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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정도전과 권근의 생애와 사상 비교

by 衍坡 2019. 7. 15.

강문식, 2004, 「鄭道傳權近의 생애와 사상 비교」, 『한국학보』 30




2019.07.15




정도전과




1. 머리말

  • 고려 말 신흥유신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신흥 유신 개인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의 정치적사상적 특징을 밝혀낸 연구도 있다.
  • 하지만 선행 연구들은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그 차이점을 강조하다보니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학문적 입장의 차이로까지 연결 짓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저술 자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의 학문적 입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는 곤란하다.
  • 저자는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의 다양한 관계를 토대로 양쪽의 사상적 공통점과 정치적 지향의 차이점을 검토하려고 한다. 그가 구체적인 비교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정도전과 권근이다.




정도전

▲후대에 그려진 정도전 초상화




2. 생애를 통해 본 정도전과 권근의 관계


(1) 공민왕~우왕 대의 교류

  • 정도전은 1362년 진사시에 합격했다가 1366년 부모상을 당해 3년 간 시묘하고 1369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성균박사가 되었다. 권근은 136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점은 모두 중앙 관서에서 일하던 1370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두 사람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교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두 사람은 1371년부터 같은 관서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에 두 사람이 자주 접촉하며 학문적정치적 견해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 정도전과 권근은 전제개혁 이전까지 같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냈다. 1375년 북원 사신 영접에 반대하고 친명정책을 주장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 북원 사신 영접에 반대한 인물들 대부분은 유배를 떠났고, 정도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권근은 오히려 승진했다. 그러나 유배 기간 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의 돈독한 관계는 정도전이 재출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2)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치적 분기

  • 정도전과 권근은 전제개혁에 관해 입장을 서로 달리했다. 정도전은 전제개혁에 찬성했지만, 권근은 반대의 입장에 섰다. 이것은 단지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고, 신흥 유신이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분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정도전과 권근이 전제개혁에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것은 두 사람의 출신 배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권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명문가의 자제였다면, 정도전은 서얼 출신 어머니의 소생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빈곤했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권근은 급격한 개혁에 반대했지만, 정도전은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 정도전의 유배 생활도 두 사람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 기간 동안 경제적 곤궁을 몸소 체험하고 백성의 처지를 직접 목도했고, 그런 경험을 통해 혁명 사상을 구상할 수 있었다. 반면, 권근은 기득권을 누리며 평탄한 관직 생활을 누렸다. 이런 대조적인 삶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을 갖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정도전과 권근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큰 갈등을 겪지는 않았다. 전제개혁 논의 직후에 권근이 탄핵을 받고 유배를 떠나면서 큰 갈등에서 빗겨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본격적으로 새 왕조 건설을 위한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하던 상황에서 권근은 유배에서 풀려났음에도 양촌에 은거하며 정계에 복귀하지 않았다. 서로 극심한 갈등을 겪지 않은 덕분에 두 사람은 일정하게 유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3) 조선 개국 이후의 협력과 갈등

  • 권근은 1393년(태조 2)에 새 왕조에 출사한다. 그가 출사할 수 있었던 데는 전제개혁 이후 정도전과 큰 충돌 없이 유대 관계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 새 왕조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 권근이 자신의 정책을 학문적ㆍ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기를 기대했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권근으로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도전의 도움이 절실했다.
  • 물론 두 사람이 늘 평탄하게 관계를 유지했다고 보긴 어렵다. 조선 창업의 주역으로 공신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과 비공신세력이었던 권근은 정치적 행보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갈등의 원인이 있었다. 권근이 1397년(태조 6) 明 使行에 다녀온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는데, 그 탄핵을 주도한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이런 사실은 공신세력이 비공신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견제했음을 보여준다.
  • 관료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보면 정도전과 권근은 함께 교육ㆍ연구 활동에 참여했고, 한양 건설을 주도했다.
  • 사적인 교류를 보면 권근이 정도전의 중요한 저술들에 주석이나 서ㆍ발문을 붙였다. 이것은 권근이 자신의 정책을 학문적ㆍ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기를 기대했던 정도전의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음에도 학문적으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권근이 자신의 학문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주석이나 서ㆍ발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 1398년 정도전이 정변으로 살해당하고 권근이 태종과 정치적으로 결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권근으로서는 정도전에 대한 입장 정리가 필요했다. 그는 정도전을 ‘姦臣’으로 규정하고 태종의 집권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권근은 정도전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하며 계승하려 했다.
  • 요약하자면, 정도전과 권근은 일정하게 학문적 입장을 공유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맺었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3. 철학ㆍ윤리사상의 비교


(1) 성리학적 천인관계론의 수용

  • 고려 말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지식인들의 天觀도 漢代의 主宰者적 천관에서 성리학의 天理적 천관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이 강조되었고, 이런 인식은 정도전과 권근에게도 나타난다.
  • 정도전은 理法的 천관을 드러냈다. 그가 보기에 理는 태극과 천지만물에 두루 갖춰져 있다. 24절기를 명확히 나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정도전은 생각했다. 아울러 그는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인간이 하늘과 동일한 理를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권근 역시 인간 존재를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天理를 부여받은 존재이며, 性은 人心에 부여된 천리였다.
  • 정도전은 天人 동일체의 관점에서 災祥이 모두 人事의 得失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도덕적 실천과 군주의 수덕을 강조한다. 권근 역시 천인합일의 실현이 인심의 사욕을 제거하여 天理를 구현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렸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私欲은 人事를 바르게 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었다.
  •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理法적 천관을 바탕으로 하늘과 인간이 동일한 理氣를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천인합일의 실현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보면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천인관계론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2) 실천윤리의 강조

