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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by 衍坡 2019. 8. 6.

김건태, 2011,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한국문화』 55

2019.08.06.





1.서론

  • 19세기 농촌 사회에는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다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그런 현상이 빚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농업에 관한 개인의 관심이 재산 규모에 차이를 빚어내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 후기에 들어 농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했던 농민을 두 부류로 범주화했다. 借地를 활용해 부를 축적한 經營型富農과 자신의 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부를 늘린 經營地主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들이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입장에 회의적이다. 근대의 지표로 발굴된 경영지주와 경영형 부농이 사실은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일반적이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 ‘19세기 위기론’은 19세기에 토지생산성이 떨어지면서 조선이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토지생산성이 하락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① 19세기 위기론은 지대량 감소를 보여주는 자료를 근거로 활용했지만, 그것이 토지생산성과 직결되는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②경상도 예천 맛질 박씨가의 자료만 토지생산성과 관련이 있는데 이 자료에는 소출량을 斗가 아닌 駄로 기록했기 때문에 토지생산성의 추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 저자는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19세기 농촌 구성원의 삶에 성리학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는 성리학자의 農作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 농업의 기본구조를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문제의식 위에서 安東 金溪里 義城 金氏家의 19세기 농작 사례를 검토한다.



2. 자료소개
1) 작성자

  • 학봉 김성일의 宗家인 금계리의 의성 김씨가는 18세기 이래로 누대에 걸쳐 농업사 관련 자료를 남겼다. ①準戶口 47개(1670~1906) ②秋收記 ③『歸田錄』 ④田畓案
  • 금계리 의성 김씨가의 농업사 자료 중에서도 핵심은 추수기다. 현존하는 추수기는 대체로 金興洛(1827~1899)이 작성한 것이다. 김흥락은 퇴계학파의 종지를 계승한 인물이었다. 일생동안 서양문물을 배척했고, 1895~1896년 사이에는 안동지역 의병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 김흥락이 작성한 추수기는 매우 치밀하게 작성되었다. 가장 위에 지명ㆍ면적[斗落]ㆍ作人의 이름을 적었고, 그 아래로는 3년 동안 수취한 지대내역을 기록했다. 그 다음에는 상지를 덧대고 다시 3년간의 수취내역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추수기 작성을 이어갔다. 이 자료를 통해 18년 동안 전답의 농사가 어떠했는지, 개별 필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2) 자료특성

  • 의성 김씨가는 지대를 수취하기 이전에 현장에 踏驗을 나가 지대액을 책정하고 그것을 先尺記에 정리했다. 지대를 수취할 때는 이 문서를 이용했는데, 꺽쇠(ㄱ)가 표시된 필지는 지대가 수취되었음을 의미한다.
  • 의성 김씨가의 지대수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는 추수기다. 작인이 지대를 납부하면 有司나 戶奴가 지대를 점검하고 김흥락에게 보고했다. 김흥락은 보고 내용을 토대로 추 3책을 손수 작성했다. 이 자료에는 선자기의 내용이 반영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금계리 의성 김씨 중 한 사람인 김흥락의 문집




3. 노비 규모와 가작 면적 추이


1) 다수의 솔하노비

  • 호구단자에 따르면 금계리 의성 김씨가(이하 ‘김씨가’)는 19세기 초에 80구의 노비를, 19세기 말에는 약 30구의 노비를 거느렸다. 통상적으로 양반들이 호구단자를 올릴 때 노비 수를 일부 누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노비의 수는 50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 노비제가 법적으로 부정된 20세기 초에 김씨가가 수십 명의 노비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恩德으로 노비를 대우하고 노비의 처지와 살림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김씨가는 노비들에게 가해지는 신분적 속박의 강도를 낮추고 자율성을 높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김씨가의 仰役奴婢가 18세기 중반보다 크게 줄어든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 18세기에 금계리 김씨가 주변에는 使喚奴婢가 거주했다. 19세기에는 금계리 김씨가 주변에 放役奴婢가 거주했다. 사환노비는 김씨가의 토지를 병작해서 식량을 마련했고, 생활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으면서 종종 김씨가의 필요에 부응했다. 19세기의 방역노비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 김씨가는 노비의 생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斗差穀을 이용해 노비계를 만들었고, 노비에게 충분한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김씨가의 노비들은 농사철에 하루 3끼를, 농한기에는 하루 2끼의 식사를 제공받았다. 김씨가 식구가 소비하는 곡식보다 노비에게 제공된 식사가 더 많았다. 이런 恩德이야말로 노비제가 사라진 20세기 초에도 수십 명의 노비가 김씨가 주변에 거주한 이유다.


