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의 빈부 차별
- 흥부ㆍ놀부 인식의 변화와 빈부 차별의 존재 양상 -
2019.06.24
<목차>
1. 머리말
2. 『흥부전』에 보이는 가난의 실상과 빈부 차별
(1) 흥부가 경험한 가난의 현실
(2) 작품 속의 빈부 차별 사례
3. 흥부ㆍ놀부의 위상 변화와 빈부 차별
(1) 조선 시대의 흥부ㆍ놀부 인식: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2) 현대인의 흥부ㆍ놀부 인식: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뒤바뀐 주인공의 위상
4. 맺음말
1. 머리말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일자리와 소득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양섭취와 주거환경, 교육수준 등 모든 영역에서 빈부에 따른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날로 심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확실히 한국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층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심각하다. 빈부 차별은 가난으로 이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빈부 차별을 보여주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자 이런 말을 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한 개인의 예외적인 사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취약계층’ 아동들은 빈부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지역아동센터를 다닌다고 말하면 일단 가난하구나. 또는 엄마나 아빠가 없겠구나. 그래서 뭔가 좀 부족한 아이겠구나….” “안 다니는 친구들이 저한테 물어보는 게 거기 약간 불우한 아이들 다니는 데 아니냐….” “공부방에 다닌다고 차별, 낙인을 받지 않는 자유를 얻고 싶다.” 1 2
빈부 차별이 한국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상적인 현상이라면 그 원인을 단순히 개개인의 인격 문제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차라리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빈부 차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선택한 전략은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 『흥부전』을 어떻게 독해했는지를 검토하여 한국 사회가 가난을 해석해 온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작품에 반영된 당시의 빈부 현실과 차별의식을 확인한 뒤,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 『흥부전』 관한 독법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검토하려 한다. 조선 후기 가난의 실상은 『흥부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작품 안에서 빈부 차별의 현실이 나타나는가? 조선 후기에 『흥부전』을 향유한 사람들은 가난과 빈부 차별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가? 그들의 태도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흥부전』을 읽어내는 방식과 차이가 있는가? 혹여 차이가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굳이 『흥부전』을 검토하려는 까닭은 이 작품이 조선 후기의 빈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당대인의 태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적지 않은 현대의 국문학자들이 빈부갈등의 측면에서 이 작품을 분석하기도 했다. 따라서 『흥부전』은 빈부 차별을 주제로 삼아 검토하기에 적절한 텍스트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기본적으로 검토한 이본은 경판 25장본 『흥부전』(이하 『경판 25장본』)과 세창서관본 『연의각』(이하 『세창서관본』), 오영순 소장본 『장흥보전』(이하 『장흥보전』), 임형택 소장본 『박흥보전』(이하 『박흥보전』)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서는 창본에 해당하는 신재효본 『박흥보가』(이하 『신재효본』)도 검토했다. 3 4
『흥부전』에서 빈부 차별의 실상을 좀 더 일관성 있게 파악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잠정적으로나마 몇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①차별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빈부를 기준으로 위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②차별 대상에 가해지는 명시적ㆍ암묵적 폭력이 그의 가난을 문제 삼는다. ③폭력을 가하는 쪽은 운수와 같은 통제 불가능한 외부 조건을 전유하여 빈부의 위계를 고착화하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④가난의 원인을 단지 사회 구조나 운수 등 외부 조건으로 돌리지 않고 개인 혹은 집단의 인격ㆍ능력ㆍ노력ㆍ도덕성 등으로 돌려 빈곤층을 비난하고 빈부의 위계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네 가지 조건 가운데 ①은 빈부 차별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①을 바탕으로 ②만 충족되는 사례는 ‘원초적인 빈부 차별’로 간주한다. 이 단계에서는 빈부의 위계를 별도로 정당화하지 않는 가장 거칠고 일방적인 폭력이 행사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③까지 충족하는 사례는 ‘간접적인 빈부 차별’로 이해한다. 사회구조나 운수 등 통제 불가능한 요인을 활용하여 빈부의 위계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사례가 간접적인 빈부 차별에 해당한다. 간접적인 빈부 차별과는 다른 사례도 존재할 수 있다. ①과 ②를 토대로 ④를 충족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간접적인 빈부 차별과 구분하여 ‘직접적인 빈부 차별’로 정의한다. 이 단계에서는 간접적인 빈부 차별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빈부의 위계와 차별이 정당화된다. 빈곤층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논리가 대표적인 예시다. 가난의 책임은 이제 외부 조건이나 통제 불가능한 요인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전가된다. 5 6
▲근현대에 들어 출간된 『흥부전』
2. 『흥부전』에 보이는 가난의 실상과 빈부 차별
(1) 흥부가 경험한 가난의 현실
『흥부전』에서 빈부 차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흥부의 경제적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빈부 차별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경제적 지위를 기준으로 생겨나는 위계다. 흥부가 경험했던 가난의 실상을 확인하면 그가 경제적인 권력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놓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흥부의 삶이 조선 후기 민(民)의 일상을 반영한다면, 그의 생활을 통해서 당시 경제 현실의 단면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흥부의 생활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의식주(衣食住)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생활 조건이지만, 흥부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부모의 재산을 독차지한 놀부에게 쫓겨나 거주할 곳조차 없었던 흥부는 수수깡 한 뭉치를 베어다가 작은 말집 한 채를 지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방의 규모는 성인 한 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았고, 지붕 아래에서도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비가 내리면 방 안에 빗물이 차고, 문과 벽도 허술해서 겨울에는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그렇다고 추위를 견딜 만큼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을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진 날이면 짚신 신고, 마른 날에는 목신을 못 면하며 오뉴월에 핫옷 입고, 설한풍(雪寒風)에 베옷 입어 기한(飢寒)으로 지내”는 처지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굶주림이었다. 주거나 의복 문제는 그래도 견딜 수 있었지만 굶주림은 손쓸 방도가 없었다. 『경판 25장본』에서는 흥부 아내가 배고파서 우는 아기를 달래며 이렇게 말한다. “어제저녁 김 동지 집에 용정방아 찧어 주고 쌀 한 되 얻어다가, 너희들만 끓여 주고 우리 양주 어제저녁부터 이때까지 그저 있다.” 품을 팔아 얻은 쌀 한 되로 겨우 한 끼를 모면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품이라도 팔 수 있었던 『경판 25장본』의 흥부 부부는 비교적 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다른 이본에 서술된 흥부 일가의 굶주림은 훨씬 더 심각하다.
