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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by 衍坡 2018. 4. 19.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189집, 2006




Ⅰ. 들어가며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15세기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15세기, 특히 세종 시대의 문화가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라는 이러한 관점의 서술이 비단 국사 교과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연구들은 현재까지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세종대 과학기술과 관련한 사료에서는 조선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사료들이 등장하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그것에 주목하여 당대 조선 집권층이 조선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는 위와 같은 서술과 연구들에 대한 반론이다. 필자는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과가 사전적 의미의 ‘자주성’(“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갖는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기존의 연구에서 강조하는 ‘자주성’의 정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세종대 과학기술 발달이 ‘중국과 다른 우리 것’, ‘자주성 · 개별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과정 속에서 조선의 독자성을 고려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인식 전환의 과정을 고제 연구와 아악 정비, 천문역산학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세종

▲세종의 초상화



Ⅱ.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보기


1. ‘풍토부동’의 레토릭

  필자는 이 장에서 그간 “자주적 또는 민족적인 세종대 과학기술로 자주 거론되던” 농업 · 의학 · 문자 분야가 실제로 “중국의 보편적인 과학기술을 지양하고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1) 『농사직설』과 강남농업기술의 추구

  조선에서는 세종 이전 시기인 태종대부터 이미 중국 농서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풍토와 이에 따른 농법의 차이로 중국 농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선은 각 지역의 풍토에 맞는, 체험을 통해 검증된 농법을 보급해야만 했고, 『농사직설』의 서문은 『농사직설』이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편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자주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을 추진했던 세종대 농업정책의 방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이해되었을 소지가 크다”고 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기존의 평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필자에 따르면 『농사직설』은 연작 등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농업기술이 낙후된 지역에 보급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선진적인 농법’은 중국의 강남농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농사직설』은 중국의 강남농법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농사직설』은 하필 중국의 강남농법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필자가 언급한  “조선의 농업기술의 역사적 추이”와 관련이 있다. 이태진에 따르면 당시 강남농법은 중국에서 성리학의 성립 · 발전을 가능케 한 새로운 농업기술이었다. 따라서 성리학 사회를 이상사회로 여기고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던 신흥사대부 세력에게 강남농법은 “성리학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러한 사대부들의 농업기술의 지향이 『농사직설』에는 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태종대와 세종대까지도 이용되던 농서 『농상집요』와 『사시찬요』는 강남농법보다 낙후된 화북의 전작(田作)농법을 담고 있어서 신흥 사대부들의 농업기술 지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는 표현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조선 사대부들의 불만”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농사직설』은 “조선의 풍토에 적합한 농업기술 개발해야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래 의존하던 중국의 농서들이 시대에 뒤진, 또는 신흥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농업기술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담고 있어 차라리 비교적 조선 내에서 선진적인 농업기술이 이루어지고 있던 삼남 일부의 관행 농업기술을 채록해 활용”하자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2) 『향약집성방』과 금 · 원 의약학의 구현

  필자에 따르면 조선의 향의약학은 “『향약구급방』에서 시작하여 『향약집성방』에서 완성”되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고유의학”, “의료의 자주화”, “자주적 향의약학의 성립” 등의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입장에서는 『향약집성방』의 편찬을 자주적 의학 개혁운동의 결정판이며, 이는 ‘자주성’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평가가 일차적으로 “약재의 국산화”에 근거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조선인에게는 중국약재보다 조선약재가 더 적합하다’는 ‘신토불이’에 입각한 ‘자주적’ 향약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논문에서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여말선초의 조선 의약학의 시대적 과제가 “중국의 선진적인 의약학을 수용해 성리학적 ‘인정론(仁政論)’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질병을 구제하는 것”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노력들은 고려 후기부터 지속되어왔지만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중국 약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값비싼 중국 약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후기부터 향약서들이 지속적으로 편찬된 것은 이런 한계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 초기 의약학의 의학사적 과제는 “중국 의학사에서 한의학의 이론적 전통과 경험적 전통이 종합적으로 결합되는 획기적인 성과로 이해되는 금 · 원 의학의 수용”이었다고 한다. 세종대에 편찬된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은 이런 의학사적 과제와 연관되어 편찬된 것으로, 『의방유취』는 이론적 차원에서, 『향약집성방』은 경험적 차원에서 “금 ‧ 원 의학의 소화 ․ 정착을 이룩해낸 의서”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필자는 당시 조선의 주된 목적은 ‘신토불이’가 아닌 “중국의 선진적인 금 ․ 원의학을 완벽하게 수용해서 정착”하는 데 있었다고 보았다. 금 ․ 원 의학의 수용 ․ 정착 노력의 과정에서 중국과 조선의 차이점, 즉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3) 훈민정음 창제와 성운학