2) 가작 면적의 축소

  • 김씨가는 19세기 전반에 토지를 꾸준히 늘려나갔고, 19세기 후반에는 기존에 매득한 토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주력했다. 1808년에 240여 두락이었던 김씨가의 전답은 1850년에 480여 두락, 1889년에 501두락으로 늘어났다.
  • 다른 양반가와 마찬가지로 김씨가는 농지를 장만할 때 밭[田]보다는 논[畓]을 선호했다. 1913년의 상황을 보면, 김씨가는 논보다 밭이 훨씬 많았던 안동 서후 지역에 224만 평의 논을 확보한 상태였다.
  • 다른 향촌지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씨가는 전답을 마련할 때 世居地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농지를 구입했다. 물론 세거지로부터 거리가 있는 곳에 전답을 장만한 경우도 있지만, 그 전답의 대부분은 墓位田이었다.
  • 50여 구 이상의 노비와 500여 두락의 전답을 갖춘 19세기 김씨가는 얼마든지 재산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家作을 한 전답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김흥락은 대개 논 1필지를, 밭 3~4필지를 가작했고, 필요에 따라 1~2필지를 추가로 경작했다.
  • 1809부터 1902년까지 김씨가의 핵심적인 가작답은 집앞 개울 건너편의 ‘越畓’이었다. 하지만 가작이 이루어진 1필지가 몇 두락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자료에 기록된 내용이 시기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反畓化가 이루어질 때는 밭을 제외한 논의 두락만 기재했다가 熟畓이 되자 두락 수를 조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흥락이 기록한 월답 필지의 종자량으로 추정하면, 월답 1필지는 10두락이었을 것이다.
  • 김흥락은 월답 1필지 전체를 가장하다가 1869년에 월답 일부를 聖乭이라는 사람에게 병작지로 대여했다. 이때 병작을 맡긴 토지가 몇 두락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5두락 정도였을 것이다. 월답 5두락을 가작했을 때 산출되는 볏집이 443단인데, 1869~1889년에 병작지에서 산출된 볏집도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게 보면 병작지의 규모도 5두락 정도였을 것이다.
  • 김씨가의 가작전 규모는 분명하게 확인 가능하다. 19세기 중ㆍ후반 김씨가의 가작 면적은 논밭을 합쳐 대략 15두락 내외였다. 김흥락은 얼마든지 가작지를 늘려 재산을 불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가작지를 늘리기보다 가작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려고 애썼다. 『귀전록』을 남긴 김흥락의 부친 김진화도 廣作 대신 20두락 정도의 두락을 가작하면 충분하다고 권고했다.
  • 1석을 15두로 계산하면, 1765~1767년 가작답 소출량은 적을 때는 975두, 많을 때는 1,462두였다. 1866~1868년 가작답 10두락의 소출량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18세기 중반에 경작된 가작답은 30두락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18세기 중반의 소출량은 왜 20두락의 소출량보다 월등히 많았을까? 18세기 중반에 김씨가의 家力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종 양식이 떨어져 환곡에 의존하기도 했다. 김씨가는 가력이 부족하면 될 수 있는 한 가작 면적을 늘리고 가력이 넉넉할 때는 가작 면적을 대폭 줄였던 것이다.
  • 김씨가가 재산을 늘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 유교 경전에 담긴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재산을 무한하게 증식하는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재산, 분수에 넘치는 지나친 재산 증식은 삼가야 할 일이었다. 유교적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재산 규모는 사회적 직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김씨가의 재산은 능주목사를 지낸 김진화 대에는 늘어났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김흥락 대에는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되었다.



4. 가작지 생산성


1) 다양한 도량형

  • 김흥락은 지대로 수취한 곡물을 계산할 때 사용한 도량형의 종류를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지대량의 최소 단위가 두로 끝날 때 ‘○斗’, ‘火○斗’, ‘市○斗’ 세 가지로 표현했다. 이때 斗와 火斗가 같은 용기임을 고려하면, 김흥락은 火斗와 市斗를 분명히 구분하여 추수기를 작성했던 것이다.
  • 김흥락이 화두와 시두를 구분한 이유는 두 용기의 크기가 다른 까닭이었다. 1850년 김진화 장례비용을 정리한 자료에서 시두와 화두의 비례관계는 대략 1 : 1.25 정도다. 하지만 1850년대 다른 자료에서는 1 : 1.5 정도로 설정된다. 비슷한 시기의 자료에서 시두와 화두의 비례관계가 다른 것은 동시기에 통용된 시두라도 용기의 크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에서는 다양한 量器가 사용되었다.
  • 김씨가 추수기에 등장하는 화두는 시두보다 크기가 작다. 시두가 지역시장에서 통용되는 두였다면 화두는 관아의 낙인이 찍힌 官斗였다. 조선 후기에 실제로 관두가 시두보다 크기가 작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흥락의 추수기에 등장하는 화두는 관두였을 가능성이 크다.
  • 김씨가의 추수기에서 화두와 시두가 사용된 비율은 시기마다 달랐다. 19세기 전반에는 화두만 사용했고, 1861년부터 시두와 화두를 혼용하기 시작했으며, 1899년 이후에는 대부분 시두를 사용했다.


