세력의 사상적 기반을 단지 유교와 비유교로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고려시대 천하관을 화풍파와 국풍파로 구분하는 관점은 남아있었다. 환구사와 팔관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고려가 중화제국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율적ㆍ자존적인 다원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구사와 팔관회를 제정하고 시행했던 세력의 천하관이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한 가지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 이른바 ‘국풍파’로 분류된 이들 중에서도 서로 다른 천.. 2019.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