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저 정리/조선시대사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by 衍坡 2019. 8. 5.

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2019.08.05.







1. 근대로의 관점

  • 저자는 이 글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재검토하고 ‘소농사회론’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 저자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타당성을 따져보기 위한 비교사적 준거로 서유럽(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지표를 제시한다. ①농촌경제에서 보조적 위치에 있던 가내수공업(특히 衣類공업)이 사회적 분업의 일환으로 농업에서 분리되었다. ②신분제와 결합된 중층의 토지소유가 해체되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 ③보편주의적 세계와 중세의 공동체적 질서로부터 ‘합리적인 개인’이 등장했다. ④자율적인 시장경제가 경제의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시장과 국가가 서로 분리되었다. ⑤세계시장ㆍ세계체제를 전제로 지구적 차원의 생산과 교역이 이루어졌다.
  • 저자는 서유럽의 근대화와 한국사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 두 유형이 있다고 본다. ⓐ서유럽과 한국이 서로 동질한 사회라는 전제 위에서 한국사에도 서유럽과 똑같은 근대화가 진전되고 있었다는 입장이 있다.(예시: 자본주의 맹아론) ⓑ서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의 전통적 질서와 한국에 이식된 근대가 상호작용을 거쳐 이식된 근대의 토착화가 이루어졌다는 관점이 있다.
  • 월러스틴(Wallerstein)은 대분기의 원인으로 서유럽과 중국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첫째, 외부세계로의 확장으로 봉건질서의 위기에 대응했던 유럽과 달리 중국은 증대하는 인구 압력에 토지생산성 향상 등 내향적 발전을 도모했다. 둘째, 경제적 패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던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중국은 하나의 완결적인 제국질서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다. 월러스틴과 같은 입장에 서있는 저자는 ⓑ의 시각에서 논지를 전개한다.





2. 자본주의맹아론 재고

  • 저자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문제점을 하나씩 검토하고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발전의 방향이 ‘소농사회의 성숙’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자본주의 맹아론에는 적어도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첫째, 자본주의 맹아론은 근대화의 기초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농촌공업의 성립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다. 물론 광공업이 ‘사적인 상품생산체제’로 진입했다고 하지만, 그 중요성은 과대평가된 것이다. 그 산업은 국가적 분업의 일환으로 처음부터 농업과 분리되어 있었고, 광공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많다고 할 수도 없었다. 1910년을 기준으로 광공업에 종사한 호는 289면 4천여 호 중 2만 4천 호(0.9%)에 불과했다.
  • 조선 후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려면 농가의 보조적인 생계수단으로서 가내공업(특히 綿織業)이 사회적 분업에 따라 농업으로부터 독립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입증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세기까지 면화공업에서 기술개량은 거의 없었고, 생산성도 중국의 1/10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농ㆍ공업의 사회적 분업 수준이 매우 낮았다. 1910년 당시까지 임노동자는 289면 4천여 호 중에서 6만 9천여 호(2.5%)에 불과했다.
  • 둘째, 조선의 고유한 자연적ㆍ사회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조선의 농업 발전을 영국의 근대 농업과 동일시했다. 레닌주의 역사학과 大塚史學의 영향을 받은 1960년대 한국사 연구자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의 이론적ㆍ실증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양극분해의 추세를 보여주는 부농의 존재를 발견해냈다. 바로 廣作農ㆍ經營型 富農이다. 하지만 그것이 장기시계열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소농사회의 성숙’이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대토지를 소유한 상층농이 감소하고 서로 비슷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하층농[小農]이 늘어났던 것이다. 동일면적 당 토지ㆍ노동생산성에서도 하층농이 상층농보다 높았다. 경상도 尙州牧 丹東面을 예로 들면, 1634년에는 1結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96명(20.5%)이 전체 耕地의 57.4%를 소유했다. 1720년에는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인원이 64명으로 줄었고, 그들의 경지 점유율도 37.5%로 줄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양극분해가 일어날 수 없다. 특히 이 시기에 이앙법이 보급되었음을 고려하면, 이앙법 덕분에 광작농이 생겨났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 셋째, 17세기 이후에 발달한 시장경제의 성격을 곧바로 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15세기 이래로 발달한 조선의 정기시는 18세기까지 꾸준히 확대되었다. 場市 간의 유통망도 중국 선진지역에 버금갈 만큼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근대의 지표로 활용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의 발달 그 자체가 아니라 시장경제가 경제의 통합적인 형태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는가 여부다. 폴라니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시장경제는 ‘자율적인 경제영역’이 아니라 재배분(redistribution)의 형태 그 자체였거나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시장경제가 국가적 재배분 체제를 보완하는 위치에 있었다.
  • 필립 황은 중국 양자강델타지역의 사회경제적 흐름을 ‘내권화’(involution)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인당 경지면적은 줄어들었지만 단위토지당 생산성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농가의 가내공업을 기초로 한 농촌시장의 발전을 보충적 조건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설명은 조선의 장시 발달은 소농경제의 성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조선의 장시는 “하층 소농의 재생산과 자립을 補足하는 경제적 제조건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소농사회의 본래적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소농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발전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시 발달 자체를 근대의 지표로 읽어낸 자본주의 맹아론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3. 개항과 개혁

