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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옛 사람 이야기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by 衍坡 2020. 12. 31.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2020.12.21

 

1. 서론

 

통설에 따르면 성리학적인 윤리 규범과 사회질서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 시점은 17세기 이후였다. 이때가 되면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양측적 친속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고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국가와 사족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그간의 여성사 연구는 대체로 이런 통설을 전제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그들의 대응을 탐색했다. 조선 사회를 지배한 유교적 규범과 그에 걸맞게 마련된 제도는 여성에게 어떻게 정절을 강요했는가. ‘유교 가부장제’[각주:1]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하락했는가. 조선시대의 여성에게는 어떤 폭력과 차별이 가해졌는가. 조선시대 남성이 생각한 이상적 여성상은 무엇이었으며, 여성은 자신들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여성 성리학자의 출현은 당시에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가. 종래의 여성사 연구는 주로 이런 물음에 답해 왔다. 그간의 연구는 조선시대의 거시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남성에 의해 구성된 여성상의 성격과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기존의 설명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고민도 생긴다.

 

일단 ‘성리학적 가부장제’라는 틀로 설명하기 어려운 ‘예외적 사례’는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 싶다. 종래의 연구들은 주로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주로 거시적인 사회구조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전제하는 ‘성리학적 가부장제’의 틀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조선 사회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했다.[각주:2] 이 사건들을 단순히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사례로 간주하기보다는 그런 현상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과연 남성-여성이라는 구도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는지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간에는 주로 ‘남성-가부장’과 ‘여성-피해자’라는 구도에서 조선시대 남성과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물론 조선 사회의 거시적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당대의 역사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쳤던 변수들을 다각적으로 충분히 고려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그동안 ‘가부장’이라 통칭하던 조선시대 사족 남성들은 인정과 의리, 법과 도덕이 충돌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조건은 ‘계층’이라는 사회적 지위나 빈부에 따른 경제적 지위와 어떻게 맞물리는가?[각주:3]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사회 현상을 단순히 성리학이 확산한 결과로 설명하는 방식이 적실한가 되묻고 싶다. 어느 연구는 성리학을 수용한 사족-남성이 여성에게 ‘열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세뇌한 결과로 조선 사회에 열녀가 탄생했다고 한다.[각주:4] 이런 설명은 성리학적 규범을 요구하는 측, 즉 국가와 사족-관료의 입장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규범을 요구받는 측이 반드시 성리학적 규범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상천常賤 남성과 여성이 성리학적 규범을 수용했다면 그들은 어째서 그런 규범을 수용했는가? 만약 그들 중에서 성리학적 규범을 수용하지 않은 이들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어째서 성리학적 규범을 수용하지 않았는가?[각주:5] 이런 질문은 결국 ‘조선 후기=성리학의 확산→가부장제의 확립=여성에 대한 정절 강요’라는 단순한 인과관계에 던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위의 세 가지 질문을 토대로 정절 문제와 관련한 조선 시대의 여러 사례를 검토해보려 한다. 이 글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성리학적 가부장제’ 사회라는 조선 사회 안에서도 유교적 규범, 특히 여성의 정절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둘째, 국가에 의해 주도된 유교적 윤리의 규범은 기본적으로 사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것은 국가의 이중적인 입장과 상민ㆍ천인의 욕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셋째, 국가에 의해 확산된 유교적 윤리 규범은 모든 상ㆍ천민의 삶을 바꿔놓은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일정 부분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2. 국가의 이중성과 유교적 규범 확산의 실상

 

