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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by 衍坡 2019. 8. 1.

배우성, 2003,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아카넷




2019.07.31.




사회경제정책



1. 머리말

  • 17세기 조선에서 富國과 安民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다양한 사회경제정책론이 쏟아진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의 사회경제정책론을 검토한 연구들은 학문적 차이 혹은 정치세력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사회경제정책론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 첫째, 17세기 사회경제정책의 차이를 일관되게 학문적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다. 각 학파=정파의 차이는 예론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경제정책론은 예론과 같은 차원으로 보기에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다. 학파=정파간 정책론의 차이는 오히려 반세기 넘는 모색과 시행착오를 거쳐 정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학파=정파의 차이로 정책론을 구분하기보다는,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중층적 구조에 주목하여 학파=정파간 서로 다른 정책론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둘째, 특정 정책론이 반드시 특정한 계급의 이해를 반영한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대동법과 대동법 반대론을 각각 진보적ㆍ보수적 정책론으로 구분하거나 진보적 토지제도 개혁론과 보수적 부세제도 개량론을 대비시키는 기존 연구의 관점은 17세기 정책논의의 구조와 그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17세기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구조를 검토하기 위해 부국론ㆍ관료적 안민론ㆍ산림적 안민론 세 범주를 설정했다. 부국론이 국가 재정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입장이라면, 관료적 안민론은 民에게 이익이 되는 제도ㆍ정책을 통해 安民을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림적 안민론은 왕도 추구를 통해 안민이 달성될 수 있다는 입장을 의미한다.





2. 인조대 전반의 안민론과 부국론


1) 안민론과 부국론의 대두
(1) 서인 계열의 정책론


① 김장생의 산림적 안민론

  • 김장생은 사회경제정책론의 목표를 安民에 두었고, 안민의 핵심이 均役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 김장생이 보기에 균역을 통한 안민의 구현을 목표로 한 대동법 자체는 원론적으로 안민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동법 시행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으므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신 그는 균역을 위한 量田을 주장했다.
  • 김장생의 사회경제정책론은 부국론이나 관료적 안민론과 달랐다. 부국론자들은 국가재정 회복을 목표로 호패법과 세수를 고려하여 양전을 주장했고, 관료적 안민론자는 양전이 실시되지 않는 현실에서 대동법이라는 정책을 통해 안민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양쪽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김장생은 제도와 정책을 통한 안민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仁祖 초반의 두드러진 갈등은 안민론 내부보다는 부국론과 안민론 사이에 형성되었다.



② 조익의 관료적 안민론

  • 조익은 주자학의 핵심을 ‘敬’으로 파악하며 그 실천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가 ‘제도를 통한 안민’을 중요시했던 것도 그런 학문관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안민론에 따르면, 왕도의 실현은 법제와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것은 서인계 관료적 안민론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 조익은 안민의 방법으로 대동법을 선호했다. 그는 대동법을 통해 방남인과 농민, 호세가와 소민, 대읍과 소읍의 균형 상태를 이루면 안민을 달성할 수 있고, 안민을 달성하면 부국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조익은 군적 문제에서 강제적 대민통제수단인 호패법이 안민을 해친다며 호패법 시행에 반대했다. 그는 良人의 수를 늘려서 군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노비제를 從母法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호패의 강제성이 야기하는 민폐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익은 군역 문제에서도 제도적 안민을 추구했다.


③ 최명길ㆍ이귀ㆍ김류의 부국론

  • 부국론은 안민론과 달리 자기논리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구체적인 정책 논의 과정에서 표출되었다.
  • 최명길은 대동법 대신 호패법 시행을 주장했다. 그 목적은 재정확충과 군적 누락자 편입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논점은 부국론이었다. 비록 최명길도 대동법 자체에는 원론적으로 찬성했지만, 대동법 시행에는 반대했다. 정치적ㆍ사회적 여건이 녹록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명길이 보기에 대동법은 시행 주체에 따라 얼마든지 균역적일 수도, 부국론적일 수도 있었다. 바로 그 점에서 대동법을 안민의 제도적 대안으로 보았던 안민론자와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 이귀는 인조 대 초반에 부국론 차원에서 호패법 시행을 주장했고, 소금과 철의 이익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자는 염철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 김류는 호패법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찬반의사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법제를 마련하기보다 기존의 제도 안에서 국가재정을 충당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것은 최명길ㆍ이귀와는 다른 논점이었다. 부국론을 주장하는 서인공신세력 안에서도 일반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2) 남인 장현광의 산림적 안민론

