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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by 衍坡 2018. 4. 29.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한국문화 10, 1989)




머리말


  16세기에 중앙정부로 진출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사림은 ‘修己治人’이라는 정합성을 추구하면서 학파와 정파를 등치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기존 정치세력이 완전하게 도태되었고, 사림을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었다. 광해군대에 이르면 북인을 중심으로 하여 정권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廢母殺弟’로 인해 성리학적 강상윤리를 져버림으로써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었고. 이후 서인과 남인의 연대 위에서 이루어진 인조반정을 통해 대북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정묘 ・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는데,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조선 지식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이는 조선 후기에 우선적으로 극복해야할 과제로 남았다. 저자는 호란 이후 조선의 지배층이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해 나가는 한편 성리학적 통치체제를 재정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선 지배층은 대내적으로 예치를, 대외적으로는 華夷論에 입각한 北伐論을 표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각 붕당은 당면 과제를 공유하면서도 구체적인 정책노선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에 저자는 학파=정파라는 구도 위에서 각 정파의 예론이 갖는 차이, 그로 인해 발생한 예송, 그리고 이 결과로 이루어진 정권 교체, 현실론과 이상론이라는 입장 차이에 따른 分黨을 ‘사상계의 재편’이라는 이름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하 내용은 정옥자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1. 예론의 전개


  성리학에서 이기론과 심성론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기론은 천리의 이치를 밝히는 우주론이고, 심성론은 인간의 심성을 수양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순선한 ‘성(=理)’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는 개인의 ‘修己’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개인의 義를 개인의 외부로 확장하는 문제, 즉 ‘치인(治人)’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禮論’이다. 유학에서 “예는 의의 궁극적 표현방식이며 당시 사회를 편제하고 있던 도덕규범”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예론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기론과 심성론의 발달을 전제로 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理氣論과 心性論이 발달한 16세기 이후 17세기에 예론이 발달하였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왕도정치의 구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덕치와 예치가 강조되었다. 예론은 이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었는데, 이 때문에 예론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은 이미 조선 전기부터 드러났다. 조선 전기 예제의 정비는 이미 성종대 <국조오례의>가 간행되면서 일단락되었다. <國朝五禮儀>는 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라는 五禮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주로 “삼국시대 이래 전승되어온 전래의 예의 行用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주자성리학적 禮制가 근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성세력들은 국조오례의를 통해 時王之制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무렵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주자가례>를 토대로 예론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고례의 시행을 강조하였고, 사림이 성장하면서 그 중요성 역시 증대되었다. 


  예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이기심성론이 발달한 16세기 이후, 즉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17세기 조선의 “士大夫들은 <朱子家禮>를 토대로 古禮에 부연설명을 덧붙이거나 조선의 시의성을 고려하여 시왕지제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예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 같은 기본적 흐름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예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에서 상이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동인의 경우, 대표적으로 寒岡 鄭逑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주자가례>에 관한 다양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서 <五先生禮說分類>라는 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오선생은 정이 ・ 정호 ・ 사마광 ・ 장재 ・ 주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남송 성리학의 도통에서 벗어난 사마광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구가 주자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북송 유학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은 近畿南人이었던 許穆과 尹鑴 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근기남인은 정구의 학통을 이어 주자학을 다양한 학문적 견해의 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인의 경우에는 沙溪 金長生이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는 <家禮輯覽>을 저술하였는데, 이 저술은 <주자가례>를 기본텍스트로 하되 조선의 실정과 시속(時俗)을 고려하였다. 이는 <주자가례>의 예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疑禮問解>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에는 四禮 중에서도 喪禮와 祭禮에 관한 문답을 중심으로 예의 구현 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경전에 나타나 있지 않은 변칙적인 사례”의 경우, 어떻게 예를 변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서인은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부분적으로 변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학통은 아들 김집과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장생의 <家禮輯覽>

▲김장생이 편찬한 가례집람



2. 기해예송(1659)과 갑인예송(1674)


  예송이란 즉 예론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 쟁점으로 전이되어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17세기를 주도하던 사림들 간에 예치의 구현방법을 두고 논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禮訟으로 이어져 換局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예송이 처음 이루어졌던 것은 1659년(己亥年) 효종이 사망한 직후의 일이다. 인조는 장자였던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의 자리를 장손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바로 효종인데, 정작 효종이 죽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입는 기준을 장자에 둘 것인지, 차자에 둘 것인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는 宗統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宗法질서를 정리해야하는 사림들에게는 북벌론만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인은 正體說로, 남인의 주장은 卑主二宗說로 상이하게 나타났다.