  • 1876년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소농사회가 발달하던 조선에 서유럽적 근대가 유입했다. 그런 점에서 1876년의 개항은 한국 근대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세계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한 조선은 일본과 ‘米綿교환체제’를 형성했다. 조선은 일본에 米豆를 수출하고 영국산ㆍ일본산 면제품을 수입했다. 그 결과 米豆의 생산은 증가했지만 전통적 토포시장은 완전히 무너졌다.
  • 米豆의 수출로 곡물시장의 규모가 커지자 조선에서는 지주들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항 이전에도 국가적 재분배 체제의 핵심인 還穀이 해체되면서 미곡시장이 활성화하고 지주제가 성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성장속도나 규모는 개항 이후의 상황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개항으로 활성화된 미곡수출시장은 지주제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를 주도한 지주계급은 대부분 개항 이후에 성장한 이들이었다.
  • 개항기 한국사 연구의 기본적인 시각과 방법론은 김용섭의 논의를 전제로 한다. 김용섭에 따르면, 개항 이후 조선에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하나는 제도적 차원의 개량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위로부터의 개혁노선(지주적 개혁론)이고, 다른 하나는 민란ㆍ농민전쟁 등으로 표출된 아래로부터의 개혁노선(급진적 개혁론)이다. 물론 이것은 레닌의 二道論과 二段階革命論을 전제로 한 설명이었다.
  • 자본주의 발전에는 지주ㆍ부르주아 노선 하나뿐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으로 확립된 사유재산권은 다분히 지주ㆍ부르주아적이었다. 레닌이 선진국과 대비되는 자본주의 발달 유형으로 지목한 ‘프러시아형’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자본주의화에서 아래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노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 한국사에서 ‘지주적 개혁’으로 간주해 온 개혁의 내용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주적 개혁’의 골자는 지주제를 바탕으로 하되 농민의 저항에 대응하여 국가 부세를 개혁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세의 종목과 수준을 조정하는 것은 근대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유제산재도를 확립하여 국가 과세에 대한 재산자의 同意權과 共議權이 확보되는 것이다. 즉, 국가적 제도 차원에서 주권이 재배치되는 것이 근대적 개혁의 핵심이다. 갑오개혁은 그런 개혁의 단초를 보여주긴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그간 근대적 개혁의 하나로 간주해온 광무양전도 근대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 토지소유자에게 ‘地契’를 발행한 것은 물론 그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자의 법적인 지위였다. 대한제국은 토지소유자를 ‘時主’로 규정했고, 그것은 왕토주의에 입각한 전통적 관념이 반영된 것이다.
  • 지주ㆍ부르주아 주권을 동력으로 발전한 서유럽의 근대는 농민ㆍ근대대중의 인민주의적ㆍ평균주의적 요구에 맞부딪혔지만, 기술 혁신과 축적체제의 고도화를 통해 그러한 요구를 일정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생산과정과 분배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었다. 반면, 19세기 한국사에서는 지주ㆍ부르주아의 주권조차 확립되지 않았고, 국가는 대체로 소농사회에서 제기된 인민주의적ㆍ평균주의적 요구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지방 재정이었던 국가 재원이 합리적으로 조정되어 제도화하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되어 국가는 중앙정부만 남게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가 근대화를 기획하고 주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 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