  • 남인의 정책론은 주로 산림적 안민론이었고, 일부가 관료적 안민론을 추구했다. 부국론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남인의 정치적 입지가 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조 대 초반의 남인은 대체로 장현광과 같은 안민론을 추구했다.
  • 남인 산림이었던 장현광은 안민을 위한 왕도를 추구하며 국왕의 덕과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제도적ㆍ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장현광은 호패법과 양전론이 민생을 어렵게 만든다며 반대했으며, 안민을 위한 대안으로 향약을 제시했다.
  • 왕도를 통해 안민을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은 서인 산림계와 같았다. 하지만 왕이 교화를 베풀고 재지사족이 향촌을 주도함으로써 안민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장현광의 입장은 조세 경감과 공안 개정 등의 원칙을 내세운 서인 산림계와 달랐다.


2) 정책 논의의 추이
(1) 정묘호란 이전

  • 인조반정 이후 부국과 안민의 방책으로 대동법ㆍ호패법ㆍ양전론이 제시됐다. 인조 초반에는 조익에게 실무를 관장하게 하고 강원도ㆍ충청도ㆍ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세부 규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탓에 대동법은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곧 대동법 반대론과 대동법 폐지론이 부상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끝내 대동법이 폐지되었다.
  • 대동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호패법ㆍ양전론ㆍ군적 정비론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여러 논의 끝에 조정은 호패법을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호패법 시행을 주장한 인물들은 주로 부국론자였다. 그러나 호패법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호패법 강행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부국론자들은 양전론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 병자호란 이전

  • 정묘호란 이후에는 법제에 관한 논의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국론자와 안민론자는 양전 문제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양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 목적은 臺帳에서 누락된 토지를 과세 대상으로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인조는 국가재정 확보만을 위한 양전이 불가하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사간원이 균역을 위한 양전을 주장하고 비변사가 수정안을 마련하자 인조는 양전론을 받아들였다.
  • 당시 부국론자가 포진했던 비변사는 국가재정 확충에 관심을 두었지만, 三司의 논의를 수렴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비변사는 均役과 富國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동시에 새로 파악되는 과세지에는 공물과 잡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조치를 취하여 양전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었다. 반면, 일각에서 계속 요구하던 대동법 시행은 보류되었다.
  •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에서 시행된 양전은 결국 1635년(인조 13) 6월에 일단락되었다. 양전의 결과로 새로운 토지대장이 작성되었고, 세수 확충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균역을 위한 양전’이라는 목적은 그렇지 않았다. 양전이 국가재정 확충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안민론자들은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다. 부국론자와 안민론자의 갈등은 급기야 새 양안을 사용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양쪽의 논쟁은 결국 새로 작성한 양안을 사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3) 정책논의의 구조

  • 호패법 시행이나 과세를 위한 양전 등 부국론적 방향은 안민론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안민론 내부에서는 이미 관료적 안민론과 산림적 안민론이 나뉘고 있었지만, 부국론적인 국가 정책이 시행되면서 부국론과 안민론의 대립이 더 부각되었다.
  • 부국론자들은 안민론자들이 國事와 民事를 나누고는 민사만을 좇는다고 비판했다. 안민론자에 대한 부국론자의 비판은 안민론자의 입지를 좁아지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압박을 느끼던 안민론자들은 부국론자들에게 논리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 이경여, 이경석의 안민 인식

  • 안민론의 입장에 섰던 이경여는 내수사 등 인조의 사적 영역에서 생겨나는 폐단과 공신들의 불법행위, 또 공신들이 주도하던 국가재정 위주의 정책이 민폐를 야기한다며 비판했다. 동시에 안민론자들이 ‘나랏일은 신경쓰지 않고 민생에만 치중하며 명예를 구한다’는 부국론자의 비판에 반론을 제기했다.
  • 이경석도 백성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며 부국론자를 비판했다.


