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2019.12.09
1.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
- 고려 말 성리학 수용은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수용과정에 관해 많은 논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랜 연구에 비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에 있지만, 여말선초 성리학을 보는 연구자들의 기존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 저자는 기존의 연구 시각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②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의 정치적 분기를 학문적ㆍ사상적 분기로까지 확대하여 설명하면서 정치세력 간의 사상을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시각으로는 여말선초 성리학의 계기적 발전이나 전후 시기와의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가 연속성의 관점에서 여말선초 성리학에 관한 기존 연구를 검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고려 말 사대부의 사상적 분기 재검토
1) 고려 말 성리학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
- 고려 말의 사대부는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분기했다. 그런데 일부 여말선초 사상사 연구들은 고려 말 사대부가 분기한 원인을 사상의 차이에서 찾곤 한다. 즉, 두 세력이 수용한 성리학의 내용과 성격이 다른 탓에 서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분화했다는 것이다.
- 한영우는 14세기 전ㆍ후반의 성리학을 각각 ‘지주적 성리학’과 ‘농민적 성리학’으로 구분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농민적 성리학을 통해 고려의 중세적 질서와 불교관을 극복하고 근세적이고 성리학적인 질서를 구축하려는 개혁주의 노선이 등장했다고 한다. 한영우가 지주적 성리학과 농민적 성리학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례』에 근거한 자작농 사회 건설을 위해 성리학 이외의 사상도 탄력적으로 받아들인 점과 명분론 같은 성리학의 일부 내용을 제한한 점을 농민적 성리학의 특징으로 들었다.
- 저자는 한영우의 연구가 지닌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①정재훈은 성리학이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므로 지주적 성리학과 농민적 성리학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②‘자작농 사회 건설’이라는 측면이 성리학의 성격 규정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③정도전의 저작에 인용된 『주례』의 내용은 송대 事功學 계열의 類書에서 인용된 것이므로 그가 비성리학적 요소를 절충하거나 성리학적 요소를 제한했다고 보기 어렵다. ④『조선경국전』 「예전」의 마지막 네 항목을 冠ㆍ婚ㆍ喪ㆍ祭로 편성한 의도가 『주자가례』 시행과 관련이 있었고, 『경제문감별집』이 촉한정통론의 관점에서 『강목』의 체재를 수용했던 만큼, 정도전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제한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없다.
- 도현철은 고려 말의 사대부들이 주자학을 활용해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개혁을 구상했다고 본다. 그는 초기 사대부들이 원의 관학화한 주자학에 머물렀지만 정도전 등은 송 주자학을 직접 접하면서 주자학적 이상 정치를 고려 사회에 적용시키려 했다고 한다. 전자가 ‘구법파’라면 후자는 ‘신법파’다.
- 정재훈은 고려 말의 사대부들이 수용한 성리학에 두 계열이 있다고 파악했다. 하나가 원의 체제교학적인 성리학을 수용한 계열이라면, 다른 하나는 남송의 성리학을 직접 수용한 계열이다. 결국은 이런 학문적 차이가 현실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고려 말의 사대부를 구법파와 신법파, 혹은 원대 체제교학 계열과 남송 성리학 계열로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접근이므로 재검토가 필요하다.
2) ‘원대 체제교학 vs 남송 성리학’론 재검토
-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학이 내용에 따라 두 계열로 나뉘어 별개로 존재했다는 설명은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실증된 것이 아니라 윤남한ㆍ지부일 등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는 견해다.
- 윤남한과 지부일의 기본적인 논점은 정도전ㆍ정몽주 등 후배 사대부가 남방의 송대 성리학을, 그 이전의 사대부가 북방의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자료를 통해 실증된 견해가 아니다.
- 고려 말에 許衡의 학풍을 따르는 원대 官學이 수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남송의 성리학적 요소가 배제된 건 아니었다. 즉,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원의 관학뿐 아니라 강남의 성리학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중요한 것은 고려로 들어온 다양한 계통의 성리학이 중앙의 관학, 즉 성균관을 중심으로 수렴되었다는 사실이다. 李穡ㆍ李穀ㆍ鄭道傳ㆍ鄭夢周 등은 모두 성균관을 중심으로 교유하며 정치적ㆍ학문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서적 수입도 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요컨대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원대 관학의 성리학과 강남의 성리학으로 나뉘어 별개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계통의 성리학이 성균관으로 수렴되어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려 말의 관학에는 성리학의 여러 계통이 공존했다. 정치적 분기와 별개로 관학을 통해 성리학을 수용했던 고려 말의 사대부는 기본적으로 이처럼 다양한 학풍을 공유했다.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학이 원대 체제교학과 남송 성리학이라는 두 계통으로 나뉜다는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
3) ‘구법파 vs 신법파’론 검토
- 도현철에 따르면, 정도전은 원대 관학을 주자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변형태로 보고 주체적 의지에 따라 주자학의 본질에 가까운 송의 주자학을 받아들이려 했다. 이런 논리가 성립하려면 정도전 등 신법파 학자가 원대 관학 전반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주희 이후에 성리학사가 정리된 것은 15세기 말 이후의 일이고, 그나마도 원대의 학술사는 누락되었다. 정도전이 송원 학술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 원대 관학의 성리학이 체제순응적이었다는 견해가 근대 학문의 연구 성과임을 생각하면,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근대 학문과 똑같은 결론을 얻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조선 후기 사상계에는 허형이 주자학을 고수하여 도통을 전했다고 긍정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조선 후기에도 원 관학 주자학을 ‘변질된 주자학’으로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 정도전은 자신의 학문을 허형에서부터 이어지는 계보에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陶隱文集序」를 보면, 정도전은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허형 → 이색 → 정몽주ㆍ이숭인 등으로 이어지는 도통에 자리매김한다. 즉, 정도전 본인부터 자신의 학문이 허형으로부터 나왔음을 천명한 것이다.
