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2005,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49
정리일: 2019.05.13
1. 조선후기 신분제 이해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
⦁ 18~19세기에 양반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신분제가 해체되고 있었다는 설명은 조선 후기 신분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다. 그러나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극단적인 비대를 통해 신분제가 해체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해는 이론적 근거가 약하다.
⦁ 근대로 이행하던 당시, 영국ㆍ프랑스 등 유럽의 선진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사회구조를 지배ㆍ장악했다. 페르낭 브로델은 그런 구조를 ‘階序制’(hierarchy)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문명사회의 보편법칙으로 보았다.
⦁ 조선 후기에 신분제 해체를 통해서 근대사회로 이행했다는 설명은 브로델의 명제와 잘 맞지 않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례가 특수한 사례인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즉,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의 신분제가 18~19세기 이후 해체되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저자는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간 ‘지배양반’의 범주를 재확인하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 ‘계서제’를 설정할 수 있을지를 검토한다.
2. 제1조건: 호적상 유학 직역의 등재와 족보 보유
⦁ 18~19세기 호적에는 양반의 직역으로 분류되는 幼學戶가 급증한다. 기존 연구에서 이 시기에 양반이 급증했다고 본 것도 당시 호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 하지만 호적은 당시 인구를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와 목적에 맞게 재구성한 자료이다. 따라서 호적은 당대의 家戶와 人口, 身分을 파악하는 데 불충분하다.
⦁ 호적에 기록된 직역은 매우 가변적이므로 혈연에 기초한 세습성을 속성으로 하는 신분과는 무관하다. 실제로 호적상의 유학호가 급증했음에도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양반층의 지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호적상의 유학 직역자를 모두 양반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 양반들은 족보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족보 매입이나 첨삭ㆍ위조 등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족보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을 양반의 一家로도 엮어줄 수 있는 기묘한 문서였다.
⦁ 양반의 제1조건은 일단 호적상의 유학 직역과 족보 소유로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 기준만으로 양반의 규모를 파악하면, 18~19세기 조선은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지배층인 사회다. 그렇지만 그런 사회는 현실적으로 실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양반에 대한 논의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3. 제2조건: 유교적 의례의 준행과 다양한 특권
⦁ 제1조건을 기준으로 하면 사회구성원의 60~70%가 양반으로 상정되지만, 실제로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지배집단은 소수였다. 더구나 그 지배집단 내부에서도 家格의 우열이 존재했다. 그것은 지역사회를 넘어 道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지역과 도 단위에서 家格을 결정한 것은 道學ㆍ文章ㆍ忠節ㆍ仕宦 순이었다. 이 기준은 유교적 지식의 습득과 유교적 가치관의 공유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유교적 가치관의 습득과 奉祭祀ㆍ接賓客으로 표상되는 유교적 의례를 준수하는 동시에, 관직ㆍ문장ㆍ충절ㆍ관직 등으로 빼어난 조상들을 배출한 가문을 조선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이들을 常民과 구별하며 여러 가지 특권과 특혜를 부여했다.
⦁ 따라서 양반의 제2조건은 ‘유교적 의례의 준행과 다양한 특권’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제1의 조건을 기준으로 파악한 수보다 양반계층이 훨씬 적어질 수밖에 없다.
4. 제3조건: 문중과 동성촌락의 형성
⦁ 18~19세기의 ‘지배양반’은 반드시 동성촌락에 거주하면서 宗孫을 정점으로 한 문중 조직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를 주도했다. 즉, ‘지배양반’은 지연(마을)과 혈연(同姓)이 결합한 동성촌락을 배경으로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양반층을 말한다. 따라서 지배양반이 되기 위한 제3의 조건은 ‘문중 조직과 동성촌락 형성’ 여부였다.
⦁ ‘지배양반’은 결국 제1ㆍ2ㆍ3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계층으로 제한된다. 이들의 신분적 지위는 매우 확고했으며,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5% 남짓으로 추산된다. 즉, 사회구조의 정점에 있는 5% 정도의 지배양반층이 10~15% 내외의 중간층과 80~85%에 이르는 절대다수의 하층을 장악하고 통제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8~19세기 조선 사회는 전형적인 계서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5. 맺음말
⦁ 첫번째 조건에만 충족되는 경우는 호적상의 직역과 상관없이 常民에 불과하다. 두 번째 조건까지 충족할 경우 附族ㆍ中路ㆍ新儒ㆍ別儒 등의 호칭이 따라다녔다. 세 번째 조건까지 모두 충족할 때 양반으로서의 필요ㆍ충분조건이 모두 충족된다. 이들이 바로 ‘지배양반’이었다.
⦁ ‘지배양반’에 속하는 소수 지배세력이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사회구조를 장악ㆍ통제했다는 점에서 18~19세기 조선 사회는 ‘계서제’가 굳건히 유지된 사회였다. 그 계서제는 班常制에 기초한 신분제에 제약을 받았다는 점에서 ‘신분제적 계서제’(status hierarch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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