(2) 조경, 이원익의 안민 인식

  • 조경은 국사와 민사를 구분하는 부국론자의 태도를 非안민적 상황의 원인으로 보고 그것이 자연재해를 초래했다며 부국론자를 비판했다. 남인이었던 조경의 주장은 서인 안민론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 이원익은 인조 앞에서 안민론을 변호했다. 국사와 민사가 둘로 나뉠 수 없음을 강조한 그는 保民을 추구하는 수령에게 국가를 위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 정책론을 둘러싼 서인 내부의 대립보다는 서인 부국론자와 남인 안민론자의 대립이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더 컸다. 남인의 관점에서는 안민론에 대한 서인 공신의 비판을 정치적 공세로 인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3. 인조대 후반 안민론의 분화


1) 이식의 산림적 안민론 비판

  •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부국론과 안민론의 대립이 약화되었다. 전쟁 이전에는 청과의 관계가, 전쟁 이후에는 청의 경제적ㆍ군사적 압박이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민론 내부에서도 논리적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 산림적 안민론에 대한 이식의 비판은 안민론 내부에서 일어난 분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식은 인조 초반에 부국론적 국정 운영을 비판하고 효과적 재정 분배를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했다. 그때 그는 안민론의 공통분모를 강조했다.
  • 병자호란이 임박한 시점부터 이식은 산림적 안민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덕성과 교화를 강조하는 산림적 안민론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는 주자학적 덕목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법제로도 얼마든지 안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식은 國民皆兵식의 군제와 균역을 위한 보조적 방안으로서의 대동법을 주장했다.


2) 최명길의 정책주도

  • 안민론 내에서 분화가 이루어졌지만 제도적 차원의 안민을 위한 정책적 대안이 모색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급한 사안은 청의 압력에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 병자호란 이후 사회경제정책을 주도한 인물은 최명길이었다. 당시 공납제의 폐단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최명길은 전란 후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공납액을 감면했지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상당수의 공안이 병자호란을 거치며 유실된 상태였다. 최명길로서는 공안을 마련하고 개정하는 문제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 병자호란 이후부터 안민과 균역을 위한 대동법 시행론이 다시 부상했다. 사헌부는 공납과 청에 보내는 세폐 부담 등으로 고통 받는 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와 최명길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 청에 대한 세폐 부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비변사도 대동법 시행 대신 국가가 소금과 철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안을 채택했다. 김육은 균역과 안민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건의했지만, 재정 업무를 담당하던 沈悅과 비변사는 ‘공안개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공납제의 운영원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4. 효종대 안민론의 추이


1) 산림적 안민론의 변화
(1) 서인계 산림적 안민론의 새 양상

  • 효종은 북벌론을 주장하며 재야의 산림을 적극적으로 초빙했다. 산림들은 이전과 달리 국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처지가 달라지자 산림의 안민론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산림들은 이제 실현 가능한 대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① 유계의 안민론

  • 柳稽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롯한 서인 산림계의 안민론을 대변하던 인물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栗谷의 정치적 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했다. 유계는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려면 왕도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고, 왕도 달성의 구체적인 방안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 유계는 붕당이 존재하더라도 현자를 발탁하고 임용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효종 대 후반의 非안민적 상황을 붕당의 존재와 연결지었던 윤선도와 다른 입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붕당과 안민론이 공존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 차이가 서인 산림계와 남인 산림계를 구분 짓는 요소였다.
  • 유계는 왕도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제도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제도적 안민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지 않았던 기존의 서인 산림과는 다른 태도였다. 산림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 서인 산림계의 입장도 일정하게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 유계는 비안민적 상황의 원인을 공납제의 폐단과 군정의 모순에서 찾았고, 그 대안 역시 제도적 차원에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인 산림계는 대동법을 민폐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실현 가능한 제도적 대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②윤선거의 안민론

