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현실과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 왜 정약용은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를 썼을까? -
1. 프롤로그
조선 지식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18세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옥은 일상이 지루해서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이옥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에게 글은 학문을 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신변잡기는 글다운 글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정조가 이옥 같은 사람들의 글을 두고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다’며 혹평한 것도 그런 문장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지식인들이 반드시 학문과 정치만을 위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 일상을 기억하기 위해서, 혹은 자식을 훈계하거나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아니면 학문과 세상에 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 글을 썼다. 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거나 타인의 안부를 묻는 글이 학문적 사유를 정리하거나 정치적 현안을 보는 관점을 밝히는 글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이유가 달랐던 만큼 글쓰기의 의미도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양한 목적 중 하나는 ‘세상의 여러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쓴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라는 글은 그런 목적에서 작성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세상의 여러 일을 기록하려고 했을까? 그들이 기록하려고 했던 ‘세상의 여러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이 글에서는 정약용이 남긴 글을 통해 이런 질문에 답해보려고 한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조선 지식인에게 글쓰기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객관적 시선에서 전달하는 당대의 현실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는 이른바 ‘장현경 역모사건’을 이야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약용이 기록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가 사망한 직후 인동부사 이갑회(李甲會)가 자기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그 고을 사람이었던 장현경은 이갑회의 처신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임금의 장례가 치러지는 도중에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가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정조가 정적에게 독살을 당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고 믿었던 장현경은 자신이 마주한 세태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장현경에게 앙심을 품은 이갑회는 그를 상부기관에 고발했다. 죄목은 ‘반역’이었다. 장현경과 그 아버지가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처단해야 한다’며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 이갑회의 설명이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상부로부터 장현경 일가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갑회는 군사들을 풀어 장현경 일가와 그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했지만, 정작 장현경 본인을 체포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을 알아챈 장현경이 홀로 달아나 종적을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죄를 대신 짊어진 가족들은 전라도 강진의 신지도로 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현경의 아내는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유배지 생활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유배지 근처에서 근무하는 병졸은 날마다 “네가 비록 거절하지만 끈내는 내 아내가 될 것”이라며 스물두 살 된 장현경의 큰딸을 희롱했다. 끝내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바다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말리려고 쫓아갔지만, 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작은 딸에게 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관아에 고발하고 남동생을 잘 길러달라는 절실한 부탁을 남기고는 죽은 딸을 좇아 바다에 몸을 던졌다. 작은 딸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관리들은 뇌물을 주고받으며 사건을 은폐했다. 당연히 장현경의 큰딸을 죽게 만든 병졸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약용이 서술한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장현경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기보다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전해들은 사실을 서술한 것이다. 정약용이 이런 서술 전략을 택한 데는 아마 유배 생활을 하던 그의 처지가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관을 드러내기보다는 일련의 사건들을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사실을 독자에게 더 공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
3. 이야기 뒤에 숨은 화자의 목소리
정약용은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했지만, 작품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장현경 일가의 비극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견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장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전해들은 비극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보다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던 것이다. 실제로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약용이 장현경 일가와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매우 상반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정약용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자신의 시선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정약용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A] 가경 경신년(1800) 여름 우리 정조께서 돌아가셨는데 인동부사 이갑회가 공제(公除)가 끝나기도 전에 며칠 앞서 그 아버지의 회갑을 위해서 술잔치를 베풀고 기생들을 불러다놓고는 장현경 부자에게 함께 즐기자고 초청하였다.
[B] 장현경의 아버지가 초청해준 데 대해 말하기를 “공제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시고 노는 연회를 베풀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밖으로 나와 초청장을 가지고 온 首吏에게 “임금이 돌아가신 때에 이런 잔치를 베풀다니 세상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알아보고 하는 짓이라고나”라고 하였다. …… 부사는 “죄상을 성토하여 구렁텅이에 빠뜨려야겠구나”라고 말하고는 급히 감영에 달려가서 장현경이 근거 없는 이야기로 허풍을 쳐서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있다고 고발하였다. …… 그 아버지가 붙잡혔고 무턱대고 잡아들여 잡히지 않은 사람이 없이 관련자 수백 명을 체포하자 사방 고을과 마을이 모두 소란하여 모두 고개를 움츠리고 감히 밖에도 나오지 못하였다.
