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의리의 갈등, 법과 윤리의 간극
20220704
1. 정경문 살해사건의 경위와 처분
황해도 해주에서 정경문鄭景文이라는 사람이 과부寡婦인 조씨趙氏와 간통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786년(정조 10) 11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사건의 전말과 결과는 『일성록』과 『심리록』, 『추관지』와 『흠흠신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 기록들을 토대로 사건의 경과와 결과를 검토할 것이다. 굳이 이 사건을 검토하려는 이유는 실행失行한 사족 여성에 대한 사건 관련자와 국가의 태도에 미묘한 차이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일단 사건의 개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경문과 밀회를 나눈 조씨는 사족 여성으로 이씨 집안에 시집갔다가 일찍 남편을 여읜 인물이었다.1)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남편의 형인 이언성李彦星의 집에서 지내다가 정경문과 사랑에 빠졌고, 몰래 도망쳐서 정경문과 평생을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 정경문도 이언성 집을 은밀히 드나들며 조씨와 사랑을 나눴다. 그러면서 그는 조씨와 도망쳐 살림을 차릴 계획으로 그 집의 가재도구를 빼돌렸는데, 결국은 솥단지를 빼내다가 집주인 이언성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2) 정경문은 이언성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이언성의 처 오 조이가 휘두른 절굿공이에 이마를 맞고는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이언성은 제수 조씨의 형제인 조명득趙命得에게 달려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와 함께 정경문의 집으로 쫓아갔다. 조명득의 부모와 처첩, 자식과 형제가 모두 그를 따랐고, 이언성의 처첩妻妾도 동행했다. 이들은 정경문 집의 대문과 담장을 부순 뒤에 집안으로 난입해 그를 결박하고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리고는 정경문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서 그를 벌거벗긴 채로 눈이 쌓인 뜰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를 구하러 온 가인家人들은 도리어 위협을 당해 물러나야 했다. 정경문은 결국 밤새 뜰에 묶여있다가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아들 정경문을 잃고 원통한 아버지 정두심鄭斗心이 관아로 달려가 고발하자 관에서는 정두심과 조명득, 이언성을 불러 공초를 받았다. 조명득과 이언성 중에서 정범正犯과 종범從犯을 가려내야 하는 관의 입장에서는 정경문을 직접 구타한 인물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했다. 조명득은 자신이 정경문을 구타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정두심과 이언성의 공초는 결코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이언성은 본인이 정경문의 집에 쳐들어갔다가 방안에서 고꾸라져 인사불성이었다고 진술했다. 정두심에 의하면, 정경문을 결박해서 구타하도록 사주한 사람은 이언성이지만 직접 그런 짓을 벌인 사람은 조명득이었다. 여기에 정경문의 시신에 대한 두 번의 검시가 이루어져 매를 맞아 죽은 것으로 판명났다. 관은 세 사람의 진술과 초ㆍ복검의 결과를 근거로 조명득을 정범正犯으로, 이언성을 간범干犯으로 판단했다.
