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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5

조선 전기 유학사 연구 살펴보기 조선 전기 유학사 연구 살펴보기 2022.03.28. 이 글은 조선 건국에서부터 16세기까지를 다룬 조선 유학사 연구의 성과를 대략적으로 개괄한 것이다. 다만 조선 건국과 성리학의 관계는 그간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사안이기 때문에 14세기 말도 논의 범위에 포함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조선 전기’로 분류되고, 그 핵심적인 특징으로 ‘유교화’가 언급된다. 유교화를 보여주는 지표에는 정치세력, 사회구조, 친족질서 등 여러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짧은 글에서 그 많은 주제를 모두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성리학을 주로 정치이념으로 간주하고 탐구한 논저를 중심으로 조선 전기의 유교사를 개괄하려 한다. 1. 조선 건국과 성리학 그동안 조선 건국은 고려 후기 사회변동의 결과.. 2022. 3. 28.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2020.12.21 1. 서론 통설에 따르면 성리학적인 윤리 규범과 사회질서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 시점은 17세기 이후였다. 이때가 되면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양측적 친속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고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국가와 사족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그간의 여성사 연구는 대체로 이런 통설을 전제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그들의 대응을 탐색했다. 조선 사회를 지배한 유교적 규범과 그에 걸맞게 마련된 제도는 여성에게 어떻게 정절을 강요했는가. ‘유교 가부장제’[각주:1]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하락했는가. 조선시대의 여성에게는 어떤 폭력과 차별이 가해졌는가... 2020. 12. 31.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2019.12.09 1.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 고려 말 성리학 수용은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수용과정에 관해 많은 논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랜 연구에 비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에 있지만, 여말선초 성리학을 보는 연구자들의 기존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 시각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②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의 정.. 2019. 12. 9.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 ‘성리학’과 ‘사대부’ 개념의 문제 - 2019.09.06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의 영정.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해 왔다. 신흥사대부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주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견해를 검토하여 기존 연구의 시각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우선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주장이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 살펴보자... 2019. 9. 6.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김건태, 2011,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한국문화』 55 2019.08.06. 1.서론 19세기 농촌 사회에는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다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그런 현상이 빚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농업에 관한 개인의 관심이 재산 규모에 차이를 빚어내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 후기에 들어 농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했던 농민을 두 부류로 범주화했다. 借地를 활용해 부를 축적한 經營型富農과 자신의 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부를 늘린 經營地主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들이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입장에 회의적이다. 근대의 지표로 발굴된 경영지주와 경영형 부농이 사실은 농업에 관심을 가졌.. 2019.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