  • 윤선거는 송시열과 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했다. 그러나 윤휴를 이단시하는 송시열의 학문적 입장과 달랐고, 사회경제정책론도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안민론은 기본적으로 유계와 비슷하지만 유계보다 제도적 안민의 필요성ㆍ효용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왕도의 원칙을 강조하던 송시열과 유계는 윤선거를 비판했지만, 윤선거는 원칙론만으로는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제도개혁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 큰 흐름에서 보면 유계와 윤선거의 논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모두에게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제도적 안민의 가능성을 확인한 서인 산림계는 士族收布論과 奴婢從母法 등의 제도적인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산림적 안민론과 관료적 안민론 사이의 쟁점 차이가 좁혀진 것이다.


(2) 남인 산림적 안민론의 변화


①권시의 안민론

  • 권시는 1656년(효종 7)에 초빙되어 개혁안을 제시했다. 신뢰 회복, 식량 문제 해결, 군정 개혁을 안민의 단계별 원칙으로 제시하고, 구체적인 대책으로 민의 과중한 조세부담 감면, 量入爲出의 세정 실현, 호구와 토지 규모의 정확한 파악을 제시했다. 특히 군포 부담을 줄이고 호적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했는데, 호적법을 통해 민폐를 해결하고 안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권시는 서인 산림계처럼 왕도에 기초한 안민론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원칙론적인 측면이 강해 비안민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미를 지니기는 어려웠다.


② 윤선도의 안민론과 붕당인식

  • 윤선도는 이미 인조 대부터 功利를 배격하고 왕도의 원칙을 강조하는 산림적 안민론을 드러냈다. 그가 생각하는 안민론의 핵심은 인재를 적절하게 임용하는 得人이었고, 得人을 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修身이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안민을 위한 제도적인 대안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 윤선도의 안민론은 효종 대에 들어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윤선도가 1652년(효종 3)에 효종에게 올린 상소의 핵심은 득인론과 붕당론이었다. 그는 均富의 도를 아는 사람에게 국가 재정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러 붕당 안에 惡人과 善人이 공존하므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붕당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조 대부터 이어지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는 윤선도의 득인론과 붕당론의 상호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 윤선도의 생각에 변화가 나타난 시점은 1655년(효종 6)이었다. 그는 이 해에 「時弊四條疏」를 올려 효종의 군사정책을 비판하고 당시 조정에서 고려하던 양전과 호패법에 반대했다. 더욱 중요한 대목은 윤선도가 이전과 달리 비안민적 상황의 원인을 붕당, 특히 서인에게서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서인 위주로 운영되던 효종 대 정치상황에 대한 윤선도의 비판의식이 깔려있다. 그런 점에서 득인론과 붕당론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거론하던 이전과는 달랐다.
  • 효종 말부터 나타난 서인 산림과 남인 산림의 갈등은 현종 대에 禮訟으로 이어졌다. 예송의 단초가 된 것은 윤선도가 올린 禮說 상소였다. 예송은 본질적으로 학문적 실천과정에서 발생했지만, 남인이 보기에 예송은 효종 대 후반의 비안민적 상황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사건이기도 했다.