하루 이틀 굶어놓으니 어린 자식 자란 자식 밥 달라고 울음 울고, 흥부는 사흘 굶고 흥부 아내는 나흘 굶어놓으니 근력이 쇠진하여 말이 잘 안 들리고, 강보 자식 젖 물리고 자란 자식 곁에 앉아 밥 달라고 슬픈 소리 쇠라도 녹겠구나. 굶어 굶어 못 견디어 흥부 마누라가 “여보 아이 아버지 말씀 들으시오. 옛말로 부자 일신 동기 일신이라 하였으니 저 건너 아주버님댁에 가 돈이 되나 쌀이 되나 양단간에 얻어와야 당신도 살 테고 어린 자식들을 살리겠소. 하루만 더 굶으면 나도 역시 할 수 없소.” (『세창서관본』)
흥부의 아내가 놀부를 찾아가서 식량이든 돈이든 얻어오라며 흥부를 닦달한 것도 결국 굶주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흥부도 놀부를 찾아가 ‘세 끼 굶어 누운 자식 살려낼 길 전혀 없는’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한다. 유만주의 기록을 보면, 실제로 조선 후기의 경제 현실은 매우 열악했다. 노파 두 사람이 굶주리다 못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가 하면 어떤 가난한 선비의 처자식은 깨진 바가지를 씹어먹을 정도로 굶주리다 죽음을 맞았다. 이런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 『세창서관본』에 묘사된 궁핍이야말로 조선 후기에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경판 25장본』에서 확인한 것처럼 사정이 그보다 낫다고 해도 굶주림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식량 문제는 당시에 매우 심각하고도 일상적인 문제였다. 7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흥부와 그의 아내는 생존하기 위해 사방으로 애를 쓴다. 『경판 25장본』에서 흥부는 짚신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런데도 살아갈 방도가 보이지 않자 흥부 부부는 온갖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흥부의 아내가 품을 팔 때, 용정방아 키질하기, 술집에 술 거르기, 초상집에 제복(祭服) 짓기, 제사집에 그릇 닦기, 신사(神祠) 집에 떡 만들기, 언 손 불며 오줌 치우기, 얼음 풀리면 나물 뜯기, 봄보리 갈아 보리 놓기, 온갖 품을 팔고, 흥부는 정이월에 가래질하기, 이삼월에 붙임하기, 일등전답 못논 갈기, 입하(立夏) 전에 목화 갈기, 이집 저집 이엉 엮기, 더운 날에 보리 치기, 비 오는 날 멍석 걷기, 원산 근산 시초(柴草) 베기, 무곡주인(貿穀主人) 짐 져주기, 각읍(各邑) 주인 삯길 가기, 술만 먹고 말 짐 싣기, 오 푼 받고 마철 박기, 두 푼 받고 동재 치기, 한 푼 받고 비 매기, 식전에 마당 쓸기, 저녁에 아이 만들기, 온갖 일을 다 하여도 끼니가 간 데 없다. (『경판 25장본』)
문제는 흥부 부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여전히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궁여지책 끝에 그가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매품’을 파는 일이었다. 매품을 권하는 고을 호방(戶房)에게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 갚을 길 전혀 없소”라는 흥부의 한마디 말에는 그의 절박함이 묻어난다. 물론 매품을 파는 흥부의 모습이 조선 후기의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 사람들이 경험했던 가난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문제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구조적인 가난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흉년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지방민이 별다른 대책 없이 도성으로 가서 유리걸식했던 조선 후기의 현실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8
그런데 창본 계열의 『신재효본』에는 『흥부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신재효본』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매품팔이까지 불사하던 『흥부전』의 흥부와 전혀 다른 모습의 흥부가 등장한다. 9
이곳저곳 빌어먹어 한두 달 지내가니 발바닥이 딴딴하여 부르트는 일이 아예 없고 낯가죽이 두터워서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어졌다. 1년 2년 넘어가니 빌어먹는 수가 터져서 흥보는 읍내 나가면 객사에나 사정에나 자리를 떡 버티고, 외촌을 갈 양이면 물방아집이든지 당산 정자 밑에든지 사처를 정하고서, 어린 것을 옆에 놓고 긴 담뱃대 붙여 물고 솥을 닦아내는 솥솔을 매든지, 또아리를 곁든지, 냇가 방축 가까우면 낚시질 앉아 할 때, 흥보의 마누라는 어린아이 등에 붙여 새끼로 꽉 동이고, 바가지에 밥을 빌고 호박잎에 건건이를 얻어 허위허위 찾아오면, 염치없는 흥보에 소견에 가장 티 내느라고 가속이 더디왔다, 잪었던 지팡이로 매질도 하여보고, 입에 맞는 반찬 없다고 앉았던 물방아집 불도 놓아보려 하고, 별꼴을 매양 부렸다. (『신재효본』)
언뜻 보면 흥부 일가의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 생계를 책임지는 흥부의 무능력과 나태함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저곳 빌어먹어 한두 달 지내가니”라거나 “1년 2년 넘어가니”라는 내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문장은 흥부가 처음부터 무기력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는 두 해 동안 발바닥이 단단해질 만큼 열심히 구걸했지만, 얻을 수 있는 전곡은 극히 적었다. “우리 신세가 이렇게 되어 이왕 빌어먹을 테면 전곡이 많은 데로 가볼 밖에”라는 흥부의 말에서 그런 사정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흥부 일가는 이곳저곳 떠돌고도 궁핍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흥부의 모습은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발버둥을 쳐도 달라지지 않는 가난의 현실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가 마주한 절망적인 현실은 결국 흥부 부부의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 10
