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철, 2007,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한국사연구 138
김백철의 문제의식은 17세기의 황극론과 양역변통이 어떻게 18세기에 황극탕평론과 균역법으로 정립될 수 있었는가에서 출발한다. 명목적으로 요순의 정치로 표현되는 이상정치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탕평정치ㆍ균역법처럼 국가의 근간을 개혁하는 일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김백철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성관의 변화를 당시 정국 운영의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영조대부터 ‘민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시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1) 백성인식의 사회적 배경
김백철의 논의는 백성관 변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긴급한 과제는 양역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부세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현종대 대기근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역을 부담해야 할 양정(良丁)이 역총(役總)에 비해 적어졌던 것이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조세가 인두세에 의존하는 비중이 큰 상황에서 양인이 급감하는 현실은 조정으로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양역 문제 해결은 붕당 차원의 대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 군주의 역할이 필요했다. 숙종대 후반부터 군주가 ‘대경장’(大更張)의 구심점으로 등장했고, 실제로 이 무렵부터 양역변통논의도 심화되어 「균역절목」 제정으로 이어졌다. 숙종의 뒤를 이은 영조도 양역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균역법(均役法)은 그런 맥락에서 제정된 것이었다.
양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양역변통론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감필(減疋)ㆍ유포(遊布)ㆍ호포(戶布)ㆍ구전(口錢)ㆍ결포(結布) 등을 주목할 수 있다. 감필이 군포를 2~3필에서 2필로 하향조정하는 것이었다면, 유포는 양역 기피자에게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호포는 집집마다, 군포는 사람 수마다, 결포는 토지의 결에 따라 징세하는 방안이었다. 감필과 유포가 하민(下民), 즉 일반민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면, 호포ㆍ구전ㆍ결포는 일반민뿐 아니라 사대부까지도 포괄적으로 부역 대상으로 염두에 둔 대안이었다. 영조대 중반 이후 호포ㆍ구전ㆍ결포가 논의되었던 사실은 당대 위정자의 백성관이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백성관이 하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영조대 중반 이후로는 하민과 사대부를 포괄하는 ‘광의의 백성관’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영조는 양역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여론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 그가 활용한 방법은 민의 여론을 직접 듣는 순문(詢問)과 암행어사 파견이었다. 순문은 정책입안에, 암행어사는 정책효과를 살피는 데 활용되었다. 영조는 그 중에서 순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네 차례에 걸쳐 양역 문제에 관한 민의 의견을 들었다. 그는 1차와 2차 순문(1750)에서 호포의 가부를, 3차 순문(1751)에서는 결전에 대한 의견을, 4차 순문(1775)에서는 양역의 폐단을 물었다. 이 중에서 1~3차 순문은 균역법의 골자가 마련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1차 순문이 국왕이 전면적 개혁의 일환으로 호포제를 시도하는 계기였다면, 2차 순문은 사족(士族)의 반론으로 호포제가 무산되고 타협안으로 감필론이 결정되는 계기였다. 3차 순문은 분정(分定)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결미제를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조는 순문 과정에서 사족과 양민을 두루 만났다. 양자의 이해를 고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족과 양민이 모두 백성의 범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순문이 위민 차원의 일방적인 시혜는 아니었던 것이다.
2차 순문을 계기로 감필론이 채택되면서 부족한 세입을 충당할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 대안으로 어염(漁鹽)ㆍ군관포(軍官布)ㆍ분정(分定)ㆍ결미(結米) 등이 거론되었다. 이 대안들은 모두 다른 계층의 부분적인 희생을 필요로 했다. 군관포는 양인 중 부유층을 중인계층으로 포용하는 대가로 거두어들였다. 어염세는 왕실의 희생을 요구했고, 분정(分定)은 지방재정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사족도 토지에 대한 징수에 동의함으로써 희생에 동참했다.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는 경우 주요 수취대상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결미제 채택은 가장 마지막으로 사족의 양보를 얻어낸 것이었다. 이처럼 사회각층의 양보를 통해 시행된 균역법은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 각층이 ‘소민의 생활안정 없이는 국가의 존망이 불투명하다’는 전제에 합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2) 백성관의 변화구도
양역변통논의가 균역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분석한 김백철은 영조대 정치운영론으로서의 황극탕평론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숙종대 후반부터 삼대(三代)의 정치, 즉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제시되었다. 이때 ‘황극’(皇極)은 『서경』(書經)에 제시된 개념이다. ‘황’(皇)이라는 글자를 두고 한나라 공안국은 ‘큰 것’으로, 당나라 공영달은 ‘지극히 크고 중정(中正)한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던 것이 주희대에 이르러 ‘임금’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황극이 ‘임금의 표준’으로 풀이된 것이다. 박세채는 주희의 해석에 근거하여 군주 우위의 정국운영론을 제시했는데, 이후 소론계 정치노선도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중심의 정치운영론이 백성관 변화나 민국과의 관계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텍스트가 『주례』(周禮)다. 『주례』는 인조대 이래로 정국운영론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텍스트에 등장하는 ‘민극’(民極)이라는 표현을 『서경』의 황극과 결합하여 해석했다. 황극과 민극은 하나의 맥락에서 풀이됨으로써 ‘임금이 표준을 세우면, 백성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해석되었다. 군주가 표준을 세우면 백성이 그 표준을 받아들여 자신의 자리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군주의 권위와 민의 권익이 궤를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황극탕평론에 기초한 자신의 탕평정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민국’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황극의 핵심이 민국에 있다고 본 것으로, 황극과 민극을 하나의 맥락에서 풀이한 해석과 인식을 같이 한다. 따라서 황극탕평론은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나가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유가(儒家)에서 제시했던 기존의 표현들이 집대성되고 재해석되었다. 