  기존의 연구에서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어제(御製)」가 세종대의 민본의식과 자주의식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였지만 필자는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먼저 그는 전근대 사회에서 문자를 향유하던 계층이 백성이 아니라 지배층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즉, 우매한 백성들은 본래 문자 생활을 향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편할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지배층이 더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는 상황에서 지배층은 어떤 불편함을 느꼈을까? 필자에 따르면 이는 “유교적 사회이념과 지식체계를 이용해 새로운 왕조의 국가체제를 안정되게 확립하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성리학의 이념에 따르면 “제왕된 자의 참된 치국의 방법은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인데, 필자는 ‘성인의 도를 밝히는 수단이 언어’라는 신숙주(申叔舟)의 입장에 주목하였고, 그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문자학과 성운학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즉, 필자의 논의에 따르면 문자학과 성운학은 치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한자를 읽고 표기하는 방식이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이 때문에 ‘성인의 도’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자학과 성운학 연구는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의 선진적인 성운학과 문자학을 수용해 발전시키려는 국가적인 차원의 거대한 학문적 프로젝트”였다고 서술하였다. 즉, 훈민정음 창제의 이면에는 성인의 도를 밝혀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2.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의 정비


  古制란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이 이상적인 사회로 여기던 중국 고대의 제도”이다. 하지만 필자에 따르면 중국 고대의 제도 뿐 아니라 ‘시왕지제(時王之制)’로 불리는 명나라 이전의 제도까지도 포함된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유교적 이상국가의 구현”을 목표로 이러한 고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세종대(특히 세종 10년 경부터 17년 경까지)에 이르러서는 집현전의 주도로 더욱 활발한 고제 연구가 이루어졌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조선에서 고제 연구의 핵심은 예악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예와 악에 대해 “질서(秩序)와 조화(調和)로 흔히 구분되어 이해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제례를 예로 들면 예는 인간과 신이 교접함에 있어서 합당한 위계질서의 형식을 말하며, 악은 인간과 신이 화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음악을 말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인간과 신이 제대로 교접할 수 있는 의식”은 이 같은 ‘고제에 따른’ 예와 악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116년(고려 예종 11)에 아악이 수입되었음에도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은 조선 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아악기를 전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임에도 중국으로부터 아악기를 구매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악의 완전한 연주는 불가능하였고, 아악에 향악을 섞어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악을 정비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시도는 1426(세종 8) 박연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필자에 따르면 이후 아악의 정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①“표준적인 음의 제정인 율관 제작과 악보의 편찬”, ②“율려의 이론서인 『율려신서』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율관 제작의 핵심적인 문제는 고제의 방법대로 자연산 검은 기장 1200개가 딱 맞게 들어가도록 만들면서 시왕지제의 황종음과 같은 음이 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에 따르면 기장의 크기가 시대 ·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고, 이에 박연은 “권도(權道)를 좇아” 고제의 방법을 포기하고 인위적으로 크기를 맞춘 인공 기장을 이용해 율관을 제작함으로써 그것의 음을 시왕지제의 황종음과 합치시키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고제에 충실한 ‘완벽한 아악’의 정비를 추구했던 세종은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비판하는 초점은 “박연의 율관 제작이 고제에 충실하지 못한 점”인데, 세종은 중국과 다른 조선의 기장과 대나무로 고제에 맞는 율관을 만들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세종은 당시 중국의 아악도 완전하지 않아 그것을 통해 고제를 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세종은 고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필자는 세종이 고제를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중국과 조선의 풍기와 성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세종이 정인지에게 문헌조사를 통해 율관을 바로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중지시키면서 “주척의 제도는 역대의 제도가 각기 다른데, 황종율관도 역시 다르다”고 말했던 사실은 그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세종은 박연의 주장을 수용하였고, “권도를 좇아 황종율관의 제작과 아악의 정비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필자는 세종이 “우리의 풍기와 성음이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중국에서 나는 기장도 제각각 달라 중국에서의 황종음도 일정치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차이점으로 인해 고제를 구현할 수 없다는 세종의 초기 인식이 “조선의 ‘지역성’을 인정하면서 중국과의 차이점을 반영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서의 고제의 구현”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4. 천문 역법 사업과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


