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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규장각 초계문신 연구

by 衍坡 2018. 5. 3.

정옥자, 1981, 「규장각 초계문신 연구」, 『규장각』 4



1. 서론


鄭玉子의 논문 「奎章閣 抄啓文臣 硏究」는 규장각 연구의 일환으로 초계문신제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 글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연구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규장각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규장각의 문화적인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문물제도 정비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正祖의 정치적인 의도 하에 만들어진 정치적 기관으로 이해하는 방향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연구들이 규장각을 체계적 ・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규장각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인 초계문신제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규장각이 가진 복합적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규장각은 정조가 “繼志術事, 崇儒重道의 旗幟를 내걸고 왕권강화와 왕조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대응책을 마련”하여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이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설립하였다고 한다. 즉, 정조는 문화정책를 통한 사회질서의 재정비와 자신의 세력기반 구축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복합적인 이유에서 규장각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규장각의 성격이 시기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조작과 제도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즉, 정국이 불안정하였던 정조 재위 초기의 규장각은 정치적인 의도가 두드러졌다면, 정조의 왕권이 안정 국면에 접어든 재위 중반 이후부터는 규장각이 점차 문화기관으로 자리잡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右文之治 作人之化”라는 이념에 입각하여 인재 양성의 기능 역시 강화되었고, 이는 초계문신제도의 정비로 이어졌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규장각의 제도정비는 《奎章閣志》의 완성과 함께 일단락되었는데, 이 책은 1779년-1781년-1784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抄啓文臣은 《규장각지》再草本의 ‘培養條’에서 초계-시강-시제-친림-재외-상벌이 규정되면서 규장각의 제도로 정비되었고, 完成本의 ‘敎習條’에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즉, 정조가 규장각을 중심으로 일원화한 권력을 토대로 “문풍진작을 위한 문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한편, 이를 수행할 인재의 양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초계문신제가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奎章閣과 集賢殿을 유사한 기능으로 파악하면서, 그 하부 기능이었던 초계문신제와 賜暇讀書制 역시 상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규장각과 집현전이 상응하고, 또 규장각의 기능에서 인재양성이 중요한 기능이라는 점에 주목한 저자는 집현전 연구의 한 일환으로서 초계문신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동궐도 중 창덕궁 주합루 부분. 이 건물은 정조 대 규장각으로 사용되었다.



2. 초계문신제의 확립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文臣講製節目”이 의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정조는 사대부들이 “名節을 천하게 여기고 行檢을 버리는 데로 돌아가” “經傳을 강하지 않고 文學을 익히지 않아 성현의 사업을 모르는” 지경을 언급하였다. 즉, 조선의 문풍이 부진한 것은 인재 배양이 근본을 잃었기 때문이고, 나이 어린 문신들은 과거 시험에만 몰두하며, 문신들이 경서 공부를 하도록 과제를 내주는 규정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정조는 “문신재교육을 통한 학문의 진흥과 기강의 확립”을 도모하고자 초계문신제를 강구하였던 것이다.


초계문신제도의 규정을 담고 있는 <文臣講製節目>은 《규장각지》재초본 배양조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선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강제할 시관은 규장각 내각에서 고른 제학 및 직제학 중에서 두 사람을 뽑아 그 달의 초계문신 교육과 편달을 맡겼다. 


1781년 2월 18에 이르러 이상의 절목에 따라 초계문신 20명을 선발하였다. 徐鼎修, 李時秀, 李益運 등이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하지만 절목과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탓에 人選 직후 곧바로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 10일에 절목과 장소문제를 해결하였고, 4월 19일에 창덕궁 誠正閣에서 최초의 親試를 행하였다. 정조는 친시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였는데, 외관직에 있어 미처 상경하지 못한 조윤대를 의금부에서 심문하게 하는 벌을 내렸다. 저자는 이것이 “초행부터 결석하는 사례를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친시의 결과는 며칠 뒤인 4월 22일 발표되었다. 이 명단에는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18일 기준으로 관직이 주어지지 않았던 이들에게 관직이 수여되었고, 기존 관직자 역시 다른 관직이 주어지기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官階가 대체로 낮아 9품관이 가장 많았다. 저자는 이것이 “품계가 낮은 年少文臣에게 중점을 두어 대성의 기틀을 마련하여 주려는 배려”였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들의 성적이 일곱 단계의 등급으로 나뉘어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3. 초계문신의 강제규정


(1) 試講 : 경전에 대한 강의

저자는 이 절에서 초계문신의 강제절목에 대한 소개와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초계문신은 매달 두 차례 승지의 감시 하에 시강에서 사서삼경을 강하였다. 시강은 성리학의 ‘七書體系’를 유지하여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 – 시전 – 서전 – 주역 순으로 이루어졌다. 四書의 경우 大文과 註를, 詩傳의 경우 大文과 大旨를, 書傳은 大文과 扁題를 周易은 大文과 卦序를 강하였는데, 이를 일정하게 나누어 하루에 강할 분량을 정하였다. 그리고 강원은 하루의 분량을 다시 20첩으로 나누어 강하였다.