2) 제도적 안민정책의 확산

  • 부국론, 관료적 안민론, 산림적 안민론이 공존했던 인조 대와 달리 효종 대에는 부국론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대신 안민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들이 모색되었다. 논의된 내용은 기본적으로 두가지였다. ⑴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인가? ⑵동전을 유통시킬 것인가? 여기에 효종이 북벌을 위한 군비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도 추가되었다. ⑶ 군비 확충 과정에서 영남의 속오군에게 보인을 지급할 것인가? ⑷영장제와 노비추쇄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 병조판서로서 효종의 군사정책을 뒷받침했던 원두표는 안민보다 軍政을 우선시했다. 그는 軍案의 명목과 실제가 불일치하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軍案상의 空戶를 채워나갔다. 아울러 營將 제도를 시행했고, 영남의 속오군을 내실화를 도모하여 保人을 지급하기도 했다. 노비추쇄로 이루어졌다.
  • 효종의 군사정책이 민폐를 발생시키자 김육 등의 고위 관료는 ‘제도적 안민에 역행하는 군사정책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서인 산림도 본격적으로 효종의 군사정책을 비판했다. 북벌의 내용을 군비증강으로 이해했던 효종과 달리 산림들은 그것을 ‘內修外攘’으로 파악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효종의 군비 확충은 功利에만 힘쓰고 安民을 희생시키는 정책일 뿐이었다. 물론 효종은 사림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자신의 군사정책을 강행했지만, 정책 결정에 미치는 산림의 영향력은 점차 늘어났다.
  • 효종의 군사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는 도중에 호서 대동법의 효과가 점차 입증되기 시작했다. 김육은 곧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육은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면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때 서인 중요한 역할을 한 세력이 바로 서인 산림계였다. 물론 그들은 초기에 제도적 안민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정책이 야기한 민폐를 시급히 해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호서 대동법의 효과가 검증되자 그들은 제도적 안민을 왕도 추구의 또 다른 방안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호서 대동법을 ‘良法’이라고 한 송시열의 평가는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산림적 안민론과 관료적 안민론의 논점이 해소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현종대 안민론의 정형화와 정치적 갈등

  • 현종 대는 서인과 남인 두 붕당이 각자의 학문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던 시기다. 예송은 바로 그런 흐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다양한 사회경제정책론이 붕당별로 정형화되어 사회적으로 실현된 시기이기도 했다.
  • 인조 대에 공존했던 부국론, 관료적 안민론, 산림적 안민론은 효종 대를 지나면서 변화를 겪었다. 부국론은 조정 내에서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관료적ㆍ산림적 안민론 사이의 입장 차이는 해소되었고, 남인 산림계는 점차 정치색을 띠었다. 현종 대에 서인과 남인 산림계가 내세웠던 사회경제정책론은 인조반정 이래로 오랜 시간동안 다양하게 모색되었던 사회경제정책논의의 결론이었다.
  • 기해예송에서 승리한 송시열 계열은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고, 남인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물론 정국을 주도하던 송시열 계열은 외척 등 다양한 정치세력과 정치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했지만,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정치적 갈등은 서인 산림과 남인 산림 사이에 형성되었다. 따라서 안민을 위한 사회경제정책론의 논의 구조도 이들 사이에서 설정되었다.


1) 송시열의 내수외양론과 안민론
(1) 내수외양론 중심의 사회경제정책론

  • 송시열은 왕도를 추구한다는 전제 위에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제도적인 안민을 모색했다. 그는 대동법과 호포법이 충분히 시행할 만한 대안이라고 생각했고, 안민을 위해서 진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송시열은 제도적 안민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줄곧 주희의 내수외양론을 적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건의한 제도적 안민론은 단순히 정책론의 차원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내수외양이라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실제로 송시열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에서도 내수외양론을 강조했고, 진휼대책의 대안을 주자의 대응방식에서 모색했다. 그가 사회경제정책론을 굳이 내수외양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한 이유는 명분론적인 사유방식 때문이었다. 제도적 안민론은 현종대 송시열 단계에 이르러서 내수외양론의 일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2)대동법ㆍ호패법ㆍ보오법 인식