흥보댁이 할 수 없어 죽기로 자처하고 복을 못 타고난 신세 자탄을 진양조로 서글피 울 때, 마음 있는 사람들은 귀에서도 눈물이 난다. “애고 애고 설운지고, 복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잘 타고나는고. (…) 어찌하면 잘 사는지 세상에 난 연후에 의롭지 않은 일 아니 하고 밤낮으로 벌어도 서른 날에 아홉 끼니 먹기도 어렵고, 일년 사철 헌 옷이라. (…) 차라리 자결하야 이런 꼴 안 보고 싶구나. 애고애고 설운지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니 흥보가 울며 말려, “여보소, 아기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 부인의 백년 신세 가장에게 매였는데, 박복한 나를 얻어 이 고생을 하게 하니, 내가 먼저 죽을라네.” 허리띠로 목을 매니 흥보 아내 겁을 내어 가장의 손을 꼭 붙들고서 둘이 서로 통곡하니, 아주 초상난 집 같았다. (『신재효본』)
이 대목을 보면 『신재효본』에 나타나는 가난의 현실이 개인의 무기력과 무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이 살아갈 의지를 품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고 극단적인 현실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신재효본』에 담긴 극단적인 상황이 일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극적 효과가 가미된 이본에서조차 구조적 가난이 부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2) 작품 속의 빈부 차별 사례
『흥부전』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경제적 도움을 청하러 온 흥부를 놀부가 폭행하는 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폭력의 사례다. 다른 사례로는 『박흥보전』에서 흥부 아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떡을 얻어먹으려다 조롱을 당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두 사례는 모두 빈부의 문제와 직ㆍ간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매품팔이는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매품팔이로 매를 맞는 경우도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빈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설령 빈부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흥부는 결과적으로 매품을 파는 데 실패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다룰 이유는 없을 것이다.
먼저 놀부가 흥부에게 가하는 폭력을 검토하려고 한다. 흥부와 놀부의 갈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장면은 모든 이본에 실릴 만큼 중요한 대목이다. 흥부는 굶주리다 못해 놀부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놀부는 흥부를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한으로 매도하고는 힘껏 매질한다. 『경판 25장본』에는 해당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비옵니다. 형님전에 비옵니다. 세 끼 굶어 누운 자식 살려낼 길 전혀 없으니, 쌀이 되나 벼가 되나 양단간에 주시면, 품을 판들 못 갚으며 일을 한들 공할손가. 부디 옛 일을 생각하여 사람을 살려주시오.” 놀부놈의 거동 보소. 성낸 눈을 부릅뜨고 볼을 치며 호령하기를, “너도 염치없다. 내 말을 들어 보아라.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불생무명지초(地不生無名之草)라. 네 복을 누굴 주고 나를 이리 보채느냐? 쌀이 많이 있다 한들 너 주자고 노적을 헐며, 벼가 많이 있다고 한들 너 주자고 섬을 헐며, 돈이 많이 있다 한들 괴목궤(槐木櫃)에 가득 든 것을 문을 열며, 가룻 되나 주자 한들 북고왕 염소독에 가득 넣은 것을 독을 열며, 의복이나 주자 한들 집안이 고루 벗었거든 너를 어찌 주며, 찬밥이나 주자한들 새끼 낳은 거먹 암캐 부엌에 누웠거늘 너 주자고 개를 굶기며, 지게미나 주자 한들 구중방(九重房) 우리 안에 새끼 낳은 돝이 누웠으니 너 주자고 돝을 굶기며, 겻섬이나 주자 한들 큰 농우가 네 필이니 너 주자고 소를 굶기랴. 염치없다, 흥부놈아.” 하고, 주먹을 불끈 쥐어 뒤꼭지를 꽉 잡으며, 몽둥이를 지끈 꺾어 손잰 스님의 매질하듯 원화상의 법고 치듯 아주 쾅쾅 두드리니, (…) (『경판 25장본』)
궁핍한 흥부가 경제적 도움을 바라는 약자의 처지라면, 부유한 놀부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도움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강자의 입장에 서있다. 흥부와 놀부는 빈부를 기준으로 명백하게 위계적 관계에 놓여있다. 빈부 차별의 필수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형제 관계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빈부뿐만 아니라 혈연적인 권력 관계도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놀부가 “몽둥이를 지끈 꺾어 손잰 스님의 매질하듯” 흥부를 폭행할 수 있었던 데는 빈부보다는 형제의 위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놀부를 찾아가는 흥부는 『박흥보전』에서는 ‘몽둥이찜질’을, 『세창서관본』에서는 “형님께서 일상 나를 꾸짖으시려면 때리는 매”를 먼저 걱정했다. 그는 놀부에게 쫓겨나기 전부터 “제 형에게 어찌나 압제를 받았던지 형의 목소리만 나도 우선 오장이 서늘하고 사지를 벌벌 떨”었다. 빈부와 상관없이 놀부가 이전부터 흥부를 여러 차례 폭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흥부를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놀부의 폭언은 형제간의 위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폭언을 날리기 직전에 ‘5대 독자’ 운운하며 동생을 외면하는 놀부의 태도는 형보다는 부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자로서의 놀부가 흥부를 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수를 끌어들여 빈부의 위계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놀부는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불생무명지초(地不生無名之草)라. 네 복을 누굴 주고 나를 이리 보채느냐?”고 역정을 낸다. ‘누구나 자신이 먹고살 만큼의 재산은 타고나는 법인데 네가 네 몫을 잃어버리고 어째서 내게 손을 벌리냐’는 것이다. 여기서 놀부는 ‘천불생무록지인’이라는 말을 전유하여 흥부의 가난을 정당화한다. 그런 점에서 이 사례는 ‘간접적인 빈부 차별’에 속한다.