이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이언성이 잡혀간 다음 날 그의 처 오 조이가 간수를 마시고 자결한 것이다. 이듬해(1787, 정조 11) 이언성의 첩 전 소사는 격쟁擊錚을 하며 이렇게 진술했다. “오 조이가 절굿공이로 정경문을 때린 뒤로 [처벌을 받을까봐] 겁을 먹고 자결한 것입니다. 저희 남편과 조명득은 죄가 없습니다.” 즉, 정경문을 죽게 만든 것은 이언성과 조명득이 아니라 이언성의 처 오씨라는 주장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명득도 공초 과정에서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달 17일 밤에 이언성이 와서 저를 부르며 “정경문이 너의 누이를 겁탈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뒤쫓아갔더니 이언성과 그의 처첩이 벌써 정경문과 드잡이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정경문을 결박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정경문이 이언성의 집에 갔다가 서로 싸움을 벌일 때 이언성의 처가 절굿공이로 정경문의 머리[頭顱]를 때렸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로 그를 때린 적이 없습니다.3)
이미 조사 초기부터 조명득은 정경문을 죽게 만든 책임을 이언성의 처 오 조이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오 조이가 조명득의 진술 때문에 목숨을 끊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정경문이 오 조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포석을 깔아두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 소사가 정경문을 죽게 만든 책임을 오 조이에게 떠넘긴 것도 조명득과의 상의 끝에 실행한 계책이었을 것이다. 그가 남편뿐만 아니라 조명득의 무고함까지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황해도 관찰사 김사목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명득을 정범으로, 이언성을 종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는 이렇다. ‘노쇠한 이언성은 이미 자기 집에서 정경문과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졌다. 남은 기력은 정경문의 집에 쫓아가는 동안 다 써버렸으니, 막상 정경문을 구타할 만한 힘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명득은 정경문의 상투를 풀어헤치고 결박해서 마구 폭행했을 뿐 아니라 그를 벌거벗긴 채 하루 밤낮을 눈 쌓인 마당에 방치하고 눈앞에서 그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으니 성품이 흉악함을 알 수 있다. 초검관과 복검관도 그래서 조명득을 정범으로, 이언성을 종법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 조이는 정범이 될 수 없는가? ‘남편과 싸우는 정경문에게 절굿공이를 휘두른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정경문이 오 조이의 절굿공이를 맞아서 죽을 정도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맞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인사불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문은 달아나서 멀쩡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말을 주고받는 것도 평상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오 조이가 정경문을 죽게 했다면 자식의 복수를 하려던 정두심은 왜 고발 당시에 살아있던 오 조이는 고발하지 않았는가?’ 형조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명득을 정범으로, 이언성을 종범으로 처벌하되 오 조이를 무고한 죄로 이언성에게 추가로 장을 쳐야 한다는 것이 형조의 입장이었다.
최종 판결을 내리기까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던 국왕 정조는 정작 형조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까지 그는 정경문만을 죽이고 조씨는 죽이지 않는 데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음부淫婦는 죽이지 않고 간부奸夫만을 죽였으니, 이 옥안을 본 자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며 분개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그것은 옥사를 판단하는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라면서 조명득과 이언성은 모두 용서하고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이들을 용서하며 제시한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러 사람이 한데 뒤섞여 함께 정경문을 구타해서 주범을 특정하기 쉽지 않으며, 조명득을 주범으로 특정한 정두심이나 이언성을 주범으로 가리킨 조명득의 누이는 신뢰할 만한 증인이 아니다.
② 율문에 의하면 사족 부녀가 음행을 저지르면 간부와 함께 교살한다고 하는데, 이언성 가문과 조명득 가문은 다 사족 집안이니 설령 정경문이 살았더라도 사형을 피하기 어렵다.
③ 어미와 간통한 간부를 죽인 자는 아비에 대한 의리를 지켰기 때문에 사형하지 않는데, 형수나 누이와 간통한 간부를 죽이는 경우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④ 동생을 생각하고 가문과 강상을 위해서 분노해 원한을 푼 사람을 감옥에서 죽게 놓아두는 건 도리가 아니다.
⑤ 정경문은 법으로나 인정으로나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므로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할 수 없다.
⑥ 정경문을 때려서 죽게 만든 잘못은 이언성과 조명득뿐 아니라 그들의 가솔들도 함께 저지른 것인데 굳이 이언성이나 조명득에게만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다.