- 고려 말 사대부의 사상을 구법파와 신법파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맞춰 설명하다보니 무리한 해석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다.
- ①구법파가 형세론적 화이관을, 신법파가 명분론적 화이관을 가졌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정도전은 인종이 金에 사대한 일과 원종이 원에 조회하여 화의를 맺은 일을 긍정하고 금과 원을 ‘上國’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이색의 화이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 ②구법파가 왕패겸용적 이상군주론을, 신법파가 왕도적 이상군주론을 주장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도식의 기준은 『大學衍義』와 『貞觀政要』 중 어느 책을 강조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책을 강조했느냐를 기준으로 ‘왕패겸용’과 ‘왕도’를 구분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책 안의 어떤 내용을 중요시했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기준이다. 구법파로 분류되는 이색도 국왕에게 ‘納諫’을 강조했고, 이것은 ‘왕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즉, 이색이 『정관정요』를 강조했다고 해서 곧바로 ‘왕패겸용적 이상군주론자’라고 규정할 수 없다.
- ③구법파가 恒心論을, 신법파가 恒山論을 주장했다는 설명은 사료 해독의 오류에서 비롯한다. 도현철은 이곡의 『稼亭集』에 실린 구절 “爾無恒産 因無恒心 故流徙耳”를 “너희가 항산이 없는 것은 항심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풀었지만, 이 문장은 『맹자』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 고려 말의 사대부가 정치적인 면에서 두 계열로 나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차이를 학문적 차이로까지 확대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관학으로 수렴된 성리학의 다양한 내용을 공유하는 가운데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기반 등의 차이에 따라 강조하는 내용이 달라졌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3.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 및 16세기와의 연속성
- 기존 연구들은 16세기 성리학을 ‘완성된 典型’으로 전제하면서 15세기 성리학을 평가해 왔다. 그래서 15세기 성리학을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비성리학적 요소 혹은 유학의 다양한 분파와 뒤섞인 것으로 간주했다. 저자는 그런 인식 때문에 15세기와 16세기의 성리학을 단절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 16세기를 기준으로 보면 15세기 성리학이 불완전해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기심성에 관한 고차원적 이론 탐구가 성리학에서 반드시 필수 불가결한 본질이라고 보기 어렵다. 성리학의 본질은 인간학ㆍ윤리학이고, 여말선초 성리학자는 성리학적 인간학과 윤리학의 본질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했다. 따라서 여말선초 성리학을 불완전하게 보는 시각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1) 토대와 연속: 16세기 성리학과의 관계
- 여말선초의 학자들이 성리학의 본질적 측면을 정확히 이해했음을 고려하면, 조선의 성리학 이해는 연속적ㆍ계기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의 학자들은 여말선초의 성리학 연구를 바탕으로 한층 심화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성리학 이해의 수준도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견해의 근거로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 ①15세기와 16세기에 성리학 학습과 연구의 기본 텍스트가 같다. 여말선초의 학자들이 연구한 텍스트는 四書五經의 성리학 주석서였다. 이것은 15세기와 16세기의 성리학 연구가 깊이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②15세기의 경서 구결 작업과 16세기 경서 언해 작업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이 있다. 조선에서는 15세기분터 경서 구결과 언해가 이루어졌다. 15세기에는 구결 작업을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면, 16세기에는 기존의 구결 성과를 바탕으로 언해를 추진할 수 있었다. 경서에 구결을 붙이려면 경서를 일정한 기준으로 해석해야 했으므로 경학 및 성리학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15세기에 구결 작업이 활발히 이루졌다는 사실은 당시 꽤 높은 수준의 성리학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연구의 축적 결과 16세기 이후 경서 언해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 ③15세기와 16세기에 공통적으로 『소학』이 강조되었다. 고려 말에 원으로부터 수용된 허형 학풍의 핵심은 『소학』에 기초한 일상윤리의 실천이었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은 그래서 『소학』 윤리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것은 15~16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16세기의 학자들이 15세기의 학자들보다 『소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더 깊이 이해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의 인식이 15세기와 무관하게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6세기의 학자들이 『소학』을 깊이 이해하고 소학적인 윤리를 자발적으로 실천한 것은 『소학』 학습을 중시하고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던 15세기의 연장선에서 나타난 것이다.
- ④圖說을 활용하여 성리학 이론을 정리하는 전통은 權近의 『入學圖說』에서 시작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고, 15세기 문물제도 정비에서 중시되었던 유서학은 16~17세기에도 큰 관심을 받았다. 이런 측면들도 15세기와 16세기 성리학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4. 새로운 시각의 모색: 연속과 변화의 균형적 고찰
- 조선 초기 사상사 연구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연구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존 연구에서는 여말선초 성리학의 특징을 밝히는 데 주력하여 전후 시기와의 공통점과 연속성이 고려되지 못하고 차이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차이점 이면에는 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성리학 사이의 공통적인 학문 기반이 존재했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이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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