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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by 衍坡 2018. 4. 22.

강문식, 2008,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한국문화』 43




1. 서론


  16세기 이후 朱子書 選本과 그에 대한 주석서가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이는 이황의 『주자서절요』 편찬 이후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에서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주자서의 편찬은 250여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저자는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주자성리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해가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송시열의 『朱子大典箚疑』와 『節酌通編』이다. 이 저술들은 17세기 주자학을 비판하는 학문 경향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송시열이 주자학 연구에 전념한 결과물이자, 주자학 연구의 주도권이 영남학파에서 기호학파로 이전되는 변화의 첫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朱子大典箚疑』(저자의 표현에 따라 이후 『箚疑』로 표기)와 『節酌通編』의 편찬경위, 체제, 내용상 특징, 두 저술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두 저술에 담긴 송시열의 의도는 물론 두 저작의 사상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2.『朱子大典』 주석의 편찬 : 『朱子大典箚疑』


1) 편찬 경위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송시열이 『朱子大典』의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1675년 유배된 이후의 일이다. 그는 유배 초기에 『朱子大典』을 통독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나는 부분에 그 구절을 옮겨적고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붙였는데, 이것이 『箚疑』의 초고이다. 송시열은 『箚疑』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이황의 『朱子書節要』와 정경세의 『朱文酌海』를 기초로 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기존 주석서인 『朱子書節要記疑』를 중심으로, 주석서가 없던 후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을 토대로 주석 작업을 하였다. 

  송시열이 『箚疑』를 저술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문자의 차이’와 ‘주석서 부재’의 문제를 들었다. 즉, 『朱子大典』에 사용된 문자에는 송나라의 俚言이 사용된 경우가 있어 그것이 『朱子大典』의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는데, 별도의 주석서가 존재하지 않아 『朱子大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송시열의 『箚疑』를 서술하는 이유였다고 한다.

  『箚疑』의 저술은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에서 출발하였지만, 이 두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朱子大典』의 서간, 封事, 上奏文 등에 대한 주석 작업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1677년 2월 경 절반 정도 진행되면서 淨書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4월에는 정서된 『箚疑』를 여러 사람에게 보내어 교정을 부탁하였다. 이듬해인 1678년 8월에는 『箚疑』의 초고가 완성되어 역시 여러 사람에게 교정을 부탁하면서 의견을 교환했고, 이를 반영해 내용을 수정하였다. 『箚疑』의 보완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지속 되었다.

  1683년 6월에는 박세채와 김수흥이 숙종에게 『箚疑』 편찬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경연에 그 저술을 활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숙종이 이를 수용함에 따라 송시열의 교정 작업에 가속이 붙었고, 그 해 책의 일부가 숙종에게 진상되었다. 이에 따라 官 차원에서 편찬 작업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졌고, 송시열 역시 『箚疑』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령 지인들을 모아 『箚疑』의 내용을 검토하는가 하면, 김수흥에게 조선본 『朱子大典』에 오류가 많으니 중국의 『朱子大典』을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1686년 4월 『箚疑』가 거의 완성되자 김수흥은 숙종에게 간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이 때 실제로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이후에도 송시열은 『箚疑』의 교정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중 1689년 유배되면서 金昌協 등에게 완성을 부탁하였고, 송시열 사후에 權尙夏, 金昌協에 의해 마무리 ․ 간행되었다.


2) 『朱子大典箚疑』 편찬에 이용된 서적들

  『箚疑』는 “『朱子大典』의 원문 전체를 주석한 책”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朱子大典』의 구절에 대한 자구의 해석, 지명 ․ 인명 ․ 전거에 대한 내용, 구절의 문의에 대한 중국 및 조선,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붙였다.

  저자는 송시열이 이 책을 편찬하면서 참고한 저술들을 정리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송시열은 『朱子大典』 판본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그가 선조대 제작된 활자본 『朱子大典』을 기초로 주석 작업을 하였고, 이것과 별도로 최소 2종의 조선본 『朱子大典』과 1~2종의 중국본 『朱子大典』을 면밀하게 비교 ․ 검토하였음을 밝혔다. 다음으로 그가 참고한 중요한 서적은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이다. 그가 『箚疑』 편찬의 출발점으로 삼은 저서가 바로 이 두 저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朱子書節要』의 주석서인 『朱子書節要記疑』를 참고하였는데, 이는 『箚疑』의 범례와 체제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한편 송시열은 『朱子書節要』에는 없는 『朱子大典』의 내용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면서 『退溪集』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기호학파인 송시열이 적어도 朱子書 연구에 있어서는 영남학파 이황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외에도 송시열은 상당히 많은 저술들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성리서에 관해서는 유학 경전과 여타 주석서, 그리고 『朱子語類』를 참고하였다. 『箚疑』 편찬에는 역사서도 상당히 빈번하게 인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史記』, 『漢書』, 『宋史』가 있고, 사서 외에도 『莊子』 등이 참고 되었다. 또 음운과 관련하여 『韻會』가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여기에 송시열은 제자백가나 불교 서적까지 활용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들이 다양한 분야의 서적까지 섭렵하였던 송시열의 독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폭넓고 심도 있는 독서가 『箚疑』를 편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3) 『朱子大典箚疑』 편찬의 조력자들

