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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동아시아의 근대화, 식민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by 衍坡 2019. 3. 9.

미야지마 히로시, 「동아시아의 근대화, 식민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2004)






1. 동아시아라는 말의 맥락


이 글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 담겨있다. ①동아시아의 근대화와 식민지성에 관한 기존의 논의, ②기존 논의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논의 틀을 구성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내용, ③저자 나름대로 대안으로 제시한 동아시아 역사상이다. 저자는 동아시아의 개념을 “동아시아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계사와 오늘날의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유효한 틀”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하는 저자의 논의를 요약한 것이다.




2. 근대화에 대하여


근대(Modern)와 근대화(Modernization)는 철저히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반영한 것으로 “그 이전 시대와 명확히 구분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과 동아시아가 처음 조우한 것은 16세기지만 본격적으로 두 세계가 연결된 것은 경제적ㆍ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유럽이 동아시아를 강타한 19세기의 일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이후 유럽의 근대를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 설정했다. 그 뒤로 약 15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서구화가 진전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구와 동아시아의 동질성이 강화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질성도 점차 짙게 나타났다. 따라서 전통과 근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통과 근대가 연속성을 띠었던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과의 분리가 강하게 의식되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근대와 근대화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는 전통과의 단절과 연속을 세계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동아시아에 대하여


(1) 동아시아 연구의 특수한 위치


임마누엘 월러스틴에 의하면 현재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19세기에 성립했다.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이 시장경제와 시민사회를 확립한 유럽이었다면, 인류학과 동양학 등의 인문과학은 유럽이 세계에 진출하면서 마주한 지역을 연구했다. 동양학은 이슬람ㆍ인도ㆍ중국을 주로 연구했지만, 중국 연구는 다른 지역에 관한 연부게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다. 중국이 직접적인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데다 한자라는 독특한 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연구는 일본에서 활성화했다. 이것은 한국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에 들어서 미국에서는 비서구 지역을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려는 ‘지역 연구’가 등장했다. 로스토(Walt Whitman Rostow)의 근대화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로스토의 이론은 비서구 지역의 문화적 개성 대신 계수화할 수 있는 지표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구미의 한국ㆍ일본 연구도 지역 연구의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성립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비유럽 사회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2) 동아시아적 관점 부재의 원인

동아시아 각국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 동아시아적 관점이 부재한 가장 큰 원인은 일국사적 관점이다. 그러나 일국사적 관점이 힘을 얻은 데는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1) 일본 ‘봉건제’론과 탈아론적 역사 연구

일본의 경우에는 일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연구 경향이 동아시아적 관점의 부재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 봉건제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사에 유럽과 동일한 ‘봉건제’가 나타났고 그 결과 일본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 그 이론의 기본적인 논점이다.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이데올로기로 창출된 일본 봉건제론은 탈아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럽중심주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유럽적인 ‘봉건제’ 개념을 일본사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사에서 봉건제가 언제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봉건제와 근대화(정확히는 자본주의화)의 관계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맑스에 따르면, 봉건제 말기에는 소경영 생산 양식이 고도로 발달했다. 자본주의화는 소경영 생산 양식의 자기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봉건제와 자본주의화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실증된 것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일본 봉건제의 증거로 거론되는 내용은 시기마다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일본 봉건제론이 실증된 이론이 아니라 ‘봉건제를 거쳐야만 자본주의화가 가능하다’는 명제에 대한 집착임을 보여준다. ‘문명 생태사관’, ‘해양사관’, ‘이에 사회론’ 역시 일본 유럽과 일본의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한 담론이라는 점에서 일본 봉건제론과 공통적이다. 이 견해들은 일본 학계의 유럽 콤플렉스와 동아시아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만 자본주의화에 성공했다는 논쟁적인 전제에서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구나 일본 봉건제론이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발명되었다는 점이 의식되지 못했다.


2)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과 일국사적 관점

한국사 연구는 처음부터 유럽 동양학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못했고, 주로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한국사 연구가 이루어졌다. 서구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지역 연구와 함께 한국이 연구되지 시작했지만 역사적 통찰이 결여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연구는 질적ㆍ양적으로 모두 큰 진전을 보였다. 다만 시기별 연구의 결합은 취약한 편인데, 전근대사 연구가 문화구조론의 관점에서 주로 연구된 반면 근현대사가 주로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는 처음부터 ‘외국사’ 연구라는 인식이 희박했다. 주로 아시아주의적 입장이나 일선동조론의 관점에서 한국사가 연구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자체적인 한국사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목표는 주로 식민지기 한국사 연구를 비판하는 데 있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그런 맥락에서 제시되어 한국사 시대구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내재적 발전론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한국사의 발전 모델을 유럽 혹은 일본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사의 기본 법칙’에 입각해 한국사가 고대 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화 순으로 발전했음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내재적 발전론이 비판을 받으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둘째, 내재적 요인을 강조하느라 동아시아 세계와 맺는 유기적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련성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타율성론ㆍ정체성론으로 연관되어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구 경향은 오히려 한국사 전개를 왜소화하고 연구의 쇄국화를 초래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3) 중국 연구와 전제 국가론