조선 여성에게 정절을 강력히 요구한 핵심 주체는 국가였다. 국가는 실행 여성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처벌했고, 열행을 실천한 여인은 적극적으로 표창했다. 그렇지만 국가가 기본적으로 정절을 요구한 대상이 결코 여성 전체를 가리키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 살인사건에 대한 정조의 판결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황해도 해주에서 정경문이라는 사람이 사족 여성인 조 여인과 바람을 피우다가 조 여인의 시가媤家과 친정 식구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각주:6] 정조는 오히려 정경문을 죽인 조 여인의 가족들을 석방하며 이렇게 말했다. “율문律文을 살펴보면 ‘사족 부녀가 음욕淫慾을 자행해서 풍교風敎를 더럽히고 어지럽힌 경우에는 간부奸夫와 함께 교살한다’고 했다. 저 조가趙家와 이가李家는 다들 상민常民이나 천인賤人이 아닌데, [그들의 손에] 죽은 자가 간부를 교살하는 형률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각주:7] 즉, 정조가 해당 사건을 판결하며 유달리 의리와 강상을 강조한 이유는 조 여인이 사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물론 국왕 개인의 재량뿐만 아니라 법을 통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정조가 인용한 율문은 『대전통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사족士族 부녀자가 멋대로 음탕한 욕구를 채워 풍속과 교화를 문란하게 한 경우에는 간부姦夫와 함께 교형에 처한다. [그중 절박한 나머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길바닥을 떠돌며 구걸을 하면서 남에게 몸을 의탁한 경우에는 상천常賤과 다를 것이 없어 사족士族으로 논할 수 없으니 간부姦夫와 함께 추문推問하지 않는다.][각주:8]