  •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할 만한 경제적 인간이 출현했다. 그들이 안정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은 일제가 근대적인 제도를 이식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하면서 조성되었다.
  •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의 확립은 “지배적인 토지재산이 자본으로 전환하는 자본형성의 국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의 확립은 곧 사유재산재도의 확립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인민주의적ㆍ평균주의적 요구는 부정된다. 그렇게 볼 때 한국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은 서유럽과 달리 조선인 지주ㆍ부르주아의 정치적 권리가 철저히 부정되었다. 이는 파행적 형태의 식민지성을 반영한 것이다.
  • 근대적인 제도가 정비되자 식민지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교역이나 일본 자본의 유입은 식민지 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 성장은 식민지 농업과 제국주의 공업 사이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식민지적 공업화의 한 유형이었다.
  • 일제는 1920년대까지 식민지의 공업발전에 소극적이었다. 식민지의 공업이 일본 공업과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시체제에 들어서는 조선을 대륙침략의 기지로 삼고 적극적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일본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유입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학공업 중심의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 물론 조선의 공업화는 식민지적 순환 관계에서 이루어졌지만, 한반도 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식민지 내부 시장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조선인 기업가도 성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인 공장수는 1910년에 39개였으나 1939년에는 4,185개에 달했다. 따라서 “해방 시점에서는 조선 경제는 종래의 제국주의 본국과 식민지 간에 형성되어 있었던 이상과 같은 분업관계를 국민경제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분업체계로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으며, 그것에 착수할 조선은 일부 형성되어 있었다.”
  • 식민지기의 농업은 중간 규모의 농가를 위주로 균등하게 재편되어 나갔다. 농가 경작규모의 분화 추세를 보면, 1922년부터 1938년 사이에 농가가 17% 증가했다. 그렇지만 3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최상층과 0.3정보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최하층의 수는 줄었다. 이런 분화 추세는 양극분해의 결과가 아니라 17세기부터 이어진 소농사회 발전의 한 모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집약농법의 발전에 기초한 소농경제의 발전, 곧 내권화의 장기추세가 식민지기 개량농법의 발전이나 공업 효과로서 주어진 金肥 등의 새로운 요소 투입에 힘입어 보다 빠른 속도로 추진되어 완성되었던 것이다.”
  • 식민지기에는 서유럽의 근대적인 제도가 이식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량이 전통적인 소농사회 자체를 부정할 만큼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농사회가 자본주의 발전과 병립하는 ‘이중경제’가 심화되었다. 그렇게 보면, 식민지기는 서유럽적 근대와 전통적 소농사회의 구조적 접합이 완료되지 않은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단상



1. 20년도 더 지난 논문인데도 여전히 흥미로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가장 날카롭고 간결하게 비판한 글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자본주의 맹아론 비판에 관한 한 이영훈 선생의 논의는 매우 훌륭하다.


2. 다만 나는 이영훈 교수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체제 중심부적인 시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를 바라볼 때, 과연 주변부 나름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역사적 맥락의 의미를 얼마나 충분하게 읽어낼 수 있을까?


3. 통계 사용 문제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영훈 교수는 고문서 안에 담긴 통계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자료들이 언제, 어떻게, 어떤 맥락에서 작성되고 만들어졌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과연 통계치가 보여줄 수 있는 당대의 역사상은 얼마나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근래의 한 인터뷰에서 이영훈 교수가 한 말들은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에게 그에게 중요한 건 '맥락'이 아니라 '통계치'다. "1972년 11월 ‘10월 유신’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90% 이상(91.5%)이 찬성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투표는 ‘준봉(遵奉)투표’라고 해서 강제적 측면이 있었다. 운동권 말단이던 나는 1971년 10월 학교에서 제적당해 경북 칠곡에 있는 집에 있었다. 유신 찬반투표를 하러 가니 동장이 ‘자네 투표는 내가 했네’라고 하더라. 결국 나는 찬반투표를 못했지만 90%가 넘는 찬성표에서 보듯 시대정신에 따른 국민적 동의가 있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적지 않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