⑦ 정경문을 위해 이언성이나 조명득을 처형하는 것은, 남편이 살인에 휘말려 죽게 될 것을 애통히 여겨 자결한 오 조이가 구천에서 억울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울러 정조는 남편의 일에 휘말려 죽은 오 조이에게 “조정이 풍교風敎를 세우고 습속習俗을 도탑게 하는” 차원에서 후한 은전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정조는 정경문과 사랑을 나눈 조 여인까지 용서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가 상민이거나 천민이었다면 그녀의 사랑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상인과 천인 여성의 재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사례였다. 그러나 조 여인은 사족 여성이었다는 데 사안의 심각성이 있었다. 그녀는 결국 세 차례 엄한 형벌을 받고 원악지遠惡地에서 관비로 살아가야 했다.4) 1786년 겨울에 발생한 이 비극적인 사건은 4년여 만에 결국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2. 사건을 둘러싼 입장차와 그 의미
정경문 살해사건은 워낙 극적인 사건이라 이미 대중서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이 책은 유교적 규범과 정절 관념의 강화라는 맥락에서 해당 사건에 주목했다.5) 사건의 발단이 과부 조씨와 정경문의 ‘음행淫行’이었다는 점, 최종적인 판결이 강상과 의리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다. 다만 정경문과 조 여인을 처벌하는 방식은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밀회를 저지른 정경문과 조씨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사건당사자와 국가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국가는 주로 의리와 정절이라는 차원을 중요시하면서 ‘음부’인 조 여인의 행실을 신랄하게 비난하지만, 그녀에 대한 조명득과 이언성의 태도는 매우 착잡하다. 그것은 사족 남성이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실천자들이었으면서도 현실에서 인정人情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사실 성리학의 규범을 강조하는 사족이 한편으로 인정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간의 연구들은 주로 거시적 차원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를 규명하거나 여성이 경험한 폭력과 차별을 밝히는 데 주로 천착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다.6) 아무리 성리학의 실천자라 하더라도 사족 남성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보이는 태도는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국가의 관료로서 풍속을 교화할 책임을 지는 황해도 관찰사와 누이가 범간 사건에 얽힌 조명득은 모두 사족 남성이지만 범간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사족 남성을 단일한 집단으로 전제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입장을 동일시하는 방식의 논점은 복잡다단했던 당대의 현실을 단순화할 우려가 있다.7) 따라서 조 여인과 정경문의 간통에 대한 대응을 사족 남성인 사건당사자와 국가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경문 살해사건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범간犯奸’에 대한 사족 남성의 사적 응징이 주로 ‘간부奸夫’인 정경문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족 남성인 조명득과 이언성은 그에게 극한의 폭력을 가했다. 물론 두 사람이 정경문을 가혹하게 구타한 것은 그들이 사족 과부는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정경문에게 가해진 폭력의 가혹성에 비추어보면, 과부 조씨에 대한 조명득과 이언성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조명득의 진술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언성이 와서 저를 부르더니 ‘정경문이 네 누이를 겁탈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조명득만의 주장이었다. 황해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면 이언성은 그에게 “자네 누이의 간부가 우리 집 기물을 훔쳐간다”고 말했다. 그는 제수인 조씨와 정경문의 관계를 사통私通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명득이 굳이 두 사람의 관계를 ‘겁탈’로 규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조명득은 왜 정경문이 자기 동생을 겁탈했다고 진술했을까? 일단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곧바로 정경문을 구타한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자기 가문의 도덕적 평판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충절忠節은 지역사회에서 양반가의 가격家格을 결정한 요소 중 하나였다.8) 사족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위신을 유지하는 데는 가문의 도덕적 평판이 중요했던 것이다. 조 여인의 ‘음행’은 가문의 평판에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녀와 정경문의 관계가 탄로 났을 때 조명득의 온 가족이 분개해 정경문의 집으로 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명득으로서는 “잠간潛奸”보다는 “겁탈劫奪”이 가문의 평판에 비교적 덜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만일 가문의 평판만을 고려했다면 과부 조씨는 집안 차원에서 별도의 처벌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언성과 조명득 일가의 폭력에 비참하게 죽어간 정경문과 달리 과부 조씨에게는 그런 폭력과 처벌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9) 정조가 마지막 판결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음부淫婦는 죽이지 않고 간부奸夫만을 죽였으니 이 옥안을 보는 사람이라는 누군들 분개하며 팔을 걷어붙이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과부 조씨에 대한 조명득과 이언성의 인정人情 때문이었다. 