이 짤막한 조문은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간통을 저질러 간부와 함께 교살당하는 대상은 사족 부녀자로 한정된다. 둘째, 상민과 천인은 음욕淫慾을 멋대로 충족하더라도 추문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리 사족이더라도 경제적으로 몹시 열악해서 정절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국가가 이 율문을 근거로 정절을 요구한 대상은 기본적으로 정절을 지킬 만한 경제력을 갖춘 사족 여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전통편』의 해당 율문이 마련된 경위는 선행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다.[각주:9] 그에 의하면, 해당 율문이 마련되기 시작한 시점은 중종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까지 발생했던 간통 사건은 『대명률』의 조문을 근거로 처벌했다. 이때까지는 간통한 사람이 사족인지 상민인지는 별도로 구분되지 않았다. 단지 간통한 남녀가 동일한 계층인지, 여성이 기혼인지 여부에 따라 형량에 차이를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중종 대에 이르러 사족 부녀자의 간통을 법적으로도 엄격히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501년에는 사족녀가 간통할 경우 간부와 함께 교살한다는 율문이 마련되었고, 1537년에 간행된 『대전후속록』은 이 율문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각주:10] 이 법문은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을 거쳐 『대전통편』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사족 여성이라도 열악한 현실 때문에 정절을 굳게 지킬 수 없는 이들에게까지 정절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족 부녀가 다른 남성에게 몸을 의탁하는 경우에는 추문하지 말라는 규정이 삽입된 것이다. 이 규정이 마련된 계기는 중종 대에 발생한 옥지玉只와 정병正兵 양영담梁永澹의 간음 사건이었다. 『중종실록』을 살펴보면, 옥지가 사족 여성이었는가는 옥지와 양영담의 처벌 여부와 형량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의정부는 옥지가 사족이라고 판단했다. “옥지라는 사람은 사조四祖 중에 간혹 현관顯官도 있어서 사족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보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서 직접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으며 몸을 아끼지 않았고, 네 번이나 남편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족 부녀로 간주해서 처벌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국왕인 중종 역시 그 견해를 받아들였다.[각주:11] 이때 내린 판결은 수교의 형태로 『신보수교집록』에 수록되었다가 『속대전』 단계에 이르러 법문화했다고 한다.[각주:12] 『대전통편』의 규정은 『속대전』의 해당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절을 요구받는 사족 여성이라 하더라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정절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는 상천으로 간주해서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기존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절을 요구하는 국가의 제도와 정책이 기본적으로 사족 부녀를 염두에 두고 마련되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실제로 국가는 상천녀의 간통에 대한 별도의 법적 규정은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고민해볼 문제들도 있다. 별도의 법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해서 국가가 상천녀의 간통을 방관했을까?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국가는 상민과 천민 여성의 간통 사건에도 개입했다. “남편의 고소가 있을 경우에는” 양인 여성은 관비로 삼도록 하고 천인 여성은 유배를 보냈다.[각주:13] 아마도 『대명률』의 규정을 기준으로 처벌한 사례도 존재했을 것이다. 『대명률』 범간조는 서로 뜻이 맞아 간통한 경우에는 장 80대를, 유부녀로 간통한 자에게는 장 90대를 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사족 부녀와 상민 여성이 동등한 수준에서 정절을 요구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족가 처첩의 재혼 문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족 부녀자였던 사족의 처는 남편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수절을 요구받았지만, 상천녀였던 첩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남편 사후에 재혼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각주:14]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양인 여성이 간통으로 처벌받는 경우는 주로 미혼이거나 남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성관계를 맺은 경우였을 가능성이 크다. 기존 연구에서는 사족 부녀와 달리 상민 여성의 간통을 처벌한 사례가 기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정자의 관심 문제였다. 사족 부녀의 간통은 위정자의 주목을 받은 반면, 양인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각주:15] 이런 지적은 정절에 대한 국가의 요구가 사족에게 집중되었으며, 상천녀에 대한 정절 요구는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적 규범이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여성에게 강요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적지 않은 연구가 당시 법적 규정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는 것도 사실이다. 규정과 현실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각주:16] 그 연구들에 따르면, 국가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일반 양인들에게까지 유교적 규범을 강조했으며, 그 결과 성리학적 윤리와 가족질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판단이 가능한 이유는 국가의 입장에 드러나는 이중성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주된 관심사는 사족 여성에게 정절을 실현하게 하는 데 있었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상민과 천인 여성의 정절을 일종의 ‘모범사례’로 제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 대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도」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사족 출신의 여성뿐만 아니라 상민과 천민 여성도 열녀로 수록되었다.[각주:17]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심각하게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무너진 사회 기강을 다시 세우려는 국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비록 해당 기록에 실린 열녀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족 여성이지만, 상민과 천인이 ‘열녀의 모범사례’로 제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법적ㆍ제도적 차원에서 사족 여성에게만 정절을 요구해 온 국가는 일정하게 양인과 천인 여성에게도 ‘열녀의 모범’을 제시하고 그런 윤리를 실천하도록 권장한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국가의 정표 정책은 ‘열녀의 대중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의 정표 정책은 점점 활발해졌고, 그 결과로 양인과 천민 출신의 열녀도 늘어났다고 한다.[각주:18] 그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사족을 넘어서 양인에게까지 보편적으로 확산했다고 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기대와 양인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국가는 정표 정책을 통해 유교적 규범의 확산과 사회적 기강의 확립을 기대했지만, 사족과 양인들은 정표를 통해서 얻게 되는 혜택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국가의 정표를 통해 도덕적 평판을 획득할 뿐 아니라 면세免稅라는 경제적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양인들에게 국가의 정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민과 천민 출신의 열녀가 늘어났다는 연구를 존중한다면, 그들이 사회적ㆍ경제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양녀에게까지 정절의 당위가 확산된 것이 단지 국가의 강요나 억압의 결과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교적 사회를 구현하려는 국가의 기대와 사회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양인의 바람이 서로 뒤섞이면서 빚어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19] 물론 그것은 소진형이 지적한 것처럼 “분명 성리학의 확산이지만 동시에 성리학의 본지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었다.[각주:20]

 

 

3. 교화의 경계와 조선 시대 하층민의 경제적 현실

 

어느 중국인이 박지원에게 물었다. 조선에서는 어떻게 온 나라의 여인이 수절할 수 있느냐고. 박지원의 대답은 이렇다.

 

온 나라의 미천한 백성이나 노비까지도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명색이 사족士族이라고 하면, 아무리 빈궁해도 삼종三從이 끊어질 경우 죽을 때까지 과부로 수절합니다. 그래서 천한 비복婢僕과 조례皁隷들에게까지 자연히 풍속을 이룬 것이 400년입니다.[각주:21]

 