가난 때문에 폭력을 경험하는 인물은 비단 흥부뿐만이 아니다. 『박흥보전』에서는 굶주린 흥부의 아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떡을 얻어먹으려다가 도리어 조롱을 당한다. 그 일은 흥부의 아내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놈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몽둥이 맞은 놈 울 듯, ‘애고 애고’ 울고 오니 흥보 아내 썩 나서며, “애고 이게 웬일이냐. 못 먹이고 못 입히는 불쌍한 내 자식을 어느 놈이 때렸느냐? 뉘라서 너를 때리더냐?”
“어머니 내 말을 듣소. 아, 놈들이 떡을 먹으면서 ‘네 이 흥보 아들놈아’ 하드란 말이네. 그 놈들이 어른의 이름을 귀딱지 떼듯 하옵디다.” “그래 대답을 어찌하였느냐?”
“날 떡이나 좀 다구 하였지.” “그러면 떡 주더냐?”
“그놈들이 떡은 아니 주고 땅에다가 오줌을 누더니 흙떡 세 개를 뭉쳐주며 이것을 다 먹으면 참떡 일곱 개를 주마 하기에 떡 먹을 욕심으로 흙떡을 먹었더니 속이 용용하데.”
“그러하면 참떡을 주더냐?”
“글쎄, 들어보소. 뭇놈들이 가랑이를 벌리고 포개 서더니 ‘우리 가랑이 밑으로 들어가서 저 뒤로 나오면 참떡 열네 개를 주마’ 하옵디다. 떡 먹을 마음으로 기엄기엄 들어갔어요.”
“그래 참떡은 주더냐?”
“글쎄, 들어보소. 기어 앞으로 나가니 뒤의 놈이 떨어져서 앞에 와 붙고, 그 뒷놈이 떨어져 앞으로 붙고 또 붙고 붙기에 겨우 십일(十日)을 기고 나니 손과 무릎이 다 깨어지고 목구멍에서 유혈(流血)이 죽죽 나오기에 ‘애고 나 죽는다’ 소리하니 뭇놈들이 모두 도망하고 없데.” (『박흥보전』)
대화를 보면 흥부의 아들이 전하는 사건이 일부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흥부 아들이 또래 아이들의 가랑이 아래를 열흘 동안 기었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흥부 아들은 울분이 차오른 상태에서 어머니와 대화하고 있다. 대화의 컨텍스트를 고려하면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진술하면서 다소 과장이 섞이는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 현실성을 생각할 때, 흥부 아들이 경험한 폭력 자체를 터무니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령 대화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하더라도 흥부 아들이 경험한 사건 자체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흥부 아들은 빈부 차별을 경험했을까? 일단 흥부 아들과 또래 아이들 사이에는 ‘참떡’을 매개로 빈부의 위계가 설정된다. 떡을 가진 아이들과 떡을 먹고 싶은 흥부 아들 사이에는 떡을 먹을 수 있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또래 아이들이 흥부 아들에게 흙떡을 먹게 하거나 가랑이 밑을 기어가도록 한 것은 양쪽의 권력 관계를 잘 보여준다. 흥부 아들이 빈부의 위계에서 하층에 놓여 조롱을 당한 것은 떡을 먹을 수 없는 조건, 즉 가난 때문이다. 그가 경험한 폭력은 가난 때문에 발생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이 가난을 해석하려 들거나 빈부격차를 이용해 권력 관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흥부 아들이 경험한 폭력은 ‘원초적인 빈부차별’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검토한 사례에서는 공통적으로 빈부를 기준으로 한 위계가 설정된다. 흥부와 놀부, 흥부 아들과 또래 아이들 사이에는 분명히 빈부격차에서 비롯되는 권력 관계가 작동했다. 흥부가 놀부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고 흥부 아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이유는 역시 가난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례는 모두 빈부 차별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다만 흥부 아들의 사례에서는 빈부의 권력 관계를 정당화하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흥부 아들이 경험한 차별은 ‘원초적인 빈부 차별’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반면 흥부의 경우에는 놀부가 운수 등 통제 불가능한 요건을 전유하여 흥부의 가난을 정당화하고 빈부의 위계를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빈부차별’에 속한다. ‘직접적인 빈부차별’은 『흥부전』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흥부전 필사본
3. 흥부ㆍ놀부의 위상 변화와 빈부 차별
(1) 조선 시대의 흥부ㆍ놀부 인식: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흥부전』에는 원초적인 빈부 차별과 간접적인 빈부 차별이 나타난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에 빈부 차별이 일반적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설령 사회 일각에서 빈부 차별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행동이었다면 빈부 차별이 일반적이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흥부전』의 빈부 차별을 바라보는 당대인의 시각 자체를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흥부전』의 빈부 차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흥부전』에서 작중 인물들이 흥부를 바라보는 시각과 두 사람에 대한 화자의 평가를 분석할 것이다. 『흥부전』이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향유된 ‘서민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안에 담긴 흥부와 놀부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흥부전』은 기본적으로 흥부와 놀부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간혹 제삼자가 등장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서 『경판 25장본』에는 장자(長者)가 잠깐 등장한다. 짚신을 팔아 생계를 마련하기로 한 흥부는 짚을 구걸하러 장자를 찾아갔다. 흥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장자는 연민을 표현하며 흔쾌히 짚단을 내주었다. 『세창서관본』에서는 놀부 집의 마당쇠가 흥부를 매질하는 놀부를 보고 이렇게 소리친다. “작은 서방님 돌아가네. 동네 사람들 이런 인심 또 있소? 동기일신(同氣一身)이라 하니 형이 동생에게 이렇게 하는 양 처음 보겠소.” 장자든 놀부 집의 마당쇠든 흥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 측은지심(惻隱之心)이었다. 작중 인물이 흥부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작품을 개작(改作)하고 향유하던 이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훨씬 더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웠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놀부가 “웅큼하고 흉악한 심술보”가 하나 더 붙어서 “오장이 칠부”였던 이상한 사람으로 설정된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비단 작중 인물들만이 아니다. 작중 화자 역시 그들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경판 25장본』에서 화자는 흥부의 가난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작품에 직접 개입하여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흥부의 집에서 쌀을 얻으려던 생쥐도 먹을 것이 없어 밤낮 보름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다리에 가래톳이 생길 정도이니 어떻게 서럽지 않겠느냐고 한탄한 것이다. 『장흥보전』의 화자도 쉴 틈 없이 품을 팔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흥보를 보며 이렇게 탄식한다. “이렇듯 궁곤(窮困)하니 어찌 아니 불쌍한가.” 반면 화자가 놀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경판 25장본』에서는 작품 첫머리에서부터 놀부를 “심사 터무니없이 흉악한” 인물로 비난한다. 