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저 정리/조선시대사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by 衍坡 2018. 4. 19.

후마스스무,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한양대학교 초청강연 원고)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 땅을 밟은 홍대용은 1766년 2월 우연히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만나 교제했다. 엄성과 반정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절강성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필담을 주고받으며 교분을 나누었다. 자신들의 관계를 ‘천애지기’(天涯之己)라고 부를 정도였다.  


홍대용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엄성과 반정균은 조선 사절단이 머물던 숙소로 홍대용을 찾아왔다. 홍대용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엄성과 반정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온 것은 그저 천하의 뛰어난 지식인을 만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국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반정균은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주변의 조선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는 반정균의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홍대용도 반정균에게 ‘여인네처럼 울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다음날 홍대용은 엄성과 반정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식인이 교류를 통해 길을 닦고, 결점을 보충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바른 교제 방법을 모르고, 한때의 정만으로 사귄다면, 이것은 부인의 인(婦人之仁)이자, 상인의 교류입니다.” 이것은 반정균의 눈물에 대한 홍대용의 훈계였다. 그는 이별이 아쉽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인의 인’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홍대용

▲홍대용의 초상화



홍대용의 벗이었던 원중거(元重擧)도 1764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에도에 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원중거는 에도(江戶)에 머무는 동안 나카가와 텐주(中川天壽) 등 일본 지식인과 필담을 주고받았고, 1764년 3월 10일 에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통신사 일행은 시나가와(品川)를 거쳐 후지사와(藤沢)로 이동했다. 그런데 에도에서 필담을 주고받았던 나카가와 텐주는 원중거와의 이별이 아쉬워 통신사 일행을 따라나섰다. 그는 통신사를 따라 에도에서 시나가와까지, 또 시나가와에서 후지사와까지 동행을 함께했다. 원중거가 기록한 나카가와 일행의 언술에 따르면, “원래 시나가와에서 헤어지려고 했으나, 통신사가 사라져가는 서쪽을 바라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후지사와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나카가와가 원중거와의 이별을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중거와 나카가와는 후지사와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낸 뒤 마침내 이별을 고했다. 원중거는 이별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침에 헤어질 무렵, 나카가와 텐주는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일행이 가마 타는 것을 보자, 다시 오열하여 거의 대성통곡하기 직전이었다. 정에 얽매이는 것이 지나치니 이상하다.” 원중거에게는 눈물을 한가득 쏟아 감정을 표현하는 나카가와의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후마 스스무는 두 사례에서 서로 유사한 모습들을 발견했다. 중국인 반정균과 일본인 나카가와 텐주는 이별의 슬픔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조선인 홍대용과 원중거는 이별을 앞두고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었을 뿐 아니라 이별의 눈물을 낯설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그렇다면 홍대용과 반정균, 나카가와 텐주와 원중거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후마 스스무는 그 원인을 “정신적 격차”에서 찾았다. 즉, 세 나라의 사상적 풍토가 가진 차이가 감정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를 빚어냈다는 것이다. 


후마 스스무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조선이 주자학을 고수하던 나라였다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더 이상 주자학이 존경받지 못했다. 중국과 일본의 사상은 각기 양명학과 고학이 등장하여 주자학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주자학이 감정을 통제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면, 양명학과 고학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따라서 홍대용과 원중거는 개인적인 감정을 통제하는 세계에 살던 사람이었고, 반정균과 나카가와 텐주는 그것을 긍정하는 세계에 살던 사람이었다. 이별을 앞두고도 조선 사람과 중국ㆍ일본 사람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