언뜻 보면 박지원의 대답은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조선 사회 전체에 확산하던 상황을 진술하는 증언처럼 읽힌다. 하지만 박지원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사족 여성에 찍혀있다. 그의 발언이 사실인가 여부와는 별개로, 박지원은 조선의 사족 여성이 어떤 어려움에도 충실히 절의를 준수한다는 사실을 자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에서 보면, 조선의 사족 여성은 비복과 조례에게조차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박지원의 진술에서 하층민의 상황을 좀 더 솔직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첫머리다. ‘온 나라의 미천한 백성이나 노비까지 수절을 지키지는 않는다’는 말이야말로 당시 하층민의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지적한 것이다. 물론 국가의 정표 정책은 상민과 천인 여성에게도 ‘열녀’가 될 기회를 늘려주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상민과 천인 여성은 여전히 교화의 ‘바깥’에 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하층민 여성들에게 중요한 관심사는 유교적 정절 이념의 실천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고 생계를 꾸려나가야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직접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으며 생계를 부지하던 옥지가 네 번씩 재혼하고 여러 남성과 잠자리를 가졌던 이유도 생계를 꾸려나가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유교적 이념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고 하는 조선 후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조원서의 처가 관아에 잡혀간 딸을 위해 올린 원정原情은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자료다.

 

이렇게 삼가 원통한 사정을 말씀드리는 일은 소녀小女의 여식이 잡혀간 일로 외람되이 번거롭게 정소한 것이니 황공해서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년배인 여자아이들은 아직도 시집가지 않은 이가 허다한데, 이 무슨 박복命薄한 신세로 심지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입니까? ⓑ입에서는 아직도 젖비린내가 나는데 오로지 생계를 도모하는 것만 꾀하느라 실절失節이 죄에 해당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정려旌閭를 세우는 자가 드문 것입니다. 만일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게 된다면 이미 평생을 그르치게 되니,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관주께서 자식을 돌보는 은택으로 다행히 고녀賈女의 이 군에 부임하신즉, 소녀가 부모와 같은 관의 처분을 밤새워 기다립니다. ⓒ설령 처를 버린 남편이 와서 소송하면 이치상으로 혹 용서받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달려가서 남의 첩이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단지 ⓔ남들이 그런 행동을 천하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훗날의 경계로 말하자면 ⓕ비록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잃었다고 하지만, 어찌 재혼할 도리[再醮之節]가 없겠습니까? (…) 통촉하신 후에 특별히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를 내리셔서 ⓖ[제 딸을] 양반 유씨의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이 유약한 딸아이가 원통함을 품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천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 (…)

 

선행 연구에 의하면, 조원서의 처는 “고녀賈女”로 장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던 인물이었다.[각주:22] 따라서 그녀는 사족 부녀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문서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원서의 딸이 관에 잡혀간 이유는 조원서의 딸이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혼인을 했다가(ⓐ, ⓑ)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는(ⓒ) 유씨 성을 가진 양반가의 첩으로 들어갔다(ⓓ,ⓖ). 유씨 집안의 첩으로 들어간 것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재혼은 그녀가 관아에 체포되는 사유로 작용했다(ⓑ). 이렇게만 보면 양인 여성이 재혼하는 사례가 실절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체포된 실질적인 이유는 전 남편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각주:23] “처를 버린 남편이 와서 소송한다면”이라는 문구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전 남편이 죽은 상태였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전 남편이 생존한 상태에서 다른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은 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원서의 처가 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딸의 행동이 실절이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딸을 버린 전 남편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삼종지도를 잃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오히려 딸의 선택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딸을 굳이 양반가인 유씨 집안으로 돌려 보내주기를 요청한 것은 그만큼 생계 문제가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원서의 처는 “달려가서 남의 첩이 될 수 있습니다”라거나 “어찌 재혼할 도리가 없겠습니까”라며 딸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양반가 첩의 생활 수준은 남편의 경제력에 따라 편차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각주:24] 조원서의 처가 굳이 딸을 유씨 집안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 점에서 조원서 처의 원정은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생계를 위하여 실절失節하고 재가再嫁하는”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의 삶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각주:25]

 

 