그 이유는 “부모 생전에 분재 전답을 홀로 차지하고, 흥부같은 어진 동생을 구박하여 건넛산 언덕 밑으로 내쫓고, 나가며 조롱하고 들어가며 비양”한 탓이다. 즉, 화자가 놀부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부자라서가 아니라 탐욕스럽고 인색하고 거만하기 때문이다. 『흥부전』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놀부 응징도 그의 탐욕과 인색함에 대한 응징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흥부에 대한 측은지심과 탐욕스러운 놀부에 대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이 『흥부전』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흥부에게 공감하고 탐욕스러운 놀부를 비난하는 태도는 조선 후기 촌락의 현실과 부합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농촌은 상호 호혜성의 도덕적 원리에 따라 운영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주류적인 산업이었던 농업은 개인의 힘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해마다 반복되는 기근과 국가에서 부과하는 부세는 농민에게 매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런 조건에서 살아가던 농민들은 사족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족 역시 휼민(恤民)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다. 그들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신분적 상하 관계에 있던 농민과 사족마저 상호 호혜적 원리에 따라 관계를 맺었다면, 빈곤층과 부유층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부자들에게 가장 심한 비난은 ‘인색하다’는 평판이었다고 한다. 11 다른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부자들은 인색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부자들은 19세기 후반에는 농민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12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일상처럼 가난을 경험하는 사회에서는 상호 호혜적 도덕 원리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가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빈부 차별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빈부 차별을 일삼은 놀부야말로 당대의 상식과 어긋나는 인물이었다. 상호 호혜적 도덕 원리를 내버린 놀부를 지탄하는 『흥부전』 화자의 태도는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3
부에 관한 조선 시대 사람들의 관념이 현대와 달랐다는 점도 조선 후기에 빈부 차별을 찾아보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다. 19세기 후반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헐버트는 조선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로 ‘낭비벽’을 들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수중에 돈이 있으면 물 쓰듯 쓰고, 돈이 없을 경우 남의 돈을 빌려서라도 쓰려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평가에는 근대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에 익숙했던 헐버트의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 대신 성리학적 가치관을 체득했던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부의 극대화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를 극대화해서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우려했던 현상이었다. 14 한 연구에 따르면, 19세기의 김흥락(金興洛) 집안은 가계를 운영하면서 더 많은 농지를 경작해 재산을 증식하기보다 분수에 맞게 재산을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하려고 했다. 15 물론 그들이 유학의 가치관에 충실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부의 축적보다 부의 균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면, 빈부 차별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16
조선 사람들의 빈부 차별의식이 매우 약했던 또 다른 원인으로 신분제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빈부의 수준이 반드시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그런 현실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한다.
정선(旌善)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했으므로,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몸소 그의 집에 가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빚이 천석(千石)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 하고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보상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식구들과 상의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높고 귀하며,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늘 낮고 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한다. 또한 양반을 보면 움츠러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뜰 아래 엎드려 절해야 하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욕을 보는 신세다.(…)” 17
이 글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아무리 가난한 양반이라도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양반의 가난은 멸시보다 안타까움의 대상이었다. 반면, 양반이 아니면 아무리 재산을 많이 축적해도 사회적인 차별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 사회에서 부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즉, 빈부의 차이를 기준으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가할 만큼 주체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던 것이다. 빈자와 부자의 권력 관계가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빈부 차별이 흔하게 일어났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2) 현대인의 흥부ㆍ놀부 인식: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뒤바뀐 주인공의 위상
흥부에게 우호적이고 놀부에게 부정적이던 전통적인 시선은 20세기 전반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태준은 1933년에 간행한 『조선소설사』에서 흥부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착한 흥부의 번영과 악한 놀부의 몰락은 더욱 독자를 통쾌히 하며 경제의 충돌은 세기말적 윤리 사상을 표현한다.” 『흥부전』의 이야기 구조를 권선징악의 구도로 파악하고 흥부를 선한 인물로, 놀부를 악한 인물로 이해한 것이다. 김태준의 평가는 『흥부전』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채만식 역시 1947년에 『흥부전』을 개작하면서 놀부를 “심술이 대단히 사나운 사람”으로 규정했다. 반면 흥부는 여전히 놀부에게 쫓겨나 빈곤한 삶을 처절하게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다. 18 19
