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구, 조선의 궁궐 도시와 만나다 - 궁궐의 앞과 뒤, 서울학연구33, 2008
2018.12.12
1. 머리글
저자는 한반도의 고유한 도성 조영과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도성 조영의 특성이 조선의 도성 건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했던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배후산과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건설되었다. 경복궁이 백악산과 육조대로 사이에 위치했다면, 창덕궁은 응봉산과 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다. 두 궁궐의 공통적인 특징은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다. 배후 산자락의 능선과 궁궐의 배치는 고구려 이래로 계승되어 온 한반도의 도성 조영 방식이 반영되었고, 궁궐과 그 앞에 설치된 관아의 배치는 당시 동아시아 도성 조영의 특징을 보여준다. 저자는 궁궐의 앞과 궁궐의 뒤라는 측면에서 한양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도성 조영 방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검토했다. 이하의 내용은 저자의 논의를 요약한 것이다.
2. 궁궐이 도시와 만나기까지
도시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자기완결적인 구조를 갖춰나가기보다 별개로 성장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도시가 형성되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중국과 일본, 유럽의 도시 역시 별개로 구분된 영역들이 점차 하나로 통합되면서 하나의 도시로 성장해갔다. 예컨대, 중국의 고대도시를 상징하는 수ㆍ당대의 장안성(長安城)도 처음부터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를 포괄했던 것은 아니다. 전한(前漢) 당시 25만으로 추산된 장안성 인구 중 성내에 거주하는 인원은 약 8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도성 인구의 대다수는 성의 동북쪽 바깥에 밀집한 리(里)에 거주했다. 장안성이라는 한 도시 안에서도 궁궐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중심부와 백성의 거주지가 구분되었던 것이다. 장안성의 이원적인 구조는 조위와 북위를 거쳐 수나라 대에 이르러서야 도시의 중심부와 백성의 거주지가 통합된 형태로 변화했다.
일본의 근세성하정도 중국의 경우와 비슷했다. 전국시대의 성하정(城下町)은 소우가마에(総構) 안에 다이묘의 거관과 가신단의 저택 등이 위치했지만, 일반 상공업자의 저택은 그밖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성하정 역시 도시 중심부와 일반민의 거주지가 구분된 이원적인 구조였다. 성하정의 이원적 구조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통합되어 근세성하정의 모델이 제시되었다. 유럽의 중세도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프라하는 9세기에 건설된 흐라드차니성과 그 시가지, 상업도시로 성장한 구시가지, 강 남쪽의 비쉐흐라드 등 독립적으로 형성된 요소들이 결합해 하나의 도시를 형성했다.
한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발달한 요소들이 결합돼 하나의 도시를 구성했던 현상은 한국사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 처음 조영된 고구려의 도성은 혼강 북쪽의 험준한 산 정상부에 지은 단독산성이었다. 졸본에 최초로 세워진 고구려의 도성은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옮겨갔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도성은 단독산성 → 중간단계 → 포곡식산성&평지왕성 → 완결적 도성의 형태로 변화했다.
서기 3년(유리왕 22) 국내지역으로 옮긴 후 쌓은 위나암성은 본래 단독산성이었다가 단독산성과 포곡식산성&평지왕성의 중간단계를 거쳤다. 209년(산상왕 13) 천도한 환도성은 단독산성과 포곡식산성&평지왕성의 체계를 갖추었다. 427년(장수왕 15)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해 국내지역의 고구려 도성과 유사한 구조, 즉 포곡식산성 및 평지왕성 형태의 도성을 조영했다. 포곡식 산성 아래 안학궁을 짓고 대동강 일대까지 넓은 시가지를 포괄하는 도읍을 지었던 것이다. 586년(평원왕 28)에는 평양성 서쪽의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때 조영한 도성은 산성ㆍ왕성ㆍ시가지의 모든 요소를 결합한 완결적인 도시였다. 완결적인 도성 건설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산과 강 등 지형적 특징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그 이면에는 점점 커져가는 국가 규모에 맞게 시설을 확대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가 놓여있었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왼쪽)과 백제의 수도 사비성(오른쪽) 모형
백제는 도성 조성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강을 이용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한산, 웅진성, 사비성 순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 도성이 남쪽으로 강을 두었다면, 백제의 도성들은 모두 북쪽으로 강을 두었다. 특히 백제 도성 중 가장 완비된 형태였던 사비성은 강을 기준으로 외곽 지역의 경계를 삼았다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장안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둘째, 구릉의 능선과 능선 간의 평지에 효율적으로 성곽을 쌓아 더 넓은 시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지형적ㆍ지리적 조건에 따라 성곽을 쌓고 넓은 시가지를 확보하던 도성 조영의 전통은 고구려의 장안성과 백제의 사비성 건설에서 일차적으로 성립되었다. 그 도성 조영의 전통은 단절되지 않고 고려로 계승되었다가 조선 초기 한양 건설에 반영되었다.