▲조원서 처의 원정(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렇다면 하층민 여성의 실절을 바라보는 하층민 남성의 시선은 어땠을까? 생계를 위해 실절을 하기도 했던 하층민 여성이 정절 관념에서 벗어났더라도, 하층민 남성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 만일 하층민 남성이 아내에게 정절 관념을 요구하며 폭력을 가했다면, 그것은 통념처럼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양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절보다 생계를 고려했던 하층민 여성은 얼마든지 ‘성리학적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설명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층민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북청에 거주하던 김약구가 올린 의송議訟을 검토할 것이다.[각주:26]

 

이 원통한 사정을 연유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본디 깊고 험한 산골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아가는 부류로 본읍[北靑]에 사는 과부 김 여인의 여식에게 늦게야 장가들어 1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즉 저희 사이에는 소생所生으로 여섯 살과 일곱 살 된 아들 둘이 있고, 피차 화목하게 살았습니다[彼此和順]. 그런데 갑자기 올봄부터 친정에 일이 있다고 하면서 [본가와 친정을] 오가는 것이 일정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같은 마을에 사는 과유科儒가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줬는데, 제 처妻가 함흥咸興 덕산참德山站에 가서 7월 28일에 아이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밤새 가보니, 새로 태어난 딸아이를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내팽개쳐 두고는 남몰래 함흥으로 달아나서 숨어지내다가 감영에 정속定屬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을 배신하고 음란한 짓을 저지른 여자는 다시는 찾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의 이치이오나 [아내가 없으면] 도중에 새로 태어난 딸아이는 어떻게 젖을 먹이겠으며 여든 된 노모는 누가 봉양하겠습니까?[각주:27]

 

김약구는 어머니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상민 남성이었다. 그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가를 늦게 들었다는 사실에서도 몹시 가난하다는 그의 고백이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늦게 맞이한 아내와 두 아들을 낳았고 17년을 함께 살았다 한다. 그런데 의송을 올린 그해 봄부터 아내의 거동이 심상치 않았다. 아내는 친정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어딘가를 왕래했는데, 김약구는 나중에 동네 사람의 말을 듣고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음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속히 함흥에 가보니 아내는 자신이 낳은 딸아이를 남의 손에 내버리고 달아가 함흥에 가 스스로 감영에 정속되어 버렸다.

 

문제는 김약구의 처 김 소사의 진술이 정작 김약구의 진술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각주:28] 김 소사는 을해년 9월 상순에 자신의 이름을 관안官案에 기재하고 입속入屬하게 해달라는 소지를 올렸다. 김약구의 진술을 고려하면 김 소사는 약 한 달 남짓 숨어지냈음을 알 수 있다. 김 소사는 이 소지에서 남편 김약구가 “패악한 난류亂類”로 날마다 패악한 짓을 일삼아 가업을 파산할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 진술은 부부끼리 “피차 화목하게 지냈다”는 김약구의 진술과 배치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부부 관계가 실제로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 소사가 김약구와의 관계를 해소하려 한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였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앞서 확인했던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의 삶과 부합한다. 즉, 경제적 문제로 실절하거나 재혼했던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의 모습이 김 소사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약구는 아내의 실절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뜻밖에도 김약구는 아내의 실절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부분의 진술을 보면, 그는 오히려 아내가 외간남자와 낳은 딸을 거두어 기르기로 결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감영에 입속된 아내를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 함께 늙어가며 안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각주:29] 중요한 것은 김약구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다. 그는 아내의 부재로 생기는 현실적 문제를 들며 아내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했다. 아내가 없으면 새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고 노모를 봉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약구가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했음을 고려하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그에게 매우 심각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요컨대, 경제적으로 궁핍한 하층민 남성은 아내의 실절 사실을 확인하고도 아이를 기르고 집안 살림을 돌봐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의 하층민 여성과 마찬가지로, 하층민 남성은 이념적 문제보다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을 먼저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종래의 논의대로라면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이념과 가족질서가 상민에게까지 확대된 시기였다. 그런 변화의 중심에는 국가가 있었다. 국가는 유교적인 사회 규범과 사회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성리학 이념을 사회 전체에 확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17세기 이후에 비로소 성리학적 가부장 사회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확립되었다고 한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변화가 진행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절에서 검토한 내용은 그런 거시적 틀로 파악할 수 없는 당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들을 바탕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 하나는 국가가 애초부터 상민 이하의 백성에게 유교적 규범을 강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만일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 양인 열녀가 증가하는 현상은 국가의 강제와 억압보다는 국가의 정표 정책과 상민 이하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역사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적 규범과 사회질서를 강제하는 국가 정책이 현실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졌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유교적 규범을 확산하려 노력했음에도 그것이 여러 요인에 의해 제약을 받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의 보급이 매우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추정은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에 관한 더 많은 사례를 검토하면서 논증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4. 결론