물론 김태준이나 채만식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왕산은 당시 “형제지간의 의리만 찾아 부자로 사는 형만을 의뢰하려는” 흥부를 비판했다. 흥부의 “무능 무기력한 생활 의식은 저 유교의 교리에 중독되어 생산 방면에서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흥부를 비판했다고 해서 『흥부전』의 인물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냈던 것은 아니었다. 주왕산에게 놀부는 여전히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인간 윤리를 짓밟고도 도리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수전노”에 불과했다. 부에 관한 놀부의 집착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주왕산의 견해는 적어도 이 점에서 김태준ㆍ채만식과 합치될 수 있었다. 다만 유교 혹은 봉건질서를 부정적으로 보던 그의 시각이 『흥부전』을 해석하는 데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20
흥부와 놀부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도는 1960년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동일은 1960년대 중반에 흥부와 놀부를 조선 후기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맥락에서 재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근대로 이행하던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이 『흥부전』에 반영되었다는 전제 위에서 흥부를 봉건적인 몰락 양반으로, 놀부를 천인 출신의 신흥 부자로 분석했다. 두 사람 중에서 조동일이 긍정한 쪽은 놀부였다. 그가 보기에 놀부는 “금전을 최대한 숭배하고, 재산이 무한히 확장되어 나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현실적 승리를 구가”하는 인물이었다. 반면 유교를 숭상하는 도덕군자 흥부는 놀부식 사고가 힘을 얻는 새로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다. 즉, 흥부와 놀부를 자본주의 사회라는 무대에 배치한 뒤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재해석된 놀부를 긍정한 것이다. 21
임형택은 조동일의 『흥부전』 해석을 강하게 비판했다. 『흥부전』의 본질을 “서민문학의 발랄한 민중의식”으로 이해하는 그가 보기에 조동일의 의견은 물질주의를 투영하여 작품의 본질을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임형택의 입장에 서면, 놀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는 “반도덕적” “배금주의자”다. 반면 흥부는 양심을 지키면서 부지런히 일해서 가난을 넘어서려는 당시 민중의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임형택도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을 인정하지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자본주의적 인간보다 민중이었다. 그러나 임형택의 반론이 이른바 ‘놀부 긍정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교육학자 정범모(鄭範謨)는 심지어 『흥부전』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어린이들이 흥부를 닮는 날에는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부러진 제비 다리를 붙여 부자가 되는 흥부 얘기는 제2경제정신에 위배되며 더구나 현대사회에 필요한 기업가정신 계발에는 암이 된다.” 22 23
정범모의 주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흥부ㆍ놀부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흥부의 출신과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가졌던 1960년대의 분위기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흥부를 단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는 흥부와 놀부의 인성을 평가하는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김광순은 이런 식의 주장을 펼쳤다. ‘놀부는 단지 장난이 짓궂은 심술쟁이였을 뿐 악행을 저지른 적은 없다. 경제적 도움을 간구하는 흥부를 내쫓은 것도 흥부의 자립정신을 일깨우는 결과를 낳았다. 상식과 달리 놀부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부지런히 부를 추구한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흥부는 자신의 가난을 운명으로 돌릴 뿐 가난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인간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제비는 불쌍히 여기면서 자신의 처자식은 가난에 허덕이게 하고, 계획도 없이 아이는 많이 낳아 생활고만 늘렸다. 그러면서도 자립할 의지는 보이지 않고 놀부에게 구걸하는 흥부는 무계획적이고 무능하며 의타적인 기생충적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4 25
또 다른 연구에서도 김광순과 비슷한 생각을 보여준다. 서대석은 “구걸 온 흥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두드려 보낸” 놀부의 태도에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해타산에 밝고 합리적인 놀부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흥부를 쫓아내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주변 없고 무능력하며 데퉁맞은 거지”인 흥부가 놀부에게 ‘구걸’하러 간 것이 잘못이었다. 서대석은 반대로 흥부에게 매우 가혹한 태도를 보인다. 그가 본 흥부는 “수준 이하의 모자라는 인물”, “후안무치의 인물”, “무능의 오기만 있는 인물”에 불과하다. 이제 흥부는 단지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결함이 있는 존재로 변화했다. 26
엄밀히 말해서 흥부의 인격을 문제 삼는 연구들이 합리적으로 논지를 전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흥부의 노력을 외면하는가 하면, 흥부를 “수준 이하의 모자라는 인물”로 폄훼하면서도 수긍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들은 당시에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의 정서와 어느 정도 호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교수는 신문지면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부모상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흥부는 착한데 가난하고 놀부는 부자다. 착한 일을 한 흥부는 복을 받아 부자가 된다’는 얘기는 돈을 처리할 방도도 모르는 벼락부자가 된다는 식의 얘기로 부(富)에 대한 정당한 관념을 심어주기 어렵다.” 또 어떤 아동문학가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흥부의 성격을 노력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바꾸는” 재창작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7 28
결론적으로 1960~70년대에 확산된 ‘놀부 긍정론’은 흥부 차별을 바탕으로 성립한 설명이었다. 놀부를 진취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흥부를 수준 이하의 기생충적 인간으로 보는 시선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근면(勤勉)과 자조(自助)를 강조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개인의 경제적인 빈곤을 그의 능력ㆍ도덕성ㆍ인격 등의 요소와 긴밀하게 결합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다는 데 있었다. 흥부ㆍ놀부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그러한 빈부 차별의 양상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흥부전』을 분석한 연구들은 오히려 『흥부전』이 창작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빈부 차별의식을 보여준다. 가난에 대한 차별의식이 심지어 인문학에서조차 의심 없이 표현되던 상황이야말로 한국 빈부 차별의 현실이었다.
