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웅섭,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2019.10.19.
1. 향촌 사회의 유교화 여정
- 저자는 논의에 앞서 조선시대의 유교화 과정을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 18세기에 鄭𣲚이라는 사람이 안정복에게 禮法을 자문했다. 그는 숙부 첩의 侍養子가 숙부의 상에 상복을 입어야하는지, 입어야 한다면 어떤 상복을 입어야하는지를 물었다. 안정복은 시양자가 숙부와는 친속관계가 아니므로 상복을 입어선 안 된다고 답했다.(『순암집』 권8, 答鄭都事𣲚問) 저자는 이 사례를 18세기 조선의 유교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들었다.
- 16세기 조선의 모습은 18세기와는 사뭇 달랐다. 연안 사람 李同은 아버지와 식사를 하다가 말다툼을 벌이고 홧김에 밥그릇을 던져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혔다. 강상죄로 잡혀온 이동은 아버지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지 몰랐으며 평소에도 같은 일이 자주 벌어졌다고 진술했다. 저자는 이 사례가 16세기에 유교 윤리가 조선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 여말선초에는 ‘梅香’이라고 불리는 불교적 민간풍속이 향촌사회에서 일반적이었다. 향촌사회의 유력자들도 이런 비유교적 행사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참여하곤 했다. 이런 풍속은 세종 연간까지 지속되었다. 저자는 이 사례에서 유교식 전통을 확립하는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세 가지 사례를 검토한 저자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통설에 따르면,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향촌에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신유학에 정통한 이들이 다수 존재했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이동의 사례와 세종 연간까지 지속된 매향 풍습은 통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유교적인 가치와 풍속이 향촌 사회에 그토록 선진적으로 안착했을까?’
- 저자는 이런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고려 말~조선 전기 지배세력을 설명해온 기존의 논의를 검토한다.
2. ‘신진사대부’와 ‘사림파’라는 개념
- 통설에서 설명하는 신진사대부와 사림파의 특징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들은 ①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했고, ②향촌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 했다. ③그 과정에서 기존 정치세력과 갈등을 겪었고, ④마침내 정권을 장악했다.
- 이우성의 연구(1964)는 통설을 구축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우성은 士大夫를 ‘能文能吏의 신관료층’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구도를 제시했다. “사회경제적 변동과 향촌 사회 주도 계층의 성장 → 지방 출신 신진 세력의 중앙 진출 → 중앙집권 세력과 갈등 → 정치적 승리”
- 민현구의 연구(1974)는 이우성의 견해를 바탕으로 고려 후기 정치사를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의 대립 구도로 설명했다. 고려 후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가문을 ‘權門世族’이라는 개념으로 범주화했다.
- 이우성이 고려 후기 사대부를 향촌 사회의 중소지주로 파악하는 구도를 마련했다면, 민현구는 고려 말의 정치사를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틀을 마련했다.
- 이태진은 이우성ㆍ민현구가 제시한 연구의 틀 안에서 사림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사림파는 향촌의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그래서 향촌의 자율적인 운영을 추구하고 성리학 질서를 보급하려 했다. 김종직 이래로 사림파가 추구했던 유향소 설치 운동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과정에서 훈구파와 정치적으로 대립을 겪으며 사화를 입기도 했다.’
- 이태진의 견해는 사림파의 등장을 보혁 갈등이라는 구도에서 파악하고 진보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아울러 정치사뿐 아니라 사회사까지 “보혁 갈등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했다. 이후 이태진의 견해는 정치사ㆍ향촌사회사 연구의 기본적인 구도로 자리매김했다.
3. 용어와 역사상을 둘러싼 논쟁들
① ‘신진사대부론’에 관한 수정주의적 견해와 재반론
- 신진사대부론에 관한 수정주의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김당택은 ‘사대부’라는 용어가 사족 출신 중에서 관직에 오른 인물들을 지칭하므로 고려 말의 정치세력을 사대부와 권문세족으로 양분할 수 없다고 보았다.
- 김광철은 고려 후기 유력가문을 ‘세족’으로 규정했지만, 세족과 사대부를 대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세족 역시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는 과거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 사대부라는 용어가 관인층 전체를 지칭했다는 점, 고려 말 개혁 세력 중에는 세족 출신도 존재했다는 점이 그의 근거다.
- 존 던컨(John B. Duncan)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 중앙 관원을 배출한 가문을 분석했고, 여말선초에 전면적인 지배세력 교체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즉, 신흥사대부가 새로이 등장하여 조선을 세웠다는 통설을 비판한 것이다.