 

흔히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여성에 대한 정절이 가혹하리만큼 요구되었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던 성리학적 규범과 사회질서의 보급은 일관된 기준에 따라 진행되지도 않았으며, 경계선 혹은 한계선도 분명히 존재했다. 정절을 요구받은 가장 핵심적인 계층은 물론 사족이었다. 국가는 사족 여성에게 한정해서 정절을 요구했고, 상민과 천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법과 제도 역시 그런 의도에 맞게 여러 차례 정비되었으며, 그것은 조선 후기의 법전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문제는 국가의 입장이 그다지 일관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비록 국가는 오랫동안 사족 여성에 대한 정절만을 염두에 두었지만, 전쟁이라는 비상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뒤에는 상민과 천민에게도 ‘열녀의 모델’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정표했다. 민심이 심각하게 이반되고 사회적 기강이 무너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해결책이었다. 비록 정절은 의義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강조된 것이지만, 사족과 상ㆍ천민에게는 도덕적 평판을 확보하고 면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사회적 특권층이 아니었던 상민과 천민에게는 유독 더 매력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의 ‘교화’에 관한 양민과 천민의 적극적 대응에는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민과 천민이 국가의 ‘교화’에 일정하게 호응했다고 해서, 또 양민과 천민 출신의 열녀가 증가했다고 해서 국가가 추구한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래의 연구는 ‘성리학적 규범’이 사족뿐 아니라 상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력이 빈약했던 다수의 상민은 교화의 바깥에 있었다. 사족과 달리 다수의 상민 여성에게는 정절이라는 이념보다는 현실적인 생존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상민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양인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다면 상민 남성으로서는 상민 여성이 경제적 문제와 생계유지를 위해 실절하고 재혼하는 상황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와 생계유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은 상민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상민 여성이 바람을 피웠다고 하더라도 궁핍한 상민 남성은 육아와 살림, 부모 봉양 등의 현실을 고려해서 아내의 실절을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정절보다는 생계의 문제를 위해 실절과 재혼을 거듭하는 하층민 여성, 아내의 실절을 알고도 현실적 가계 유지를 위해 눈감을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 남성. 이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  하나는 국가가 애초부터 상민 이하의 백성에게 유교적 규범을 강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만일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 양인 열녀가 증가하는 현상은 국가의 강제와 억압보다는 국가의 정표 정책과 상민 이하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역사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적 규범과 사회질서를 강제하는 국가 정책이 현실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졌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유교적 규범을 확산하려 노력했음에도 그것이 여러 요인에 의해 제약을 받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의 보급이 매우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추정은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에 관한 더 많은 사례를 검토하면서 논증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20년 2학기 대학원 수업 '한국 고문서 연습'의 기말 보고서로 작성된 것임.

 

 

 

