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항의 학문관ㆍ정치활동에 관한 논저 검토
-정재훈(1994)과 지두환(2009)의 연구를 중심으로-
1. 어떤 논저를 검토할 것인가?
김수항(金壽恒)은 17세기 서인-노론을 대표하던 관료였다. 그는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송과 환국에서 서인-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조선의 정국(政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대상으로 연구한 논저는 적은 편이다. 17세기 예송과 환국을 다룬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학문관, 사회경제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1
이 글에서는 정재훈(1994)과 지두환(2009)의 연구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두 연구를 검토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김수항의 정치적 입장과 학문관을 상세히 분석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항의 학문과 정치가 송시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드러냈다. 정재훈의 연구가 송시열과 김수항이 공유했던 정치적ㆍ사상적ㆍ사회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면, 지두환의 연구는 김수항의 정치활동을 인조 대부터 숙종 대까지 시대별로 분석하면서 그가 송시열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했음을 파악했다. 전자가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사상에 관한 공시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통시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연구는 김수항이라는 인물을 통해 17세기 서인-노론 계열 사이에 공유되던 정치ㆍ사회적 입장과 학문관을 밝혔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정재훈과 지두환의 연구는 모두 김수항을 다루기 때문에 논지에 공통적인 측면이 존재하지만, 그 차이점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는 두 연구를 비교함으로써 그 문제의식과 논지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단지 김수항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넘어 17세기 조선 성리학에 부여하는 의미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항의 초상화
2. 문제의식의 공통점과 차이점
정재훈과 지두환의 연구는 김수항이라는 인물을 통해 17세기 조선 성리학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두 연구 모두 김수항을 17세기 서인-노론계의 핵심인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재훈은 김수항이 노론과 소론의 분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했고, 지두환은 김수항이 조선 성리학의 입장에서 ‘자주적 개혁’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두 연구 모두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학문관을 송시열과 연결 지었다는 사실은 17세기 조선 정치사에서 김수항의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두 사람이 17세기 조선 성리학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 정재훈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흐름을 기본적으로 ‘중세사회 해체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조선 후기 역사를 중세사회의 해체기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면, 주자학은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사상으로 실학의 반대편에 놓인 사상이다. 이런 관점은 자연스럽게 주자학보다 실학을 강조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정재훈이 굳이 송시열과 김수항을 통해 서인-노론 계열의 정치적ㆍ사회적 입장과 학문관을 살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정재훈의 서술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실학파가 비판한 체제는 17세기 서인-노론계가 정계를 장악하면서 확립됐다. 따라서 중세사회 해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을 ‘절대이념’으로 신봉하던 서인-노론계가 어떻게 정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확립한 정치적ㆍ사회적 질서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정재훈에 비해 지두환은 17세기 성리학을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7세기에 조선중화사상과 진경문화가 등장했다는 관점에서 조선 성리학에 주목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김수항을 들었다. 조선중화사상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중화문명이 사라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유교문화를 향유하는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는 생각이다. 성리학에 기초한 조선중화주의는 조선의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독자적인 진경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두환이 성리학을 보는 시선은 바로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성리학은 중세사회의 해체를 위해 극복되었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17세기 조선 문화의 황금기를 가져온 사상이었다. 그가 김수항을 “조선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우암 송시열과 같이 자주적인 개혁을 주도해 나가는 정치가 사상가”로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3. 논지의 공통점과 차이점
두 논문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은 논지에서도 차이를 빚어냈다. 정재훈의 논문과 지두환의 연구는 모두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사상을 다루고 있지만, 두 논문이 강조하는 지점이 서로 다르다. 정재훈의 논문이 김수항의 학문관ㆍ정치적 입장ㆍ사회경제사상이 송시열과 공유되는 지점에 관심을 두었다면, 지두환의 연구는 김수항의 정치활동 중에서도 특히 예송에 강조점을 찍었다.