- 이익주는 통설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수정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수정주의적 견해는 여말선초의 사회변동과 신흥사대부의 개혁의지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그는 고려 말에 선진적인 농법과 신유학이 도입되었다는 점이 밝혀진 만큼 당시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② ‘사림정치론’의 수정주의적 견해와 재반론
- 조선 전기 지배세력을 훈구파ㆍ사림파로 구분하는 시각에도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문화유씨세보』(嘉靖本)을 분석한 와그너는 통설과 달리 당시 지배세력의 동질성이 매우 강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화가 일어난 이유도 훈구파ㆍ사림파의 대립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사화는 三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국왕ㆍ대신ㆍ삼사 간의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한 결과라고 보았다.
- 최이돈은 통설을 더 정교하게 보완하는 방식으로 수정주의적 견해에 대응했다. 그는 사림파가 향촌의 중소지주였다가 성종 대 이래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대신 사림파가 자천권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구조를 구축해나간 방식과 공론 정치의 전개 과정을 분석하여 기존 설명을 보완하려 했다.
- 김돈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한 시기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두 정치세력의 동질성을 강조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그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고 비판했다.
- 요컨대, 수정주의적 관점은 고려 말~조선 전기에 급격한 사회변동이 존재했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면서 이분법적인 정치사 서술을 거부한다. 아울러 ‘사림파’와 ‘사림’ 등의 개념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미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통설을 비판한다. 반면, 통설은 고려 말~조선 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당시의 사회변화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통설의 기본 구도를 부정하기보다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의 입장이기도 하다.
4. 향촌 사회는 유교화에 선구적이었나?
- 수정주의에 관한 재반론은 “일종의 사회경제사에 기초한 정치사 서술”이다. 즉, 정치적 변동의 원인을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른 향촌 및 신진세력의 성장에서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향촌 사회에 개혁적인 신진세력의 모집단이 존재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 정치사 서술의 전제가 되는 향촌 사회의 모습이 실증 대신 정치적 서사에 의존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는 연구들은 선진적인 향촌 사회의 모습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개혁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여말선초의 재지사족이 신유학과 강남농법을 수용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실증된 내용이라기보다 宋代의 역사상을 여말선초의 상황에 투영한 결과다. ‘독서인으로서 광범위한 사대부 계층’이 실제 여말선초의 향촌에서 얼마나 존재했는지는 실증된 적이 없다.
- 조선 건국 이후 明制를 수용해 祀典 제도를 정비는 과정에서 향촌의 성황제에도 제약이 가해졌다. 국가는 민인의 독자적인 제사를 금지하고 지방관을 제사의 주체로 규정했다. 그러나 향촌에서는 계속 종래의 관습대로 성황제를 지냈다. 지방사족이 ‘淫祀’적인 성황제에 참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최종석, 2009) 실제로 이문건은 아무런 갈등과 고민도 없이 기복적 민속의식을 향유했고, 그와 교유했던 유향품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최선혜, 2002)
- 16세기 후반까지도 향촌의 사족들은 ‘음사적’ 성황제나 巫俗ㆍ佛事 등 비유교적 의례에 거리낌 없이 참여했다. 오히려 국가가 규정한 의례를 관에서 주도적으로 시행하면서 향촌사회의 유교화를 추동했다. 그렇다면 통설에서 그리는 향촌사회의 모습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 통설은 유향소를 지방사족의 자율적인 향촌 지배를 관철하는 기구로 설명해왔다. 그에 따르면, 유향소는 官 중심의 지방 통치를 국가와 마찰을 빚거나 지방에 利權을 확대하는 훈구파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치폐를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연구에 따르면, 국가는 향촌 사회의 유력자를 통치체제 안으로 포섭하는 데 유향소를 활용했다고 한다.(박사랑, 2016) 그렇다면 국가권력과 재지사족의 관계를 대립 일변도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 鄕飮酒禮ㆍ養老禮ㆍ鄕射禮도 통설에서는 ‘성리학적 질서를 지향하며 시행한 일종의 자치활동’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근래 연구에 따르면, 향음주례 등의 제도적 기반은 국가가 유교질서의 정착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고 한다. 향촌 사회의 향례는 경전적 근거에 기초하고 국가 의례 차원에서 지방관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 15~16세기 향촌의 사족이 전통적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지방관이 주도하는 국가 의례가 향촌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사회변동을 ‘국가 vs 재지사족’ 또는 ‘중앙 vs 지방’의 구도 속에서 신흥유신ㆍ사림파 등과 직접 연계해온 설명 방식은 수정이 필요하다.