  1. ‘유교 가부장제’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데 얼마나 유용한 용어인지는 회의적이다. 이 용어는 조선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다는 측면을 드러내는 데는 적절할지 모르지만, 조선의 사대부가 왜 굳이 주자학적인 사회질서를 추구했으며 어떤 세상을 바람직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국ㆍ일본과 달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집안 배경에 따라 그 자식을 차별했던 조선의 특수한 현상도 충분히 고려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이 용어는 조선시대와 식민지 시기의 가家가 엄연히 다른 구조의 집단이었으며 그 성격도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충실히 보여주지 못한다. [본문으로]
  2.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김경숙, 2005, 「조선후기 여성의 呈訴活動」, 『한국문화』 36; 2018, 「조선시대 決訟立案과 여성의 소송 주체성」, 『한국사론』 64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이런 질문에 대답한 연구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병인, 2001, 「조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국가규제의 변화」, 『역사비평』 56; 2003, 「조선 중ㆍ후기 간통에 대한 규제의 강화」, 『한국사연구』 121; 김호, 2012, 「다산 정약용과 흠흠신서 -조선 후기 강상의 강조와 다산 정약용의 정, 리, 법」, 『다산학』 20. [본문으로]
  4. 강명관, 2007, 「節婦, 烈婦, 烈女」, 『동양한문학연구』 25 [본문으로]
  5. 근래의 한 연구는 기존의 여성사 연구의 구조가 “여성들을 구조적 희생자로만 묘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 구조에 합치되는 행위를 하고자 했던 여성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소진형, 2020, 「열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중화와 여성의 욕망」, 『한국정치학회보』 54-1) 필자는 이런 문제 제기에 공감한다. 다만 남성 중심의 구조에 “합치되는 행위”를 하지 않았던, 혹은 할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어째서 그랬는지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고민을 통해서 유교적 사회 규범을 확산하려 노력했던 국가 정책의 한계 혹은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6. 이 사건은 『흠흠신서』와 『추관지』, 『일성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 여인의 시가와 친정 식구들이 간부인 정경문만 죽이고 조 여인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종 판관인 정조는 이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음란한 과부는 죽이지 않고 간부(奸夫)만을 죽였으니, 이 옥안을 본 자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며 분개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경문을 죽인 주범인 조명득은 오히려 정경문이 자신의 동생을 “겁탈”하려 한 것이라며 조 여인을 보호하려 했다.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 사족 남성도 눈앞에 벌어진 범간犯奸 문제를 두고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가부장’ 혹은 ‘성리학자’로서 사족 남성의 면모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족 남성의 모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예컨대, 하여주의 연구는 그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다. 하여주는 17세기 ‘성리학의 거두’ 송시열이 가부장제를 조선에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그런 결론의 근거 중 하나는 송시열이 외가 식구나 사위, 외손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었다. (하여주, 2011, 「17세기 송시열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정착을 위한 노력과 좌절」, 『조선시대사학보』 79) 이런 생각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가부장은 철저하게 의리의 관점에서 부계 혈족과의 관계만 중시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족 남성들이 의리만을 중시하며 인정을 배제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서 보면 주자가 구상한 가족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송시열이 모계ㆍ처계 식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 자체가 이상할 일은 아니다. [본문으로]
  7. 『日省錄』 정조 14년(1790) 4월 23일. [본문으로]
  8. 『大典通編』, 刑典, 姦犯, 士族婦女恣行淫慾. “士族婦女, 恣行淫慾, 瀆亂風敎者, 竝姦夫絞。[其窮不自存, 流離道路, 丏乞托身者, 與常賤無異, 不可以士族論, 竝姦夫勿推。]” [본문으로]
  9. 장병인, 2003, 앞의 글. [본문으로]
  10. 장병인, 2003, 앞의 글. [본문으로]
  11. 『중종실록』 중종 38년(1543) 12월 22일. [본문으로]
  12. 장병인, 2003, 앞의 글. [본문으로]
  13. 장병인, 2001, 앞의 글. [본문으로]
  14. 이성임, 2008, 「조선시대 兩班의 蓄妾現像과 경제적 부담」, 『고문서연구』 33. [본문으로]
  15. 장병인, 2003, 앞의 글. [본문으로]
  16. 이런 측면은 이숙인, 2014, 『정절의 역사』, 푸른역사에 상세하다. [본문으로]