정재훈에 따르면, 송시열과 김수항의 학문관ㆍ정치사상ㆍ사회경제사상은 주자의 학설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이이학파의 학문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이황학파의 학문성과를 부분적으로 수용ㆍ보완했고, 주자를 상대화하던 남인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천하동례’(天下同禮)를 내세워 왕과 사대부의 예법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고, 존주대의(尊周大義)와 춘추의리(春秋義理)를 강조했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양란 후 사회 재건 방안을 주자의 학설에서 찾았다. 그들이 대동법과 호포법 시행을 역설했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처럼 정재훈의 연구는 특정한 사건에서 김수항의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김수항과 송시열이 공유했던 사상에 주목한다.
지두환의 연구는 김수항의 정치활동을 연대기처럼 서술하여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지 선뜻 알기 어렵다. 하지만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전후맥락을 다른 사건에 비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나, 서론에 “그동안 당쟁의 핵심이었다고 평가되던 예송이 붕당정치의 수준 높은 이념 논쟁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식민지사관의 당쟁론을 완전히 극복하게 되었다”고 한 점을 보면, 그가 김수항의 정치활동에서 특히 예송을 부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두환이 예송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는 “1ㆍ2차 예송은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실천방법으로 모색하던 성리학 이념논쟁이었지 결코 공리공담이 아니었고, 이 당시 정쟁(政爭)은 이념에 바탕한 이념 정당의 끊임없는 정책대결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수항의 정치활동에서 예송을 부각한 이유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4. 의문점 : 김수항의 독특한 요소는 무엇인가?
정재훈과 지두환의 논문에서 눈여겨볼 점은 김수항과 송시열이 거의 동일한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재훈의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수주자’(守朱子)의 관점을 내세우며 남인과 대립했고, 대동법ㆍ호포제ㆍ궁방전 개혁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송시열의 출사 기간이 길지 않은데도 그의 사상이 관철될 수 있었던 이유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된다. 서인-노론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수항이 송시열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중앙정치에 관철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재훈의 논문은 김수항과 송시열이 정치ㆍ경제적 입장을 어떻게 함께할 수 있었는지 충분히 답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재훈은 김수항과 송시열을 통해 노론학자들의 “학문과 정치, 경제사상 사이의 관련성”을 밝혔다. 그런데 주자학에 관한 송시열의 해석을 공유하더라도, 현실정치에 관한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수항과 김수흥 모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편찬에 참여할 정도로 송시열과 학문적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송시열이 양역변통론으로 제시한 호포제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김수항은 송시열과 입장을 함께 했지만, 김수흥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차이는 현실적 문제에 관한 입장이 꼭 학문적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김수항이 송시열과 사상과 현실정치라는 측면에서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그만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편, 지두환의 논문은 17세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김수항의 정치활동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수항이 철저하게 고수했던 성리학을 그저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사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당대의 맥락 속에서 성리학이 지닌 의의를 평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볼 문제도 있다. 그는 김수항이 ‘진경시대’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서 조선성리학을 통한 “자주적인 개혁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김수항과 송시열이 내세웠던 안민론은 주자학의 이념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한 것이었다. 정재훈이 지적하듯이, 여기에는 지주제를 유지하려는 사대부 계층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꼭 ‘자주적’이라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재조’의 관점으로 주자학의 봉건성ㆍ보수성을 강조하는 관점을 충분히 반박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진경문화’의 성취가 김수항의 ‘자주적 개혁’에 어떻게 수렴되었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정책과 문화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정재훈, 1994, 「17세기 후반 노론학자의 사상 : 송시열 · 김수항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3 ; 지두환, 2009, 「文谷 金壽恒의 家系과 政治的 活動」, 『한국학논총』 32 ; 오항녕, 2016, 「文谷 金壽恒과 己巳士禍」, 『한국인물사연구』 25. 다만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과 김창흡의 사상이나 安東 金門의 의리관을 다룬 연구도 있다. 이경구, 2002, 「조선후기 安東 金門의 의리 실현과 정치 활동」, 『한국문화』 30 ; 조성산, 2004, 「17세기 후반~18세기 초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의 학풍과 현실관」, 『역사와 현실』 51 ; 조성산, 2008, 「農巖 金昌協의 性理學과 經世論」, 『기전문화연구』 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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