중국 연구의 통설에 따르면, 7~8세기까지 중국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에 수용되어 동아시아의 공통성이 강했으나 당의 쇠퇴로 공통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중국 문명의 형태가 당ㆍ송 전후에 계속 일관되게 유지되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러나 당송 변혁기 이후 중국 문명에 변화가 나타났고, 한반도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 왕조와 일본이 당대까지 주로 국가 체제와 관련된 문화를 받아들였다면, 송대 이후에 수용된 문화는 사회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중국 문명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요인은 전제적인 국가체제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제도가 확립되고 주자학이 성립되면서 크게 변화했다. 특히 명대에는 과거제도와 주자학이 결합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사대부층의 성립은 그런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변화의 결과로 국가체제가 안정성을 지닐 수 있었다. 조선과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국가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공통성이 동아시아 연구의 중요한 과제다.




4. 동아시아의 근대에 대하여


(1) 세계사 인식 문제로서의 근대


저자는 일국사적인 관점과 유럽중심적 관점에서 근대를 파악하는 방식에 비판적이다. 그는 오히려 근대를 “현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와 연계된” 시대로 다시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근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16~18세기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과제는 “경제ㆍ정보 측면에서 진행되는 세계화와 정치ㆍ문화적 면에 놓인 국가ㆍ지역의 장벽 사이의 모순에 있다.” 따라서 근대는 세계사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는 현재 세계 구조의 단초가 유라시아 차원의 경제 틀이 형성된 16세기에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세계 경제의 형성은 중국의 압도적인 부에서 기인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2)동아시아의 초기 근대


1) 세계 경제 발동 기점으로서의 동아시아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적ㆍ문화적 발전은 세계사 차원의 근대를 발동시켰다. 강남의 수공업ㆍ상업 발달과 인쇄술 발달로 중국의 경제가 발전했다. 과거제도와 주자학이 성립되고 사대부라는 독특한 지배 엘리트가 등장하면서 국가 체제의 측면에서도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다만 송대에는 당시의 변화들이 안정적인 체제로 수렴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경제적 발전은 원대에도 지속되었다. 주자학과 과거제도가 결합된 것도 원대 후반의 일이다.


2) 주자학=초기 근대 동아시아 국가의 그랜드 디자인

명대에 들어서는 안정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주자학에 기초한 과거의 활성화, 과거로 선발된 관료들이 운영하는 집권적 국가체제의 확립이 있었다. 주자학은 그 국가 이념을 뒷받침했다. 주자학 이념에 입각한 국가체제는 매우 세련된 것이었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에 따르면, ①만물을 관할하는 이(理)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관점, ②모든 인간에게 이(理)를 인식할 능력이 있다는 평등주의적 관점, ③학문을 탐구해 이치를 터득한 인간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도덕에 기반해 국가를 통치한다는 관점은 주자학의 참신한 요소였다. 명대 이후에 주자학이 국가교학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송대 이후의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응해 국가를 지탕해는 사상으로 주자학이 적합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송대 근세설이 일본 학계에서 널리 지지받았다. 그에 따르면, 과거제도 확립과 황제 독재권 강화로 집약되는 국가체제의 변화와 상품 경제ㆍ수공업의 발달과 도시 번영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변화는 근세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송대와 원대에는 여전히 불안정했으며 명대에야 확고해졌다. 저자가 명대를 초기 근대의 시작으로 파악한 것은 그 때문이다.


3) 명ㆍ청 시대의 국가와 사회

사대부는 명대 이후 국가ㆍ사회 체제의 형태를 상징했다. 과거제도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집안과 출신을 따지지 않는 개방적인 제도였다. 사대부의 지위는 그 대에 한정되고 세습도 인정되지 않았다. 과거(科擧) 관료의 지위도 기존의 지배 엘리트와는 달랐다. 당대까지는 국가와 사회체제가 군주ㆍ지배 엘리트ㆍ민중이라는 삼중 구조였지만, 송대 이후에는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가 민의 일원에 불과했다. 과거를 통한 관료제의 확립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종족’의 형성은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사대부는 과거제도의 개방성과 관료의 비세습성에 대응해 부계혈연을 결속했다. 과거 합격자를 계속 배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편, 명대 이후에는 국가와 사회가 서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신분제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폐기할 수 있었다.