3. 궁궐의 뒤
한양이 도읍지로 처음 선정되고 조선의 도성으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양의 입지선정과 축조가 전적으로 풍수지리에 의존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주변의 지형을 활용해 시가지를 둘러싸는 한양 입지는 고구려의 포곡식산성의 입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러 산릉선과 평지를 이어 성을 축조하는 방식도 한양의 성곽과 백제 사비성의 나성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조선의 도읍 조성에는 고대부터 축적된 도성 조영의 전통이 반영되어 있다. 포곡식산성의 분지 지역을 대규모화했을 때 한양의 입지와 비슷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ㆍ백제의 도성 입지와 한양 입지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긴 어렵다. 더구나 우리나라 산성의 세 유형(테뫼식ㆍ포곡식ㆍ복합식)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포곡식산성은 고구려와 조선에서도 모두 일반적인 산성의 형태였다.
조선의 도성 건설에 포곡식산성을 중심으로 궁성과 시가지를 통합하는 고대의 도성 조영 전통이 반영되었다면, 산성과 같은 우리나라 도성 건설의 공통적인 요소가 중국이나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인 특징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성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왔으므로 중국이나 일본의 성곽과 구분된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 동북지방의 산성들은 고구려 때 축조된 한국 고유의 성곽양식이며 포곡식산성은 고구려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구려의 포곡식산성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옛 고구려의 영역과 한반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한편 일본의 고대 산성유적에는 조선식 산성과 고우고이시 유적이 있다. 전자는 백제 멸망 후 백제 고위 관리가 일본으로 넘어가 직접 축성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 관련 문헌기록이 없어 그 성격이 불분명했지만, 1980년대 이후 발굴 작업 등을 통해 조선식산성과의 관련성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백제가 일본의 산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도성 양식의 고유성은 난징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난징은 종종 백제의 사비성이나 조선의 한양과 비교되어 상호간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그것은 난징의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중국 성의 대부분은 평지성이지만 난징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도성 조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연지형을 이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난징과 사비성&한양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성곽을 축조하며 자연 지형을 이용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결국 “한양의 궁궐 뒤에서 만나게 되는 산봉우리와 산능선은 ‘산성으로부터 형성되어온 우리 도성의 역사를 증명해주고 또한 그 역사와 그 역사가 만들어 낸 우리도시가 정말 독특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궁궐의 앞
한양의 정궁 역할을 했던 경복궁과 창덕궁 앞에는 공통적으로 대로(大路)가 있었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 육조대로가 조성되었다면, 오늘날의 돈화문로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 조성된 대로였다. 두 대로의 양옆과 종로, 남대문로에는 모두 행랑이 설치되었다. 이 행랑들은 고려의 도읍 개경에 설치되었던 장랑(長廊)을 계승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한양과 개경의 대로에 설치된 행랑은 도성의 중심공간을 형성하고 그 후방의 시가지를 엄폐하는 역할을 했다.
궁궐 앞 대로 양옆에 조성된 행랑은 중국의 도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가 북경을 건설할 때 조성되어 청대에도 유지되었던 황성 정문의 T자형 장랑이 그것이다. 그 장랑 바깥에는 조선의 육조대로와 마찬가지로 중앙관청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러한 황성의 구조는 그 이전 왕조의 황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앙관청의 집중적인 배치는 후한과 북위를 거치며 나타났고, 수ㆍ당대에는 황성 구역이 별도로 설정되어 그곳의 중심가로를 기준으로 동서 대칭 형태로 관청이 집중 배치되었다. 이 황성 구조는 금ㆍ원ㆍ명ㆍ청대에도 유지되었다.