[C] 장현경이 끝내 도망해버리자 이에 죄를 그의 아내와 남녀 자식들에게 옮겨 강진현 신지도로 귀양을 보냈다. 기사년(1809) 가을에 이르러 그의 딸로 큰애는 22세이고, …… 하루는 진영의 병졸 아무개가 술에 취해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을 통해 엿보고는 (큰딸에게) 희롱하는 말로 비웃었다. 이때부터 계속 찾아와 희롱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D] 작은딸이 돌아와서 보장(堡將)에게 고발하니 보장이 현감에세 상신하고 현감 이건식(李健植)이 검시(檢屍)하고는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며칠이 지나자 해남 수군사 권탁(權逴)이 장계를 올려 신지도 수장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였다. 이건식이 파면당할 것을 걱정하여 이방과 상의해 돈 천 냥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보냈다. 그렇게 되자 관찰사가 검안을 현감에게 돌려보내고 파면하라는 장계를 수영으로 돌려보내니 관장도 무사하고 그 병졸에게도 또한 죄를 묻지 않고 말았다.
[A]는 국왕 정조의 국장(國葬)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기생을 불러 술자리를 열었던 당시 지방 관료의 실상을 폭로한다. 이런 행동은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유교 윤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B]는 이갑회가 군졸을 보내 장현경 가족과 그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이갑회인데도 오히려 그 잘못을 비판한 장현경이 역모로 몰리는 세태를 이야기하면서 공권력이 무분별하게 행사되던 현실을 밝힌다. [C]는 “백성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방법”[保民濟民之方]에 충실해야 할 관아의 포졸이 백성을 희롱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기이한 현실을 폭로하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다. 마지막으로 [D]는 장현경 일가의 비극이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은폐되어버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요컨대, [A]에서 [D]까지의 인용문은 모두 당시 사회에 만연하던 부정과 부패를 보여주는 장치다. 장약용은 이 장치들을 통해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세밀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마주한 세상의 모습을 독자에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정약용은 장현경 일가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드러낸다. 작품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썼다.
다음해인 경오년(1810) 7월 28일 큰 태풍이 남쪽에서 불기 시작했다. 모래가 날고 돌이 굴렀고, 바닷물이 날려 눈 덮인 산악에서 눈발 날리듯 하였다. 또 흩날린 물방울들이 공중을 타고 날다가 염우(鹽雨: 소금비)가 되어서 산꼭대기까지 내렸다. 바닷가 연변의 벼와 서속, 초목들이 모두 염분에 젖어서 선 채로 말라죽어 큰 흉년이 들었다. 나는 그때 다산에 있으면서 「염우부」를 지어서 그 사실을 기록해두었다. 또 다음해 그날에도 바람이 불어 재앙이 된 것이 지난해의 일과 비슷했다. 바닷가 마을 백성들이 ‘처녀바람’이라고 불렀다.
장현경의 처와 아내가 억울하게 죽은 이듬해부터 연달아 큰 태풍이 불어와 소금비를 뿌리는 바람에 흉년이 들었다는 내용이다. 아마 신지도에 연이어 해일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그 해일을 ‘처녀바람’이라고 불렀고, 정약용이 굳이 그 사실을 적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해일 기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섬 지역에 해일이 불어 닥치는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은 바닷가 사람들의 입을 빌려 신지도에 불어 닥친 해일을 장현경 일가의 비극과 연결 지었다. 장현경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을 정약용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장현경 일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4. 맺음말
세상의 여러 사건을 기록하려고 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어떤 일들을 왜,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 글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실마리는 정약용의 글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장현경 일가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은 굳이 그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이유는 비정상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해 당대의 세태를 최대한 공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부조리한 현실을 치밀하게 폭로하고, 당대의 부정의로부터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했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에게 글쓰기는 자신이 마주한 세상을 치밀하게 담아내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수단이었다.
정약용의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지식인들에게 글쓰기는 현실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의 일들을 기록했다고 해서 전부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세상의 일들은 부정부패로 가득한 세상을 폭로하기 위해 기록되기도 했다. 특히 정약용처럼 사회적 역할이 제한된 이들은 그 부당한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할 수단으로 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글쓰기는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 이 글은 2013년 2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교양 수업 '한국인의 삶과 문학'에서 기말 보고서로 제출한 과제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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