하지만 저자는 시강에서 중요한 것이 유학 경전 본래의 문의를 탐구하는 것이었다고 밝힌다. 그것은 通-略-粗-不 네 등급으로 시강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경전의 문의에 대한 숙지도’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정조는 “文意에 정밀한 사람이 꼭 구두에 익숙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句讀와 科文을 공부하는 것에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즉, 기본적으로는 “경전에의 탐구 내지 궁경을 중심으로 하는 文風復古策의 취지를 다시 천명하면서도 功令(과문에 필요한 변려체)에 집착하는 세태를 참작해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정조가 육경에 입각한 ‘文以載道論’의 학문적 입장을 가졌고, 성리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心性論에 집착하는 성리학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초계문신을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 보았다. 따라서 시강은 조선왕조의 전통적 학문체계인 칠서체제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문의를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試製 : 강을 받은 후 그것을 토대로 제술문을 쓰는 것

시제의 종목은 논ㆍ책ㆍ표ㆍ배율ㆍ서ㆍ기였으나, 그것이 30종목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초계문신의 교육 강화 방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제는 매달 20일 이후 한 차례 실시되었다. 시관이 30종의 문체를 나열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면, 임금이 문체를 정해주었고, 시관은 그 문체에 맞게 글의 주제를 몇 가지 정하여 시제를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 되었던 문체는 바로 ‘論’과 ‘策’이었다. 그것이 致用의 일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4. 초계문신에 대한 장려책


정조는 초계문신을 격려하고 그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다양한 조치들을 하였다. 가령 “문신의 전강 및 제술, 차제, 시사에 참석하는 의무가 면제”되거나, 직책이 없어 녹봉을 받지 못하는 자, 또는 본직이 罷削된 자 등에게 군직을 내리는 등의 배려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외에도 정조는 다양한 제도를 통해 초계문신의 교육을 진작하고자 하였다.


먼저 친림을 실시하였다. 친림은 정조가 초계문신의 講製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정조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고, 또 초계문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친림을 실시하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왕이 친림을 하였을 때에는 친림시제와 친림시강이 이루어졌다. 시제의 경우 매달 1일에, 시강의 경우 매달 20일에 규장각 내각에서 왕에게 거행할 날짜를 물었다. 이어 왕이 날짜를 정해주면, 규장각에서는 시임ㆍ원임 각신의 이름을 나열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시제에는 왕이 선택한 시관들이 감독하여 모든 被選人이 응시하고, 시강의 경우 규장각에서 書啓하여 수점한 사람만 응시하였다. 시제의 경우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친림시강을 거행할 경우 새로운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답하였던 문제를 다시 내어 새로운 답을 쓰게 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정조는 혹서기와 혹한기의 경우 집에서 학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시제의 경우에는 어제를 주어 주제에 맞게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시강의 경우에는 어제조문을 내려 신하들이 임금의 질문에 대해 강의로 대답하고, 시관이 등급을 매겨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초계문신 중 외직에 있는 사람들은 내각에서 일정한 기한 내에 올라올 것을 독촉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제와 어제조문을 보내 답하게 하여 평가하였다.


다음으로 고과에 따른 상벌제의 실시이다. 정조는 초계문신의 교육 성취도에 따라 상벌을 내림으로써 교육 효과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하였는데, 考課에 따른 상벌은 다음과 같이 실시되었다.


◎三次居首者 - 7품 이하일 경우 6품 이상으로 올림

- 6품 이상일 경우 관위를 올림

- 이미 관위를 올린 자일 경우 당하관으로 가장 높은 당하 정3품 벼슬을 줌

- 이미3품 벼슬에 오른 자일 경우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줌

◎시강과 시제에서 네 번 居不한 자는 중벌을 내림

◎시강과 시제에서 세 번 居不한 자는 의금부에서 심문케 한다.

◎시강과 시제에서 두 번 居不한 자는 추문하여 살피게 한다.


저자가 “臺職(사헌부)이나 侍職(승정원)을 지냈더라도 마땅히 법에 따라 처리한다”고 한 점에서 이상의 고과규정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奎華名選≫의 발간이다. ≪奎華名選≫이 발간된 것은 1792년(정조16)의 일이다. 이는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하나는 1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운각활자로 찍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17권 3책으로 구성되어 이 역시 운각활자로 찍어낸 판본이다. 전자는 정조 5년에 최초로 선발되었던 초계문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면, 후자는 2차로 선발되었던 초계문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즉, 초계문신들의 작품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업이 초계문신제도의 결과물을 “공동의 문집으로 수렴시킴으로써 초계문신의 士氣와 聲價를 높여 주려는 정조의 배려”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5. 초계문신제의 의의


저자에 의하면, 초계문신제는 시행 이후 일련의 성과를 거두어 정조가 문풍복고책을 추진하는 기초 작업으로서의 성과를 거두었다. 정조는 초계문신의 교과를 講과 製로 나눈 후 제보다는 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구두보다 문의를 강조함으로써, 과문을 위해 경전의 글귀에 집착하는 풍조를 쇄신하고 경문 본래의 의미를 탐구하게 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제술에 있어서도 정조는 “道文一致 내지 文以載道論의 바탕에서 학문에 기반을 둔 醇正文을 권하고 당시 문사들의 말폐였던 雕繪(깎고 다듬고 그리는 것)의 문장기교라는 폐습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정조는 초계문신의 교육을 통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해나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와 같은 초계문신 교육은, 정조가 ‘功令’을 중심으로 한 사장학에 집착하는 세태를 극복하여 ‘經明行修’의 도를 다하여 ‘修己治人’이라는 사대부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는 동시에, 학문의 축적을 바탕으로 문장을 쓴다는 도문일치론에 입각한 문장론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주자학 국가인 조선에서 주자학의 사서삼경체제를 따르면서도 심성론에 대한 공리공담을 극복하여 선진시대의 원시유학 이념에 회귀하려는 강한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정조가 퇴락해가는 주자학을 만회하기 위해 주자서를 간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리학 자체의 진흥보다는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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