▲청대 자금성 앞에 조성된 T자형 장랑
개경에 장랑이 축조된 시점에는 금의 중도가 중국의 도읍이었고, 한양이 조성된 시기에는 명의 남경이 도읍이었다. 명이 원의 대도를 고치고 북경으로 천도한 시점은 한양 건설이 본격화한 시점과 거의 동시기의 일이다. 이때 두 나라 모두에서 궁궐의 정문 앞에 행랑이 조성되었다. 비록 행랑 건설의 시점은 조선의 한양이 조금 앞섰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명대 이전부터 행랑을 중심으로 중앙관청이 배치되던 전통이 확립되었으므로 한양 건설에 동아시아 도성 조영의 전통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양에는 당시의 중세적 시대성도 반영되었다. 중국 고대의 도성 형식은 궁성의 정남향의 중심가로축에 관청을 배치하기 시작하다가 수ㆍ당대의 장안성형 도성 형식으로 완결되었다. 북쪽에 배치된 궁궐 앞에 주작대로를 놓고, 그 도로를 축으로 동서가 대칭되는 도시 구조가 도성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후 중국 고대의 도성 형식은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궁궐이 도성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궁성과 외성의 거리가 좁아졌다. 아울러 궁성 앞에는 T자형 중심공간이 조성되었으며, 그 바깥에 중앙관청이 배치되었다. 수ㆍ당의 장안성으로 대표되는 고대도성의 형식이 개봉ㆍ남경ㆍ북경으로 대표되는 중세도성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조선 한양의 경복궁과 창덕궁 앞의 중심가로축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실제로 한양이 격자형 가로체계와 무관했던 것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명나라는 원의 대도에 조성됐던 기존의 격자형 가로망을 계승했지만, 명대에 만들어진 외성의 가로망은 그와 달리 격자형 가로망을 채택하지 않았다. 한양 역시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중세적 시대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양의 가로망(왼쪽)과 북경 외성의 가로망(오른쪽)
5. 맺음말
이상에서는 저자의 논의를 요약했다. 그에 따르면, 산 아래 조성된 조선의 궁궐은 한국 고유의 도성ㆍ도시 양식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포곡식산성을 경계로 삼고 궁성과 시가지를 통합하면서 생겨난 한국식 도성 양식이 평양ㆍ부여ㆍ개경ㆍ한양 등에 공통적으로 반영되었다. 동시에 경복궁과 육조대로, 창덕궁과 돈화문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의 도성 조영 방식을 반영하면서도 중세적 변화를 동시에 포함한다. 결국 저자는 두 가지 축을 통해 한양의 특성을 파악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가 한국의 고유한 맥락에서 발달한 도성 조영 방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도시 건설과 그 변화였다. 저자에게 한양은 그 두 가지 축이 교차하면서 형성된 도시였다.
6. 남아있는 문제들
한양 도성의 구조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저자의 의견은 매우 참신하다. 특히 한양 도성에 한반도의 역사적ㆍ지리적 조건이 반영되었다는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동아시아의 표준화된 도성 양식과 조선 도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과 이질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한반도의 역사적ㆍ지리적 조건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다만 논자로서는 글 안에 몇 가지 고민거리도 함께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가설에 설득력이 있음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논리 전개 방식이 ‘정황’에 의존한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탓이다. 예컨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면 한양 도성에 한반도 특유의 도성 조영 방식이 반영되었다는 가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두 성의 외형이 유사하다는 정황에 의존한 추론일 뿐, 결정적인 근거 위에 입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양과 북경 외성의 가로망에 ‘중세성’이 반영되었다는 주장도 유사한 한계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문 안에서 고대도시의 특성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제시되었지만, 중세성이 무엇인가에 관한 답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우선 송ㆍ원ㆍ명ㆍ청을 중세로 분류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북경과 한양에 반영된 ‘중세성’이 무엇인지, 비격자형 가로망이 어째서 ‘중세성’을 반영하는지가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의 글 안에서는 그러한 주제에 관한 논증이 충분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고대 수도의 규범화된 양식에서 볼 수 없는 요소를 섣불리 ‘중세성’으로 묶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한양 건설에서 북경의 양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역시 충분히 논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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