▲현대의 빈부 차별을 풍자하는 폴란드의 일러스트레이터 파웰 쿠친스키의 그림
4. 맺음말
지금까지 『흥부전』 안에 빈부 현실과 차별의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한국 사회가 작품 속의 빈부격차와 차별을 어떻게 읽어 왔는지를 검토했다. 『흥부전』이 창작되던 조선 후기에도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경제적 위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때때로 빈부의 격차는 원초적인 혹은 간접적인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을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과 결합하는 경우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가난을 이유로 가해지는 폭력도 오늘날처럼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빈곤을 마주해야 했던 조선 후기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흥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의 가난을 안타까워했다. 반면, 탐욕스럽고 인색한 부자 놀부는 응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가난한 자를 동정하고 부자의 탐욕을 미워하는 태도는 조선 후기 현실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는 가난 자체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했을지언정 빈부 차별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흥부와 놀부의 빈부격차를 심각하게 차별하는 시선은 1960~70년대 국문학자들의 논문에서 훨씬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흥부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몰락 양반으로, 놀부는 진취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신흥 부자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흥부는 무계획적이고 무능하며 의타적인 기생충적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놀부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부지런히 부를 추구한 합리적인 경제인의 표본이었다. 흥부는 이제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단죄의 대상이었다. 이런 식의 논리는 당시 상당히 설득력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부의 모습이 어린이들의 경제 관념에 악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던 한 교육학자는 교과서에서 『흥부전』을 추방하려 했다. 바람직한 부모상을 고민하던 한 교수는 자식을 흥부처럼은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심지어 아동문학가의 눈에도 흥부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일 뿐이었다. 가난을 개인의 삶의 태도나 능력과 연결하는 직접적인 차별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근면(勤勉)과 자조(自助)를 강조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찾아볼 수 없었던 빈부 차별이 1960~70년대에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알랭 드 보통은 이 질문에 유용한 단서를 준다.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부의 절대적인 규모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빈부를 해석해내는 방식이다. 다음의 인터뷰는 현대 한국 사회가 가난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9
“재산 많은 건 나의 자랑이다. 열심히 노력해 정당히 번 청부(淸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가? 난 정치인들이 재산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도울 형편도 못되는 이들이 누굴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부자가 욕을 먹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그만큼 부패하고 폐쇄적이란 뜻이다. 난 가난하게 태어나 형편없는 야간상고를 나왔어도 꿈을 갖고 노력하면 돈도 벌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30
필자는 이 인터뷰를 이렇게 읽는다. ‘재산은 곧 능력과 근면의 상징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정당하게 부를 얻었기 때문에 재산 많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재산이 없는 것을 강조하며 청렴하고 검소하다고 자부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무능력의 상징이다. 자기 삶을 유지할 만큼의 능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가?’ 이런 능력주의적인 시선에서 보면 빈부는 곧 개인의 능력과 부지런함을 판단하는 척도다.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서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어야 마땅했다. 이런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가치관은 2000년대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1
물론 빈부 차별의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갈 수 있었던 데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평등주의적 사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사람은 신분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 가지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곧 빈부 차별의 일상화를 초래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 「한기총 부회장 “가난한 집 아이들 불국사로 수학여행 가지…”」, 『한겨레』, 2014.05.23. [본문으로]
- 이 발언들은 한 언론사가 보도한 인터뷰에서 인용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선별적 아동복지'의 역설」, JTBC, 2019.06.05. [본문으로]
- 빈부의 문제에서 『흥부전』을 분석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권순긍, 2010, 「<흥부전> 의 현대적 수용」, 『판소리연구』 29; 김광순, 1973, 「흥부전의 주인공에 관한 인성 분석」, 『潽溪金思燁博士頌壽記念論叢』; 서대석, 1975, 「興夫傳의 民譚的 考察」, 『국어국문학』 67; 이문규, 2010, 「 <흥부전> 의 ‘가난’ 다루기」, 『고전문학과 교육』 19; 정출헌, 2003, 「탐욕이 넘쳐나는 시대에 『흥부전』 다시읽기」, 『문학과 경계』 3-2; 조동일, 1966, 「興夫傳의 兩面性」, 『계명논총』 5. [본문으로] 흥부전> 흥부전>
- 『경판 25장본』, 『장흥보전』, 『세창서관본』, 『박흥보전』처럼 텍스트화되어 전승된 작품들은 『흥부전』으로 통칭한다. ‘박타령가’, ‘박흥보가’, ‘흥보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창본 계열의 작품들은 통칭할 때는 『흥부가』로 부르기로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텍스트화된 『흥부전』 작품들은 주로 경판 계열을 계승한 ‘기록 우위 전승’이었다고 한다. 반면, 창본으로 전승된 『흥부가』의 경우 대체로 신재효본 계열로서 ‘구전 우위 전승’을 거쳤다고 한다.(정충권, 2002, 「흥보가(전)의 傳承樣相 硏究」, 『판소리연구』 13) [본문으로]
