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2013, 「正祖代 思悼世子 追崇 典禮 논쟁의 재검토」, 『한국사연구』163
정리: 2019.04.20
1. 저자의 문제의식
ㆍ정조가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義라는 절대적 가치를 자의적으로 바꾸면서까지 절대권력을 추구했는가? → 사도세자 추숭 전례 문제를 검토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
ㆍ역사학계의 기존 연구들은 정조 재위기의 사도세자 추숭 문제를 왕권 강화와 연결지었다. 저자는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전례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과 그 정치적 함의를 분석해 기존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려고 한다.
2. 본문 정리
ㆍ“정조는 재위 전반기 공적인 전례를 시행함에 있어 원칙을 넘어선 추숭이나 존봉 등에 대해 반대하였다. 선왕 영조의 승통에 대한 결정에 따라 진종을 추숭했지만, 사도세자 전례는 不貳本의 원칙과 禮에 엄격하면서도 人情을 편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처리하고, 『宮園儀』를 편찬하여 이를 定制로 만들었다.”(349면)
ㆍ“1769년 2월에는 세손이 직접 지은 史論 여러 편을 김종수에게 보여주었다. 그 중 ‘소종을 대종에 합하는 것에 대해 논함[小宗合大宗論]’이라는 글에서 중국 漢나라에서 ‘悼考定陶皇’으로 추숭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논하였다. 그 글의 대지는 입승대통한 군주가 다시 사친을 융숭하게 하는 일이 二統을 범하는 혐의가 있어 의리에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 정조 즉위 초 사도세자에 대한 宮園制는 바로 小宗合大宗論에서 밝힌 견해에 입각한 것이었다.”(350~354면)
ㆍ“최근 연구들은 금등문서의 공개 이후 정치적 격동을 일으킬 만한 상황 변화가 있었고, 정조의 선세자 문제에 대한 대응 또한 달라진다고 보고 있다. (…) 금등 이후 정조가 전례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정조 초반 사도세자에게 행한 전례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영조의 임오의리를 준수해야만 하는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조는 어쩔 수 없어서 追崇 전례를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숭이 효도하는 바른 禮가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섬기는 바른 방법을 찾고자 했던 것뿐이었다.”(356~359면)
ㆍ“정조는 조정의 추숭반대론과 공명하며 정치를 이끌어나가려 했다. 追崇[追王]의 전례를 행한다는 것은 천하를 위해 정해진 종통 계승의 원칙[不貳本]을 사사로운 정-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에 이끌려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는 정조가 스스로 공사를 재량할 수 있는 정치가가 아님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영조에 대한 의리 때문에 추숭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공공의 대원칙을 사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권력을 잡고 복수하기 위해 속이고 기만했다는 명백한 선언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추숭을 할 생각도 없었으며 하지 않았던 것이다.”(367면)
ㆍ“당시 사친을 추숭할 수 없다는 원칙은 王法보다도 상위의 가치를 지닌 公法으로 주장되었다. 즉 권력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져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법을 무너뜨릴 경우 세상의 질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있는 公的 원칙으로 여겨진 것이다. (…)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일반 세자와 차등을 둔 宮園禮를 시행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 사정에 치우치지 않는 선에서 ‘家人의 의리’를 제대로 펴는 것은 공법을 엄하게 세우는 것만큼이나 정조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가인의 의리가 공공의 의리를 침해해서도 안 되었다. (…) 정조는 공법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好惡를 떠나 家人에 대한 情義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69~372면)
3. 결론
ㆍ추숭문제는 왕권의 강약을 판단하는 척도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문제는 정조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가장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정조로서는 추숭 반대론을 바꾸지 않았다. 정조가 의리정치를 표방하며 추숭반대론자와 추숭론자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4. 나의 의견
사도세자 추숭 문제는 정조 대 정치사 연구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그 이슈를 정조의 ‘왕권 강화’와 연결 지었다. 종래의 ‘갑자년 구상’도 그런 맥락에서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통성을 정당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위를 내려놓는 이 역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김지영 선생님의 글은 이런 의구심에 충분한 답을 제공한다. 禮의 한도 안에서 情을 펼 수 있다는 견해는 정말로 인상적이다. 많은 연구들은 정조의 개혁을 쉽게 왕권 강화로 연결해 왔지만, 당시의 정치사를 단순히 ‘형세’나 ‘왕권의 강약’에만 주목해왔던 것은 아닌가? 예와 의라는 당대의 보편적인, 또 포기할 수 없었던 가치를 오랫동안 시야에 넣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당대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국왕과 신하의 정치적 발화와 행동은 이런 보편적 가치를 전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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