2) 높은 수준의 벼 생산성

  • 저자에 따르면, 김씨가의 사례로 토지생산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量器의 기준을 火斗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시두를 화두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1 : 1.5의 비례관계를 적용했다.
  • 김씨가의 가작답 수확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해는 1809년, 1810년, 1844년, 1866년, 1867년, 1868년, 1902년뿐이다. 따라서 나머지 해의 수확량은 추론을 거칠 수밖에 없다.
  • 김씨가의 월답이 10두락이었고 가작지와 병작지가 각각 5두락이었다면, 1890~1897년 논 1두락 당 벼 생산량은 가작지에서 39.86두, 병작지에서 46.76두다. 즉, 가작지의 생산성은 병작지의 85.2%에 불과하다. 가작지의 생산성이 병작지보다 낮은 사례는 18세기 후반 칠곡 석전의 광주 이씨 감사댁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김씨가의 경우에는 가작 면적을 줄인 것도 가작지 생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1890~1897년의 사례를 바탕으로 이전의 가작답 생산성을 추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①1869~1889년 가작지 면적은 5두락이다. ②1869~1889년 가작지의 생산성은 병작지의 85.2%다. 두 전제 위에서 가작답 1두락 당 벼 생산성을 계산하면 19세기 중후반에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1866~1897년 사이 가작답 1두락의 벼 생산량은 40.66두다. 물론 1890~1897년의 두락 당 벼 생산량이 1866~1869년보다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김씨가 가작답의 벼 생산량은 19세기 후반 동안 큰 변화 없이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3) 다양한 잡곡 생산

  • 김씨가는 家作田에서 고도의 집약화ㆍ다각화를 추구했다. 김흥락은 한 필지에 다양한 작물을 混作하기도 하고 보리를 파종한 곳에 조ㆍ콩 등의 곡식을 根種하기도 했다. 추수기에 따르면, 1864년에는 東皐田 4두락에 7가지나 되는 곡물을 심었다. 이것은 당시 안동 지역 농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 김흥락은 根種과 間種을 통해 밭 생산성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어느 가작전에서는 1두락 당 잡곡 20두 이상을 생산하기도 했다. 한편, 김흥락은 토지생산성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려는 노력도 병행했다. 면화 산출량을 늘리기 위해 가급적이면 면화 농사에 輪作을 시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 19세기 후반 안동 지역의 토지생산성이 18세기보다 높았다는 것은 김씨가의 식사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김씨가의 식구들과 노비들의 아침ㆍ저녁 식사량은 100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점심식사량은 19세기에 들어 월등하게 늘어났다. 전체 식사량이 늘어난 셈인데, 이것은 19세기의 토지생산성이 그 이전보다 상승했음을 의미한다.



5. 맺음말

  • 전답 500여 두락과 노비 50여 구를 소유한 김흥락은 얼마든지 재산을 늘리고 가세를 키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답 15두락 정도를 가작하는 데 만족했다. 그것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분수에 넘치는 재산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한 결과다.
  • 김흥락은 가작 면적을 늘리지 않는 대신 밭농사에서 고도의 다각화를 실현했다. 그를 비롯한 19세기 안동의 농민은 간종과 혼작을 통해 이전보다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김흥락 가의 전체 식사량이 늘어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 김흥락은 결과적으로 밭농사의 집약화ㆍ다각화를 통해 곡물 수확량을 늘렸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安民을 위한 방법을 고민한 결과였다. 집약화ㆍ다각화로 표현되는 다품종 소량생산은 자본주의적 농업과 달리 노동생산성은 낮았지만 자연재해에 따른 失農으로부터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김흥락은 자본주의적 농법처럼 성공과 위기가 공존하는 길이 아니라 다품종 소량생산처럼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농법을 추구했다. 그의 고민은 安民의 방도를 찾는 데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유교 경전에 담긴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는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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