그 결과 백성이 임금의 하늘로 재해석되었고, 백성은 임금의 동포로 인식되었으며, 임금과 백성은 부자(父子)의 관계로 설정되었고, 백성은 국왕의 적자(赤子)이자 조종(祖宗)의 백성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양역변통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는데,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조는 균역법 시행의지를 강력하게 밝히면서 그 명분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숙종의 유지 계승, 유학적 이상사회 구현, 국가 존망이 달린 문제 해결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세 번째 명분은 영조가 백성과 국가를 공동운명체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인식은 신료들에게도 공유되었다. 그 이유는 양역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종국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균역법이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중대한 정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렵 민생 안정을 최우선의 과제로 인식한 것은 단지 애민주의나 재정문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당대의 현실을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백성과 국가 간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생 안정이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이미 17세기 양역변통논의에 전제되었다. 균역법도 그런 전제 위에서 시행된 정책이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민’(民)과 ‘국’(國)이 병칭되는 사례가 급증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18세기 양역변통 역시 민국에서 당위성을 찾았는데, ‘민’과 ‘국’이 습관적으로 병칭(竝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백성의 부[民富]와 국가의 부[國富]가 일체로 간주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재정문제가 백성과 국가가 운명공동체라는 백성관과 결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교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의 ‘재정적 측면’이 강조된 데 있었다. 국가와 백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는 민생 안정 여부가 국가 존망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전제되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민생 안정이 국가 보전에 필수적 요소로 전제되었고, 재정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민’과 ‘국’이 병칭되었다.
그런데 백성의 부와 국가의 부를 동일하게 보던 시선은 백성의 부와 임금의 부[君富]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었다. 임금과 백성 사이, 나라와 백성 사이가 각각 연결되는 차원을 넘어 군주-나라-백성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임금의 표준’이 ‘백성의 표준’이 된다는 논리와 백성과 나라는 운명공동체라는 백성관이 서로 결합되면서 군주와 국가, 그리고 민이 서로 체계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민국 자체가 국정의 목표로 설정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한 세기 이상 이루어진 양역변통논의 과정에서 백성과 나라가 일체라는 백성관을 심화시켰고, 민국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수 있었다.
(3) ‘민국’ 개념의 형성과정
김백철은 마지막 작업으로 민국의 용례를 분석함으로써 ‘민’과 ‘국’이 어떻게 ‘민국’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결합되는지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백성(民)과 나라(國)가 조합된 용례는 조선 전기에도 보인다. 하지만 특별한 개념을 내포한 것은 아니었다. 두 글자에 각기 의미가 부여된 것은 선조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 민국은 단지 ‘백성과 나라’ 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의 일과 나라의 계획’(民事國計)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다. 이것은 ‘백성과 나라’보다 확장된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물론 두 용어 중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체한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함께 사용되었다. 이때 ‘민’과 ‘국’은 각각 백성ㆍ백성의 일과 국가ㆍ국가의 일을 지칭했고, 그와 관련된 사안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민’과 ‘국’ 각각에 의미가 생기면서 ‘별도의 정치적 표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생겼다.
백성과 나라의 관계 설정도 중요한 문제였다. 백성과 나라를 적극적인 관계로 설정하려는 경향은 이미 광해군대부터 나타났다. 그 뒤로는 백성과 나라의 관계를 일체로 설정하려는 고민과 노력이 이어졌다. 효종대에는 “백성과 나라는 서로 의지하니, 본래 두 개의 몸이 아니다”라고 했고, 현종대에는 백성과 나라가 한 몸임을 전제한 뒤 양자 간에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이는 17세기부터 백성과 나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고민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백성과 나라를 언급할 때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함께’(俱), ‘양쪽’(兩), ‘서로’(相) 등을 자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백성과 나라를 일체로 연결 지어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도 지속되었다.
한편, 민국이라는 용례는 17세기 이후 정치적 개념으로 굳어졌다. 백성과 나라를 일체로 보는 인식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면서 ‘민국’이 정치적 개념을 담은 하나의 용어로 나타났다. 숙종대 이후에는 민국이 정치적 표현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백성과 나라’를 지칭하던 용어가 ‘백성의 일과 나라의 계획’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활용되고, 더 나아가 ‘국가의 급무’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다가 숙종대 이후 특정한 정치적 표현으로 정형화된 것이다. 영조가 국가적 차원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민국의 계획’이나 ‘민국의 일’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으로 활용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따라서 민국은 ‘백성과 나라’보다 훨씬 확장된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정치적 표현으로 굳어진 민국의 용례는 여러 가지 의미로 활용되었다. 당대 위정자들에게 넓은 의미의 국정지표로 활용되는가 하면, 백성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새로운 국가상을 표현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는 기준이나 사대부의 덕목으로 제시되기도 했고, 국가의 중대사를 지칭하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국왕에게 국정 그 자체로 인식되며 왕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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