  송시열이 『箚疑』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는데, 저자는 이를 편찬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먼저 전반기의 조력자로 저자는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 형제와 박세채를 언급하고 있다. 김수항의 경우 송시열이 『箚疑』 편찬을 구상할 때부터 조언을 그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김수항 역시 그러한 작업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 1677~1683년까지 『箚疑』의 감수 ․ 교정에 참여하였다. 김수증과 김수흥 역시 교정 ․ 감수에 참여하면서 송시열과 생각을 공유하였다. 특히 김수흥은 1683년 숙종에게 『箚疑』의 편찬 사실을 알리면서 경연에 활용할 것을 건의하고, 완성단계 이르러서는 교서관에서 간행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박세채의 경우 『箚疑』의 교정과 감수에 참여하였고, 그 가치를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송시열의 문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중 저자는 권상하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 역시 1682년부터 『箚疑』의 교정 및 감수에 참여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송시열은 학문적 ․ 정서적으로 권상하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심지어 송시열이 사망할 때, 권상하에게 『箚疑』의 완성을 유언으로 남겼고, 실제로 권상하에 의해 『箚疑』의 편찬이 마무리되었다. 이와 더불어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은 1687년경부터 『箚疑』 교정에 참여하여 권상하와 함께 『箚疑』를 완성하였다. 그는 여기에 『箚疑』를 보완하는 저술인 『朱子大典箚疑問目』을 짓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이상, 이정중, 민유중, 남구만 등이 『箚疑』의 교정 ․ 감수에 참여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箚疑』가 “송시열의 개인 저술이면서 동시에 17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서 송시열과 교유하던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주자대전차의』



3. 『朱子大典』 選本의 집대성 : 『節酌通編』


1) 편찬 경위

  저자에 따르면, 송시열은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가 『朱子大典』의 핵심을 담고 있으므로 초학자가 주자학을 공부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송시열에게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책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송시열은 두 책을 합하여 간행하고자 하였고, 이 결과 저술된 것이 『節酌通編』이다.

  저자는 앞서 살펴본 『箚疑』의 편찬이 이 책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즉 송시열의 궁극적인 목표는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를 하나로 합치고 그에 대한 주를 함께 수록하는 것이었는데, 이 사전 작업으로 주석 작업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箚疑』와 『節酌通編』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는 책이라고 보았다.

  이런 작업이 본격적으로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箚疑』가 마무리되면서부터이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송시열은 1683년 9월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에서 빠진 『朱子大典』의 주요 구절을 골라 서술하고 그에 대해 주를 붙여 『節酌通編補遺』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節酌通編』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충청관찰사였던 이단석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 책의 간행은 1686년 김수흥의 간행 건의를 숙종이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節酌通編』의 간행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책의 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①“책의 분량이 너무 방대해지는 것”, ②“『節酌通編』에 수록되지 않은 『箚疑』의 내용들은 간행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의 원문만을 합한 『節酌通編』과 주석을 수록한 『箚疑』가 별개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2) 『節酌通編』의 체제와 내용

  『節酌通編』은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를 주석의 첨가나 체제의 변형 없이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節酌通編補遺』는 그와는 별개의 도서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저자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節酌通編』은 본래 『朱子書節要』와 『朱文酌海』 두 저서와 그 주석, 그리고 두 저서에서 빠진 『朱子大典』의 내용을 수록하여 주자학을 집대성하려는 시도에서 집필되기 시작한 책이다.

  저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朱子節酌通編』을 통해 송시열이 처음 의도했던 책의 체제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節酌通編』과 『節酌通編補遺』, 그리고 주희의 글과 『箚疑』의 주석을 담고 있다고 한다. 『朱子節酌通編』의 권1~20은 『朱子書節要』, 권22~36까지는 『節酌通編』, 권37~41은 『節酌通編補遺』의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의 체재 상에 몇 가지 차이점은 보이지만, 내용면에서 『箚疑』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송시열이 처음에 의도했던 『節酌通編』은 『節酌通編』과 『箚疑』, 『節酌通編補遺』를 통합한, 즉 당시의 주자학 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작업이 “당시까지 이루어진 朱子書 選本과 『朱子大典』 주석의 결과들을 모두 종합한 『朱子大典』 학습서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3) 『節酌通編』의 활용과 후대의 평가

  저자에 따르면, 『節酌通編』은 후대에 “조선의 주자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평가되었고, 국왕의 경연에서 진강 교재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節酌通編』이 최초로 진강된 것은 1708년(숙종 34)의 일인데, 이 때 『節酌通編』을 진강 교재로 활용하는 데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고, 따라서 노론의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어가는 정국에서 『節酌通編』의 진강 역시 활성화하였다. 이에 “『節酌通編』은 소대의 주요 진강 교재로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節酌通編』이 진강 교재로 가장 많이 활용된 시기가 영조 재위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영조대 『節酌通編』 진강 기록은 61회 등장한다고 하는데, 그중 42회가 1732년(영조 8)부터 1733년(영조 9)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저자는 『節酌通編』이 영조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저서였으며, 그 때문에 영조대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았다.

  한편, 정조대에는 『節酌通編』의 진강이 이전 시기에 비해 적게 이루어졌지만, 그 저서에 대한 평가는 매우 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여러 주자서들을 검토하였는데, 그 중에서 『節酌通編』이 후학들의 공부에 가장 적절한 주자서라고 평가하였다. 즉, 『節酌通編』이 “조선 후기 주자학 연구 성과를 대표하는 저술”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4. 결론


  저자는 송시열이 17세기 주자학을 비판하는 학풍을 바로잡고 주자학의 위상을 확고하게 하고자 『箚疑』와 『節酌通編』을 간행하였다고 보았다. 즉, 송시열은 『朱子大典』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잘못된’ 학풍이 바로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에 일조하기 위해 『箚疑』와 『節酌通編』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이 두 저술이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 학계에서 이루어진 주자서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여기에 송시열 자신의 주자학 연구 상과를 더하여 확대 ․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여 『箚疑』와 『節酌通編』이 조선 사상사에서 갖는 의의와 위상을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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