  17.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모두 720명의 열녀가 수록되었는데, 그중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사례에 등장하는 여성이 542명이다. (이광렬, 2007, 「光海君代 《東國新續三綱行實圖》 편찬의 의의」, 『한국사론』 2007) 그중에서 계층이 확인되는 422명 중 문반ㆍ무반 이하 유학 이상의 처가 68%이고, 상천녀와 군인의 처는 26%였다고 한다. (박주, 1993, 「임진왜란과 旌表」, 『한국전통문화연구』 8) [본문으로]
  18. 소진형, 2020, 앞의 글, 33-34면. 이 연구는 박주가 제시한 통계를 근거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열녀 정표자 중 사대부의 비중은 16세기에 62%였지만 17세기에는 56%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의 견해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기재된 1,299명의 열녀를 분석한 이정주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족이 열녀 정표를 독점하는 현상이 심해진다고 보았다. 18세기에는 전체 열녀 중에서 81.8%가 양반이었고, 16세기에 24.6%를 차지하던 상민 출신의 열녀는 18세기에는 10.4%로 줄어들었다고 한다.(이정주, 2007, 「조선시대 貞節 倫理의 실천자와 身分」, 『역사민속학』 24) 여전히 조선 후기에 양인ㆍ천인 열녀가 늘어난다는 견해가 통설이기는 하지만, 두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이 조선 후기 열녀 현상을 더 정확히 보여주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19.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혹은 그런 사회구조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그동안 ‘유교적 가치의 내면화’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소진형이 지적했듯이 그런 설명은 “여성들을 구조적 희생자로만 묘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 구조에 합치되는 행위를 하고자 했던 여성들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소진형, 2020, 앞의 글) [본문으로]
  20. 소진형, 2020, 앞의 글, 34면. [본문으로]
  21. 박지원, 『연암집』 권12, 「열하일기」, 太學留舘錄. (강명관, 2011, 「「열녀함양박씨전」 재론」, 『동양한문학연구』 32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2. 김경숙, 2005, 앞의 글. [본문으로]
  23. 김경숙, 2005, 앞의 글. [본문으로]
  24. 이성임, 2003, 「16세기 양반관료의 외정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호적을 분석해 한성부에 머물던 첩의 경제력을 추산한 연구도 있다. (조은ㆍ조성윤, 2004, 「한말 서울 지역 첩의 존재 양식」, 『사회와 역사』 65) 그에 따르면, 첩호의 가옥은 11~20칸 규모의 집이 가장 많고 20칸 이상의 집에 거주하는 첩도 많았다고 한다. 첩호의 대부분이 자기 소유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물론 한성부의 사례를 다른 지역으로까지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양반가의 첩이 일반 양인이나 천인 여성보다 더 많은 경제적 여유를 누린 것은 사실로 보인다. [본문으로]
  25. 김경숙, 2005, 앞의 글. [본문으로]
  26. 현재 김약구가 올린 「金若九議送」과 그의 아내가 올린 「金召史所志」는 모두 『고문서』 25권에 실렸으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활자화한 텍스트만 확인할 수 있으며, 문서의 이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문서의 이미지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은 이 글의 치명적인 한계인데, 이 점은 추후에 보완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27. 「金若九議送」 (『고문서』 25, 私人文書, 所志類, 風俗․討索). [본문으로]
  28. 「金召史所志」 (『고문서』 25, 私人文書, 所志類, 風俗․討索). “右謹陳所志矣段 女矣身本夫貝惡亂類之人 日復日發惡 家業破散之境是乎所 仰訴爲白去乎 特下處分女矣身作名官案入屬之地爲白只爲 行下向教是事” 이 소지를 올린 김 소사가 김약구의 처라는 점은 두 문서를 비교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①김 소사와 김약구는 모두 북청에 거주하는 인물이다. ②김 소사의 소지와 김약구의 의송이 작성된 시점이 모두 을해년 9월이다. ③두 문서에 뎨김이 기재된 시점이 며칠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 소사의 소지에는 9월 12일에, 김약구의 의송에는 9월 16일에 뎨김이 작성되었다. ④김 소사는 남편을 비난하며 관안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달라고 요청했는데, 김약구의 의송에서 그의 아내가 영문營門에 정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문서는 서로 관련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두 문서를 살펴보면 김약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 김 소사의 어머니가 모두 김씨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양인 사이에서는 동성 간의 혼인이 금지된다는 법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본문으로]
  29. 「金若九議送」 (『고문서』 25, 私人文書, 所志類, 風俗․討索). “特垂河海之澤 即爲頉案 携手同歸 俾爲偕老 奠接之地 千萬頌祝爲白只爲 行下向教是事”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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