- 통설의 설명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의문점은 지방 사족이 어떻게 비유교적ㆍ토호적ㆍ향리적 속성에서 벗어나 ‘士’로서의 속성을 갖춰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기존 설명에서는 향리가 吏族과 士族으로 분화하고 사족이 향촌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사족이 官權 없이 이족을 압도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권-사족의 관계와 중앙-지방의 관계를 대립 일변도로 규정하고 지방출신 인사를 중앙 출신과 다른 정치세력으로 전제해서는 안 된다.
- 결국 생산력 증진이나 여말선초 향촌 사회의 변화 같은 의미 있는 사회변동은 정치적 서사에서 벗어나 좀 더 구체적으로 실증할 필요가 있다. 보혁 갈등의 구도에 기초하여 향촌사회의 발전과 신진 정치세력의 등장을 순환론적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설명 방식은 수용하기 어렵다.
5. 정치 세력은 재생산되고 있었나?
- 조선 후기의 붕당은 학맥ㆍ가문ㆍ지연ㆍ관직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재생산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훈구파와 사림파 등으로 분류되는 붕당 형성 이전의 정치세력이 과연 붕당과 같은 재생산 기반을 갖추었는지 회의적이다.
- 통설에서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세력을 구획하는 방식은 재지사족이라는 모집단을 상수로 설정하고 특정한 정치적 사전을 중심으로 시기에 따라 권문세족과 훈구파를 그와 대립하는 세력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 정치세력의 재생산 기반에 관한 설명은 모호하다. 그래서 유승원은 ‘훈구파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훈구파’라고 불리는 집단이 실재했던 정치세력이라기보다 사림파와 대립하거나 그들로부터 공격받은 개별적인 존재를 기계적으로 모아둔 집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 세족이든 훈구든 가문의 세를 유지하려면 관직 진출이 필수였다는 점에서 중세 유럽의 세습귀족과 달랐다. 관직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가문의 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면, 권문세족과 훈구파가 지속적인 재생산 기반을 갖춘 정치세력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 사림파도 재생산되는 정치세력으로 보기 어렵다. 통설은 성종 대 이후 사림파가 조정에 진출하면서 대간의 언론 활동이 활성화했다고 본다. 그러나 성종 대 이후에 언론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청요직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조정 내의 권력 구조 변동에서 비롯한 것이다.
- 仕日ㆍ考課ㆍ官階ㆍ官職이 유기적으로 연동되는 循資法을 통해 당하관을 임명하던 조선의 인사 시스템을 고려하면, 특정 세력이 한꺼번에 언관직에 진출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성종이 훈구파를 제어하려고 사림파를 기용했다는 설명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관료 조직 전체가 들썩이는 인사이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조광조도 처음부터 단일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조정에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청요직에 진출한 인물들이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겪으면서 조광조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한 것이다.
- 성종~중종 재위기에 사림파의 활동으로 꼽히는 일들은 사실 청요직 인사들의 활동이다. 그들은 청요직 간에 상호 연결된 인사 체계 안에서 홍문관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避嫌ㆍ署經 등을 통해 인사권 일부를 확보하며 국왕과 대신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력 구조를 구축했다. 청요직 인물들의 언론 활동은 그러한 권력 구조 위에서 도덕적 권위와 공론의 위상에 기대어 활발해질 수 있었다.
- 결국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훈구파와 사림파 등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기반을 갖춘 정치세력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을 재생산되는 정치세력으로 전제한 기존의 정치사 서술 방식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6. 새로운 ‘서사’와 ‘역사상’을 기대하며
- 통설은 고려 말~조선 전기의 지배층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뒤 그들의 등장을 사회경제적 변화와 곧바로 연결하여 그 존재를 실체화했다. 사회 발전과 신진 정치세력의 등장을 순환론적으로 이해하는 이런 접근은 당대의 변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실증적으로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
- 수적주의적 입장은 지배층의 동질성을 강조하다보니 당시 사회 변화의 의미를 포착하여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통설의 프레임 자체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하면서도 당대의 여러 변화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 향후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세력 연구는 ‘보혁 갈등의 구도’ 위에서 사회 변화를 정치세력 문제와 즉자적으로 연결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각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변화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토대로 당시의 정치 변동을 설명하고 향촌 사회의 변화상을 재구성해야 한다.
- 고려 말~조선전기에 ‘官’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역할과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통설은 관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재지사족과 같은 향촌 유력자를 신문화 도입의 주체로 상정했지만, 그들이 선진 문화를 수용하고 도덕적 권위를 창출하는 데는 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관의 권위와 질서를 어떻게 전유했는지, 도통론 같은 재지사족의 서사 구조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분석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재지사족의 정치적 서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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