- 아래의 칼럼은 간접적인 빈부 차별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했다는 객관적인 외부 조건을 전유하여 빈부의 격차와 위계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했다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이들의 빈곤이 절박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계층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됐다. (…) 자본주의로 인해 인류가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빈부격차의 폭도 훨씬 줄어들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빈부격차에 대한 비난은 항상 자본주의를 향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빈부격차에 대한 이런 비판이 꽤 보편적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좀 잘산다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나 이런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잘살게 된 국가에서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빈부격차 비판·자본주의 결실 덕에 생긴 부산물…잘살게 된 나라일수록 '비판 목소리' 더 커져」, 『한국경제』, 2016.02.12.) [본문으로]
- 접적인 빈부 차별의 예시로는 이런 사례를 들 수 있다. 어떤 아파트는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투기한 일부 주민을 비판하며 이런 공고문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파트에 거주하신다는 분들이 인근 빌라에서 사는 분들과 뭐가 다릅니까?” (「'빌거'에 받은 충격, '휴거'에 한 번 더」, 『오마이뉴스』 2018.11.22.) 이것은 단지 빌라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형태나 집값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빌라 거주민의 인격까지 문제 삼은 것이다. ‘휴거’나 ‘빌거’ 같은 표현 역시 단순히 거주지만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거주지를 매개로 거주민의 인격을 문제 삼는 것이다. [본문으로]
- 유만주, 김하라 편역, 2015, 『일기를 쓰다 2』, 돌베개, 52~54면. [본문으로]
- 『승정원일기』 정조 6년(1782) 3월 8일. “上曰, 都下聞多流丐之民云. 是果從何處上來乎? 民始曰, 聞是淮陽ㆍ金城之民云矣. 上曰, 東民之失所顚連, 極爲矜悶.” [본문으로]
-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70년대에 흥부를 비난하는 연구 중에는 실제로 『신재효본』을 검토 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신재효본』의 내용이 흥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 것이다. 서대석의 연구가 바로 위의 인용문을 활용하여 흥부를 “수준 이하의 인간”으로 규정한 대표적인 사례다. (서대석, 1975, 「興夫傳의 民譚的 考察」, 『국어국문학』 67) 그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신재효본』을 단순히 특수한 사례로 취급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자체를 충분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 놀부에게 가서 돈이든 양식이든 얻어오라는 아내의 말에 흥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형님댁에 건너가서 애절히 사정하여 돈이 되나 쌀이 되나 주시면 좋거니와, 어려운 그 성정에 만일 안 주시고, 호령만 하시면 근래 같은 세상인심에 형님 실덕이 될 터이니, 아니 가는 편이 옳으이.” 적지 않은 연구들이 ‘형님 실덕’을 걱정하는 흥부의 모습에서 ‘무기력한 양반의 모습’을 읽어내곤 했다. 그러나 ‘형님 실덕’은 단지 구실에 불과하다. 흥부가 주저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어차피 잘되지 않으리라는 비관이었다. 놀부의 집으로 가는 흥부가 “아무리 생각해도 되리란 말이 안 나온다”며 “모진 목숨 죽지 않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라고 한탄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런 비관이야말로 무기력한 경제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흥부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집안에서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보이려고 애쓰는 흥부의 태도는 그런 절망감을 달래고 싶은 왜곡된 심리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정진영, 2015, 「사족과 농민 -대립과 갈등, 그리고 상호 의존적 호혜관계-」, 『조선시대사학보』 73. [본문으로]
- 김성우, 2006, 「조선시대 농민적 세계관과 농촌사회의 운영원리」, 『경제사학』 41. [본문으로]
- 정진영, 2015, 앞의 글. [본문으로]
- 김성우, 2006, 앞의 글. [본문으로]
- 김건태, 2012, 「19세기 농민경영의 추이와 지향-경상도 안동 金溪里 의성김씨가 작인들」, 『한국문화』 57. [본문으로]
- 김건태, 2011,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 金興洛家 사례」, 『한국문화』 55. [본문으로]
- 박지원, 「양반전」, 『연암집』 (권8). [본문으로]
- 김태준, 1933, 『조선소설사』, 학예사, 136면. [본문으로]
- 권순긍,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 주왕산, 1950, 『조선 고대 소설사』, 정음사, 207면. [본문으로]
- 조동일, 1966, 「興夫傳의 兩面性」, 『계명논총』 5. [본문으로]
- 임형택, 1969, 「흥부전의 현실성에 관한 연구」, 『문화비평』 4. [본문으로]
- 「흥부전 시비」, 『경향신문』 1969.07.09. [본문으로]
- 김광순이 자신의 연구에 활용한 『세창서관본』에는 놀부의 행동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 놈의 심술을 볼진대 다른 사람은 오장육부로되 놀부는 오장칠부였다. 어찌하여 그런고 하니 심술보 하나이 더 하여 곁간 옆에 가 붙어서 심술보가 한 번만 뒤집히면 심사를 피우는데 썩 야단스럽게 피웠다. 술 잘 먹고 욕 잘 하고, 에테하고 싸움 잘 하고, 초상난 데 춤추기, 불붙는 데 부채질하기, 해산한 데 개 잡기, 장에 가면 억매(抑賣) 흥정, 우는 아니 똥 먹이기, 무죄한 뺨 치기, 빚값에 계집 뺏기, 늙은 영감 덜미 잡기, 아이 밴 계집 배차기며, 우물 밑에 똥 누어놓기, (…) 남의 양주(兩主: 부부) 잠자는 데 소리 지르기, 수절 과부 겁탈하기, (…)” 김광순은 타인에게 해를 입힌 놀부의 행동들이 이익 추구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악행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악행의 범주를 대단히 좁게 파악한 셈인데, 설득력 있는 정의라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수절 과부를 겁탈하는 행위는 이익 추구 의지와 상관없이 행위 그 자체가 악행이다. 만일 1970년대 당시 수절 과부 겁탈이 악행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탐구되어야 할 사안이다. 적어도 『흥부전』에는 놀부의 악행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수절 과부 겁탈이 언급되었으므로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 자체가 명백히 악행이었다. 설령 김광순의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빚값에 계집 뺏기” 같은 행위는 빚을 돌려받으려는 행위의 일환이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다. 따라서 김광순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 김광순, 1973, 「흥부전의 주인공에 관한 인성 분석」, 『潽溪金思燁博士頌壽記念論叢』. [본문으로]
- 서대석, 1975, 앞의 글. [본문으로]
- 「내가 바라는 ‘부모의 상’」, 『동아일보』 1977.05.02 [본문으로]
- 「어린이에게 ‘동화’를 심자」, 『경향신문』 1978.01.24. [본문으로]
-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역, 2005, 『불안』, 이레, 85면. [본문으로]
- 「[유인경이 만난 사람] 이명박 서울시장」, 『주간경향』, 2004.06.25. [본문으로]
-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역, 2005, 앞의 책, 112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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