  논문의 필자에 따르면 세종대 천문역산 사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①“역법(易法) 연구”와 ②“시제(時制)의 정비”가 그것이다. 세종은 문신들에게 “당의 선명력(宣明曆)과 원의 수시력(授時曆)을 비교 검토하도록 지시”하였는데, 필자는 세종이 서운관 관원이 아닌 문신들에게 책력을 비교 ·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은 역법 연구가 “급하게 필요했던 상황”이 아니라 고제 연구의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세종대에 역법연구가 시작된 때는 아악 정비가 마무리되는 시기(세종 12)였지만 역법연구는 진척이 없었다. 결국 세종은 천문역법 정비가 ‘산법(算法)’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산법을 익히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 결과 역법 연구는 “일월식과 절기를 계산하는 것이 중국의 역서와 조금의 차이도 없을 정도로 성과를 보았”으며(세종 14),  『칠정산내편』의 편찬(세종 24)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한편 필자의 서술에 의하면 세종대에는 시제의 정비, 즉 천문 관측을 위한 관측의기 제작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유가에서의 천문역법과 수시(授時)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각각 “역법과 의기의 제도를 창안해서 천문을 관측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천문학적 행위 뿐 아니라 “제왕된 자가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앞서서 행해야할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대에는 “이상적인 유교적 천문역법의 고제가 사라진” 상태였으며, 이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종은 천문역법 연구와 함께 시제와 관련한 여러 기구들을 제작하였다. 1432년(세종 14)경부터 시작되었는데, 간의를 비롯한 천문관측 기구와 자격루 · 앙부일구 등의 시계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간의 등의 의기는 간의대에 설치되었다. 다만 필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하면서 일성정시 제작 보고와 관련한 세종실록 기사(세종 19년 4월 15일조)가 “세종 14년 이래로 추진되어왔던 천문의기 제작의 마무리를 알리는 종합 보고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이상적 고제의 구현 노력 과정에서 나타난 현실적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필자는 이것이 “이미 율관 제작과 아악 정비 과정에서 ‘시왕지제’를 통해서 ‘고제’를 구현해야 하고, 나아가 조선의 ‘지역성’을 인정하면서 중국과의 차이점을 반영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서의 구제의 구현임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편 천문의기 제작 사업은 옥루를 제작해 흠경각에 설치하는 것(세종 20)으로서 일단락되었다. 필자는 세종이 옥루 같은 기구의 제작을 통해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았다. 필자의 논의에 의하면 그런 의도는 옥루의 형상에도 나타난다. 옥루에 표현된 “성군이 다스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회, 그리고 자연의 이치가 순리대로 구현되는 자연의 세계”는 결국 유교적 이상국가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세종이 지향하던 국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필자의 논의를 따르면 천문의기의 제작은 “천문역법의 정비를 통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요순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본받아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실천적 의미”였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천문역법과 의기 제작의 목표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Ⅲ. 맺으며


  이상에서는 문중양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세종시대 과학기술에 대해 “선진적인 중국의 과학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후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것과 다른 고유한 과학기술을 구성’”했다는 기존의 평가를 비판하였다. 오히려 중국과 다른 조선의 특수성은 “보편적이고 선진적인 중국의 것을 배워 익히려는 제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성과들”이었다는 것이다.


  평자는 이러한 필자의 논의에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농사직설』에 수록된 강남농법이 실제로 전체 신흥 사대부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농사직설』에 수록된 농법은 『농사직설』이 간행 · 배포된 이후에도 쉽게 토착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농사직설』 간행 9년 뒤에 세종이 “대개 인정(人情)이 예전 관습을 편안하게 여기고 새 법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부지런히 가르치고 일러도 준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방 사족과 지방 관리들은 『농사직설』의 농법을 보급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이는 중앙의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저술된 농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농사직설』은 신흥 사대부 전체의 농업기술 지향이 반영되었다기보다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킬 필요를 절감하고 있던 중앙의 지배층의 농업기술 지향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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