  정체설은 왕위 계승의 네 가지 경우를 말하는데 ①적장자가 있지만 (질병 등의 이유로) 왕위를 전할 수 없는 경우, ②서손에게 왕위를 전하는 경우, ③서자에게 왕위를 전하는 경우, ④적손이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서인은 효종의 경우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보았다. 장자가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어려서 죽었을 경우에만 차자를 장자로 대우할 수 있는데, 소현세자와 효종의 관계는 그와 다르므로 서자의 기준에 준하여 朞年服(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해 남인은 반발하였다. 허목은 서인이 효종을 ‘妾子’로 인식하여 기년복을 주장한다며 반발하면서 장자가 죽고 제 2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그 역시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한편 윤휴는 서인이 종통을 둘로 만들어서 왕의 권위를 낮추었다는 ‘이종비주설’을 내세우며 서인에 반발하였다. 이 때 영의정 정태화가 대명률 및 국조오례의의 ‘장자나 서자를 논하지 않고 모두 기년을 입는다’는 조항을 적용하고, 송시열이 서인의 예론서인 <喪禮備要>의 내용을 제시하여 동의함으로써 기년복을 입게 되었다.


  1674년(갑인년) 갑인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또다시 조씨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예송이 이루어졌다. 처음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던 예관이 사론의 반대에 대공으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大功(9개월)에 문제를 제기한 都信徵의 논리는, 효종이 사망했을 당시 국조오례의에 따라 장자와 차자의 구분 없이 기년을 입기로 하였다면 이번에도 기년을 입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대공으로 정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인이 서인에 대하여 대공세를 취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갑인예송의 결과가 기년설로 수렴되었으며,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저자는 두 차례 예송이 “사실상 한 사건의 연속”이었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복식문제에 불과하였지만, 실상은 예를 구현함에 있어서 어떤 기준에 따라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였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서인은 주자학을 신봉하여 ‘천하동례’를 피력하였던 반면 남인은 원시유학을 존중하여 육경을 강조하면서 ‘왕자례부동사서’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당시 학파와 정파가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예송이라는 정치적 문제는 두 정파의 학문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3. 노 ・ 소론의 분립과 환국의 성격 


  甲寅禮訟이 남인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이 이루어지면서 서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재집권한 서인은 내부의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노론과 소론이 남인에 대한 처분을 두고 이견을 보이면서 강경파가 노론으로, 온건파가 소론으로 분화되었다는 도식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종합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선 노론과 소론의 분립에는 학문적 입장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남인의 처분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송시열이었고,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은 윤증이었는데, 이 두 사람 간에는 학문적인 차이 역시 보이고 있었다. 송시열이 이이-김장생-김집의 학풍을 이어받았다면, 윤집은 성혼-윤황-윤선거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이이와 성혼은 학문적 ・ 정치적 이론을 함께하였지만, 전자가 학문적 이익에 집중하였던데 비해 후자는 실천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차이는 노론과 소론이 현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를 만들어 냈다.


  한편,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은 노론과 소론의 분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병자호란 당시 세자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이후 강화가 함락되자 함께 순절하기로 한 친구들이 순절하였으나 윤선거는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순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효보다 충의 의리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윤선거의 행동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윤선거 사후 묘갈문 작성 과정에서 윤선거의 행적에 대한 평가에서 송시열과 윤증은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내었다. 성리학적 명분을 고집하는 송시열로서는 윤선거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단지 개인적 차원의 갈등이 아니라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다. 즉, 성리학적 명분론을 고수하는 이상론과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론의 갈등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680년 경신환국이 이루어졌다. 김석주 등의 서인 척신들이 허적 등의 남인을 역모로 대거 숙청함으로써 남인이 실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 갈등이 생겨났다. 즉, 서인의 소장파는 남인의 역모가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송시열 등 노장파는 남인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 결과 노론과 소론이 분화되었고,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즉, 환국을 거치며 정계의 재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재편된 정계구조는, 18세기에 이르면 “노론과 소론은 여 ・ 야의 역할분담을 통해 영조의 탕평정국을 주도하는 주요 정파로서 기능하게 된다.”


  저자는 상호 간의 권력 투쟁이었으므로 상호공존과 견제라는 붕당정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각 붕당이 예송과 같은 이론투쟁을 통해 정권을 쟁탈하는 것이야 말로 붕당정치의 본질이며, 환국 역시 예송과 마찬가지로 붕당정치의 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환국을 붕당정치와 구분지어 이해하는 것은 붕당정치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환국을 통해 노론과 소론이 여야라는 역할을 분담하고 정권교체를 하기도 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 환국에 대한 저자의 평가이다.



결론


  저자는 조선후기 사림의 붕당정치가 학파=정파의 구조 위에서 학문적 견해의 차이가 예송이라는 정치적 논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논쟁의 결과 환국이 이루어짐으로써 붕당 간에 여-야의 역할이 등장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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