  •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학은 持敬 중심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원나라 허형의 학풍이었다. 정도전과 권근에게도 그러한 학문 경향이 나타난다. 두 사람 모두 성리학 윤리의 실천이 당대의 정치적ㆍ사회적 문제 해결의 핵심 방안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로 강조점은 달랐다. 정도전은 闢異端에, 권근은 가정윤리에 좀 더 강조점을 두었다.
  • 정도전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철학 등 모든 저술에서 윤리의 문제를 가장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유교 윤리의 핵심은 일상 속에서 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仁을 실천하는 대상은 만물을 포괄하지만 실천의 순서에는 차등이 있었다. 정도전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치ㆍ사회ㆍ경제 전반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이단’ 비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天倫을 무시함으로써 국가ㆍ사회ㆍ가족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반인륜적 사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던 이단 비판은 유교적 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 권근은 人道의 확립이 곧 예를 구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았고, 인도의 확립은 가정윤리의 확립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그가 가정윤리에서 특히 중시했던 덕목은 ‘孝’였다. 그래서 그는 군주가 효를 실천하는 데 솔선수범해야 함을 강조했고, 효 윤리의 사회적 확산을 위해 『효행록』에 주석을 달고 그 책을 보급하려고 애썼다.



4. 정치ㆍ사회사상의 비교


(1) 통치체제론

  • 정도전은 재상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재상이야말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최고권자가 되어야 했다. 국왕과는 큰 사건에 관해서만 협의하고,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모두 재상이 행사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구상 속에서 국왕의 실질적 권한은 재상을 임명하고 국가의 대사에 관해서 재상과 협의할 권한으로 축소된다. 이런 정치질서를 구상했던 정도전은 천인합일을 구현하는 주체 역시 재상이라고 보았다.
  • 정도전과 달리 권근은 군주가 국정을 주도하는 통치 질서를 지지했다. 그는 ‘皇極’이라는 표현을 통해 天道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을 표현했다. 권근의 황극론에 따르면, ‘敬’을 체득한 군주가 천도와 부합하는 인도의 표준을 세워 천인합일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군주가 정치를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재상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2) 신분관

  • 고려 말 학자들의 신분관은 당시에 동요하던 신분제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반영한다.
  • 정도전은 하층민의 신분 상승 욕구를 일정하게 인정하고 능력에 따른 상하 이동을 긍정하는 신분제를 구축하려 했다. 물론 그는 良賤制를 기본적인 사회질서로 상정했고, 양인의 직업인 士農工商을 상하로 구분했다. 하지만 정도전에게 사농공상의 직업은 세습신분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취해야 하는 신분이었다. 즉, 정도전은 직업적 차별을 가하지 않았으며, 능력에 따라 신분의 상하 이동이 가능한 사회질서를 구상했다.
  • 권근은 신분의 상하를 명확하게 하여 사회적 分을 엄격하게 확립하려 했다. 그에게 대부와 사와 서인은 각기 자신에게 걸맞는 분수가 있었고, 그에 걸맞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分을 확립하기 위한 차원에서 禮를 강조했다. 각 신분에 걸맞는 예의 내용을 구별하고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신분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안정을 구현하는 그의 해법이었다.




5. 맺음말


  • 정도전과 권근은 일정하게 학문적 입장을 공유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맺었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성리학을 수용한 인물로서 유사한 학문 경향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이법적 천관을 바탕으로 천인합일을 중시했고, 인간의 주체적 실천을 강조했다. 다만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에서 정도전은 벽이단을, 권근은 가정윤리를 강조했다.
  •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질서를 지향하고 상하 이동이 가능한 유연한 신분질서를 구상했다면, 권근은 예제 준수를 통해 엄격하게 신분을 구분하여 사회적 안정을 구현하려 했다.
  • 저자는 “정도전과 권근은 성리학의 이해와 수용이라는 학문적 측면에서는 서로 인식을 같이 하였지만,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 사회ㆍ경제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였으며, 이것은 곧 정치ㆍ사회사상의 차이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 단상


  • 이 글의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정치적 입장을 사상적 입장으로 손쉽게 확대하는 시선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런 문제제기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간단히 사회ㆍ경제적 배경으로 치환하는 대목에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일단 경제적ㆍ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사회변혁을 추구할 것이라는, 혹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거부하거나 온건한 개혁을 추구할 것이라는 전제는 그 자체로 논증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권근이 ‘기득권층’이기 때문에 전제개혁에 반대했다는 주장에는 얼마든지 반례가 제시될 수 있다. 전제개혁을 주장한 조준 역시 몽골 복속기에서부터 번영했던 집안이기 때문이다. 만약 권근이 ‘기득권층’이라 전제개혁에 반대했다면 조준은 왜 전제개혁을 강하게 요구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권근과 조준의 입장 차이는 전제개혁에 대한 견해가 단순히 사회경제적 위치만으로 결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전과 권근의 사상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저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곧바로 사상적 차이로 연결하는 입장에 비판적이긴 하지만, 양자의 연관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정도전과 권근이 구상했던 정치체제가 어떤 점에서 ‘성리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자신의 구상을 주장하며 주자학의 논리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주자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탐구한 위에 구상된 정치질서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당장 신분관만 하더라도 정도전이 漢制를 수용하는 방식은 주희가 한제를 재해석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자학을 수용했다기보다 나름의 정치적인 구상을 내놓고 그것을 四書의 주자주를 끌어다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때 중요한 건 주자학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보다는 주자의 언설로 대표되는 중국(혹은 원)의 권위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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