  • 대동법에 관한 송시열의 생각은 서인 산림계의 인식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송시열이 대동법을 공납제 문제 해결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제도적 안민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안민을 위한 제도적 대안을 대동법 확대 시행에서 모색했다.
  • 송시열은 良役문제에 관해서도 대안을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내수외양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역문제가 반드시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송시열의 대안은 노비종모법을 시행해서 양역 대상 자원을 늘리고, 군제를 조정해 군사를 줄이며, 戶布法을 제정해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호포제를 시행하는 데 신분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송시열은 호패법과 보오법도 진휼을 위한 방안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호패법이 군역 부과 수단이 아니라, 오가작통법을 전제로 한 안민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가작통과 호패로 민을 편성한 후 통 안에 사망자가 나올 경우 통의 공동책임을 묻는 방식을 구상했던 것이다. 보오법 역시 주공의 본뜻에 따라 환난상휼의 취지에서 운영될 수 있다고 송시열은 생각했다. 이러한 법제를 통한 안민의 방안은 모두 내수외양이라는 큰 틀 안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2) 허목의 안민론과 신법 비판

  • 허목의 안민론은 남인 산림이 유지하던 안민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덕치를 위한 왕의 수양을 요구하며 인심ㆍ풍속의 선악, 재이의 유무를 모두 왕의 덕과 연결 지어 설명했다.
  • 남인 산림계 안민론의 입장에 서있던 허목은 효종 대에 송시열이 제기한 북벌론에 분명히 반대했다. 그는 북벌을 위해 군비를 증강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민폐에 초점을 맞췄다. 비록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론은 초점이 달랐지만, 허목은 그런 차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 허목은 효종에게 북벌 대신 덕치를 위한 수양을 강조했다. 송시열도 물론 효종에게 왕도정치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의도는 서로 달랐다. 송시열이 군신공치의 제왕학을 강조했다면, 허목은 군주 중심의 덕치를 추구했다. 군주권을 옹호하며 덕치를 주장하는 허목의 입장은 인조반정부터 이어진 남인 산림계의 원칙론이었다. 허목은 예송에서도 군주 중심의 예론을 주장했고, 왕도정치론과 연결된 군주 중심의 사회경제정책론을 내놓았다.
  • 남인 산림계의 입장에 섰던 허목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정책이 비안민적 상황을 조성했다고 비판했다. 송시열 계열의 사회경제정책이 당위성을 보장할 수 없는 ‘新法’이므로 군둔전과 군영을 혁파하고 호포제는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허목은 호포제가 공리를 추구하는 신법이라고 비판했는데, 그가 호포제를 신법이라 비판한 것은 주자적인 제도적 안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 맺음말

  • 17세기 사회경제정책 논의 과정에서 부국론, 관료적 안민론, 산림적 안민론이 서인과 남인 내부에서 형성되었다. 인조대 초반에는 각 정치세력 내의 논의가 나뉘는 가운데 호패법 시행론, 대동법 시행론, 양전론 등이 논의되었다.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이전까지는 부국론과 안민론의 대립이 주를 이루었고,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안민론 내부의 분화가 나타났다.
  • 서인 내 산림적 안민론과 관료적 안민론의 갈등은 김육과 김집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효종 대를 거치며 서인 산림계는 효종 대를 거치면서 왕도 추구를 전제로 한 제도적 안민론의 효용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산림이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하고 호서 대동법의 효과가 검증되면서 서인 산림계의 입장도 달라졌던 것이다. 이후 서인 산림계열은 다양한 제도적 대안을 제시해나갔다.
  • 남인은 효종 대에도 여전히 산림적 안민론을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산림적 안민론을 붕당 문제와 연결 지었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예론 등 사상적 차이뿐만 아니라 비안민적 상황에 대한 진단의 차이에서도 심화되었다.
  • 현종 대에 이르러 서인과 남인의 안민론은 각각 송시열과 허목에 의해 정형화되었다. 송시열계의 안민론은 인조대 이래 서인 계열 산림적 안민론의 흐름을 계승했지만, 내수외양론의 틀 안에 제도적 안민론을 도입했다. 반면, 기해예송으로 정치적 위상이 저하되었던 남인 허목 계열은 군주 중심의 안민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송시열이 주자적인 방식을 구상한 것이었다면 허목은 주자적인 제도적 안민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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