4) 조선에서의 주자학 수용과 새로운 국가 체제

조선은 중국과 달리 주자학을 먼저 수용하고 그게 걸맞는 국가ㆍ사회를 구축했다. 사회체제의 측면에서는 비주자학적 양상이 유지되다가 점차 주자학이 사회 전반으로 보급됐다. 그러나 중국과 다른 과거제도나 신분제도는 주자학 수용을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결국 조선은 독자적인 과거제도와 신분제도를 창출함으로써 주자학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조선에 주자학이 전면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의 고유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건 중 하나가 양반의 존재 형태다. 양반은 토지 소유자로서 어떤 특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토지 소유의 측면에서 서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양반도 중국의 사대부처럼 민의 일원이었다. 송대 사대부도 영역적 지배자로서의 성격을 갖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 송대 이후 주자학이 점차 국가교학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5) 도쿠가와 일본의 국가체제와 주자학

통설에는 주자학 수용의 정도가 서구화 가능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한다. 주자학 수용이 부분적이었던 일본이 서양의 충격에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 엘리트였던 무사층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토지조사사업[太閤檢地] 이후 영역적 지배자로서의 성격을 상실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사대부, 조선의 양반과 공통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에도시대에 들어 소수의 상층 무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사가 영역적 지배 권한을 부정당했다. 물론 다이묘가 다이묘가 독립적으로 영지를 지배했는지 쇼군에 종속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다이묘가 쇼군으로부터 여러 제약을 받은 건 분명하다. 전국시대 이후 일본의 집권세력이 강조한 ‘천하총무사’(天下惣無事)는 무사에게 일종의 자기부정이었다. 쇼군과 다이묘, 다이묘와 가신 사이에 종속관계를 만드는 기본 요인이기도 했다. 다이묘의 독립성에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에서 유학이 통치 이념의 한 요소로 수용되고 장려된 것은 이런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일본의 주자학 수용은 그것이 가능했던 정치ㆍ사회체제가 성립된 이후의 지극히 선택적이 수용이다.


일본 막부의 주자학은 기본적으로 체제 옹호를 위한 것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주자학 이념에 의거한 국가체제를 만들어내는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사상사 연구에서는 주자학을 비판한 고학파나 국학파가 근대 일본을 사상적으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막번체제를 기본적으로 옹호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들로부터 유럽의 근대적 사유와 유사한 측면을 읽어내는 건 조심스럽다.


3) 동아시아의 후기 근대

19세기 서양의 충격을 계기로 동아시아 근대의 2단계가 시작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 시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주자학 전통의 연속과 단절을 파악하고 그 부정적ㆍ긍정적 유산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주자학적 국가체제는 경제적ㆍ사회적으로 서구적 근대를 수용하는 데 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특권 귀족을 배제했다는 점이나 과거제도,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것이다. 사적 소유권이 확립된 동아시아 각국에서 근대적 토지제도가 신속히 확립된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군주권의 절대성과 민본주의는 서구적 근대와 양립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군주의 절대성은 제도적으로 제약되지 않았다. 민본주의가 비록 민을 강조했지만 민은 어디까지나 통치의 객체였을 뿐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2댄계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됐고,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전망할 때 전통의 부정적ㆍ긍정적 유산을 바르게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식민지 지배의 문제


동아시아 근대의 2단계가 시작되자 일본은 제국주의 진영에 가담했다. 그 결과 일본과 한국ㆍ중국이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을 그리는 ‘양극분해’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현상의 전제로 동아시아의 개항이 왜 19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19세기에 서구와 동아시아의 역학관계가 역전됐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19세기 동아시아의 경제 정체라는 견해가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주자학적 국가체제가 한계에 다다르면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어려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국가체제 대신 서구적인 ‘국민국가’ 체제를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특징 중 몇 가지는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귀족 권력 배제, 과거에 의한 관료 선발, 집권적인 관료제 통치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국가 체제 변혁에 필요한 요건이 무엇인지 인식되기 어려운 구조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사정이 달랐다. 무사에게 서구의 군사력에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곧 자기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서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재빠르게 조성되었다. 더구나 관료제에 의한 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중국ㆍ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에 ‘국민국가’ 창출이라는 과제를 인식하기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와 비교했을 때 일본에 의한 대만과 한국의 식민지화와 중국 침략이 독특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이 식민지로 지배한 대부분의 지역은 많은 측면에서 일본과 공통점을 지닌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배에는 이중적인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일본 국내에 시행된 정책을 답습하는 형태로 식민지배정책이 실시되었다. 지조개정사업과 토지조사사업에 나타난 유사성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만과 조선에는 사적 소유권이 거의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근대적인 토지제도가 쉽게 확립될 수 있었다. 둘째, 일본의 식민지배 방식은 그 지배 논리를 무너뜨릴 가능성도 내포했다. 식민지배를 합리화한 명분은 ‘근대적 개발’이었지만, 정작 식민지가 개발되면 일본의 존재는 불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제로서는 ‘민족말살’과 ‘내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제국이 저절로 무너지는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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