정조는 간부만 죽이고 음부를 죽이지 않는 데 의문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명득은 그래도 남매의 정에 끌렸다지만, 이언성은 또 무슨 이유로 과부인 형수가 나쁜 놈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즉시 모두 죽이지 못한 것인가?” 정조의 발언은 조명득과 이언성이 인정에 이끌려 조씨를 냉정히 처분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보면 특히 조명득이 ‘음간’을 굳이 ‘겁탈’로 재규정하려 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대전통편』은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운 사족 여성은 간부와 함께 교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만일 사족 부녀가 겁탈당한 경우라면, 피해 여성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 규정의 차이를 고려하면, 조명득은 누이인 조 여인을 구명救命해보려는 의도에서 정경문을 ‘간부’ 대신 ‘사족부녀를 겁탈한 자’[士族妻女劫奪者]라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조명득이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 사족 남성도 눈앞에 벌어진 범간犯奸 문제를 두고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범간犯奸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과 달리 국가는 사족 여성의 정절을 강조했다.10) 황해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와 형조의 회계回啓, 정조의 판부判付에는 어김없이 ‘음부淫婦’인 조씨에 대한 비난이 등장한다. 황해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에는 이런 문장이 담겼다. “음탕한 짓을 한 조 여인은 이언성에게는 제수이고 조명득에게는 여동생인데, 치마를 들추고 추행을 저질러 오랫동안 두 집안이 부끄럽고 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형조도 조씨의 음행을 “추악한 행동”[醜行]이라 규정했고, 정조는 심지어 조씨가 “짐승 같은 행실”[禽獸之行]을 저질렀다고 과격하게 비난했다. 이런 태도는 국가가 조 여인의 밀회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더구나 정경문보다는 조 여인의 음행에 비난이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국가가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정경문 살해사건 관련자들의 발언에서는 조씨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정두심과 이언성은 조 여인과 정경문의 관계를 “잠간潛奸”이라고 표현한 건 사실이다. ‘간奸’이라는 글자 자체가 이미 가치판단이 개입된 표현이므로 이미 조씨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건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들의 진술과 국가가 구사하는 레토릭의 수위는 분명히 달랐다.
물론 정경문 살해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왕 정조와 형옥刑獄의 실무를 관장하는 형조가 정절과 강상에 부여하는 중요도가 달랐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형조는 비록 정경문 살해사건의 원인이 조씨의 음행에 있다고 여겼지만, 법을 어긴 조명득과 이언성을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견해를 마지막까지 고수했다. 이런 관점은 형벌의 집행과 윤리적 교화 중에서 전자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법보다는 철저하게 의리와 강상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해당 사건을 처리했다. 정조가 보기에 법은 때에 맞게 조정할 수 있으므로 굽힐 수 있어도 윤리는 만고불변하므로 결코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관점에 서면,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어머니와 간통한 간부를 살해하는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 정당성은 단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제수나 누이의 관계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 그런 정조의 입장에서는 가문과 강상을 위해 분노한 조명득을 감옥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남편 이언성을 걱정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 조이를 열녀烈女라 규정하며 정문旌門을 세우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 조이에 대한 정조의 조치는 대신들에게조차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정절과 강상을 중시하는 국가의 입장 안에서도 정조는 특히 강경한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있다.11)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살펴보면, 간통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음행을 저지른 여성에 대한 태도에 여러 층위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든 사족이든 기본적으로 유교적 규범의 실천을 중시하고 여성의 정절을 강조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지향하는 사회를 구축해 나가려 애쓰는 동안 인정과 도덕 사이에서, 또 법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면 가부장제 사회의 성립을 성리학 확산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조선 사회의 모습은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법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훨씬 더 크다. 지금껏 ‘가부장’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해온 권력주체의 성격도 훨씬 더 복잡했으리라 생각한다.
미주
1) 『추관지』와 『흠흠신서』에는 이언성의 처 오씨와 첩 전씨를 모두 “소사召史”라고 지칭한다. ‘씨’ 호칭이 사족 여성에게만 사용되었다는 종래의 설명에 따른다면, 이언성 집안은 사족가士族家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건 처리 과정에서 형조는 정조에게 올리는 계목에서 “조 여인은 이언성에게는 한 집안의 제수가 되고 조명득에게는 출가한 누이가 되니 상천常賤과는 다릅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이언성 집안과 조명득 집안은 모두 상천과 구분되는 사족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秋官志』 卷4, 詳覆部, 審理 中, 趙命得獄案. “京文父鄭斗心招內, 矣子京文與趙命得妹爲李彦星弟嫂而寡居者潛奸, 而乃生永逃之計, 爲持來家藏, 夜入彦星家, 現捉於彦星。相與鬪鬨, 仍爲逃還, 則彦星與其妻妾及趙命得·命大趕到矣家, 彦星使命得捽曳矣子, 無數毆踢, 解䯻結縛, 倒置雪庭, 仍爲致死云。 (…) 彦星招內, 弟嫂趙女與京文潛奸, 而夜來拔鼎, 見矣身出門, 突入毆打, 仍爲逃去。”
3) 『秋官志』 卷4, 詳覆部, 審理 中, 趙命得獄案. “趙命得招內。 (…) 今月十七日夜。 彦星來呼矣身曰。 鄭京文劫奪汝妹云。 故矣身追往。 則彦星及其妻妾已與京文扶執相鬪。 故矣身結縛京文而已。 追聞京文往彦星家相鬪時。 彦星妻以杵木打京文頭顱云。 矣身實無毆打之事云。”
4) 정조가 율문에 따라 조 여인을 사형에 처하지 않은 것은 평소에 옥사를 판결하면서 ‘호생지덕好生之德’을 강조하던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정조의 옥사 판결 원칙은 심재우, 2009,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태학사, 207~232면 참조.
5) 유승희, 2008, 『미궁에 빠진 조선』, 글항아리, 204~218면.
6) 하여주는 17세기 ‘성리학의 거두’ 송시열이 가부장제를 조선에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그런 결론의 근거 중 하나는 송시열이 외가 식구나 사위, 외손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었다. (하여주, 2011, 「17세기 송시열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정착을 위한 노력과 좌절」, 『조선시대사학보』 79) 이런 생각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가부장은 철저하게 의리의 관점에서 부계 혈족과의 관계만 중시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족 남성들이 의리만을 중시하며 인정을 배제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서 보면 주자가 구상한 가족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송시열이 모계ㆍ처계 식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 자체가 이상할 일은 아니다.
7) 강명관은 자신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반-남성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ㆍ순손ㆍ절부ㆍ의부를 한 세트로 하는 표창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에 와서 의부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오로지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였다.” (강명관, 2007, 앞의 글.) 그렇게 보면 국가의 법은 양반-남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굳이 국가와 사족 남성의 입장을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된다.
8) 김성우, 2005,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 49.
9) 그렇다고 해서 외간남자와 간통을 저지른 조씨가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조 여인은 가문과 향촌 사람들로부터 도덕적 비난을 받는 등 사회적 불이익을 감내하며 고통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절失節 여성이 견뎌야 하는 차별과 폭력은 이미 종래의 여성사 연구들에서 충분히 밝혀진 바 있는데, 조씨 역시 당시 그런 차별과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10) 그렇지만 국가가 기본적으로 정절을 강요한 대상이 여성 전체가 아니라 사족 부녀에 국한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785년(정조 9)에 간행된 『대전통편』에는 “사족士族 부녀자가 멋대로 음탕한 욕구를 채워 풍속과 교화를 문란하게 한 경우에는 간부姦夫와 함께 교형에 처한다”고 규정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길바닥을 떠돌며 구걸을 하면서 남에게 몸을 의탁한 경우에는 상천常賤과 다를 것이 없어 사족士族으로 논할 수 없으니 간부姦夫와 함께 추문推問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존재했다. 정조가 조 여인의 간통을 문제 삼은 것도 그녀가 사족 부녀였기 때문이다. “저 조가趙家와 이가李家는 다들 상민常民이나 천인賤人이 아니다”라는 정조의 발언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있다.
11) 정조의 강경한 태도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정조는 평소에 사대부의 습속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스스로 풍속을 교화하는 주체가 되려 했다고 한다. (백민정, 2010, 「정조의 사대부 인식과 정치철학적 입장 연구」, 『한국실학연구』 20) 아울러 정조는 군신의 의리를 부부의 의리와 유비하며 군신 간의 분의를 매우 엄격히 구분하려 했다고 한다. (윤정, 2007, 『18세기 국왕의 文治사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67~276면.) 정조가 유독 강경하게 강상과 의리를 강조한 데는 이런 정치적 입장이 큰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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