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희, 「조선 사회의 유교화와 여성의 위상 –15ㆍ16세기 족보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48, 2011)
정리일자: 2019.05.29
1. 머리말
- 저자는 15~16세기 족보를 통해 조선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검토하려고 한다.
- 조선 사회의 유교화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매우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2. 족보와 사회사
(1) 자료로서의 족보
- 한 씨족 시조 이하의 모든 구성원을 수록하는 형태의 족보가 나타난 시점은 15세기 이후기는 하지만, 15~16세기에도 족보 간행이 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 왕조 교체로 인한 정치적ㆍ사회적 혼란은 조선 초기에 족보 간행이 활발하지 못했던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5~16세기의 족보 편찬은 중앙정계에서 활동한 인물을 배출한 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조선의 유교화가 진전되면서 족보 간행이 급격히 늘어났고, 그중에는 족보를 미화하거나 조작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15~16세기의 족보는 신뢰할 만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2) 15~16세기 족보
- 『安東權氏成化譜』(1476), 『文化柳氏嘉靖譜』(1565), 『江陵金氏乙丑譜』(1565), 『綾城具氏乙亥譜』(1575), 『眞城李氏庚子譜』(1600)
3. 유교화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1) 족보와 여성
-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에는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족보에 기재했다. 고려 시대 풍속의 영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산 상속과 제사 문제에서도 아들과 딸의 지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여성의 지위는 유교 윤리가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조선 후기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 『안동권씨성화보』와 『문화유씨가정보』에는 여성이 재가한 사례가 기재됐다. 그것은 재혼이 자유로웠던 고려 시대의 관습이 조선 전기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유교화가 진전되면서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고 재가한 여성의 자식에게 제도적ㆍ사회적 차별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17세기 이후에는 재가 금지가 상민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수절이 일반화했고, 국가도 열녀를 표창하면서 수절을 권장했다.
-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친손과 외손을 모두 족보에 기재하여 내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때 외손을 족보에 기재하는 기준은 자기 딸의 소생인지 여부에 달렸다. 다만 『강릉김씨을축보』에는 외손은 기록하지 않고 친손만 기록했는데, 이것은 족보의 양식이 16세기부터 점차 부계 혈통 중심으로 변화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17세기 이후에는 종법의 확산과 함께 동성동족(同姓同族)의식이 강해지면서 외손이 족보에서 배제되었다.
- 양자제도는 부계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다. 『안동권씨성화보』에서는 양자를 들인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90년 뒤에 간행된 『문화유씨가정보』에는 양자를 들인 사례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극히 적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입양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려 시대의 관습이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반면 조선 후기에는 친족 가운데 양자를 받아들였다. 문중(門中)ㆍ종중(宗中) 등 부계 혈연 집단이 형성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2) 혼인과 제사
- 조선 전기부터 국가는 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친영례(親迎禮)를 정착시키려고 했지만, 여전히 남자가 처가에 장가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후기에야 유교적인 혼례방식이 사회에 정착되면서 반친영(半親迎)이 이루어졌다.
- 분재기(分財記) 등의 고문서나 법전을 보면 재산 상속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아들과 딸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했고, 여자도 남편의 재산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재산을 소유했다.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남자와 여자의 위상이 다르지 않았다. 아들과 딸이 몇 해씩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일반적이었고, 외손도 제사를 모실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 부모 봉양과 제사는 오롯이 장자(長子)의 몫이 되었고, 재산 상속도 장자 중심의 차등적인 상속으로 변화했다.
4. 맺음말
- 조선사회의 유교화가 진전되면서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다.
- 17세기 이후에 주자학적 예법이 정착되고 종법적 종족질서가 확산하면서 조선사회는 부계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화했고, 수절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추세와 여성의 재가 금지는 서로 짝을 이루면서 여성을 법적ㆍ사회적ㆍ심리적으로 제재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 단상
- 이 글은 조선 여성의 지위 변화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의 틀을 가장 집약적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전체적인 논점은 고려 시대의 남녀는 비교적 평등했으나 조선 시대에 유학(주자학)이 정착되어 가면서 여성의 지위가 하락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유교(주자학)=가부장제’라는 전제에 의존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 후기의 유교적(주자학적) 종족질서를 가부장제의 전형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유교(주자학)은 가부장제보다 더 큰 범주이므로 두 개념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조선 후기의 종족질서는 그 나름의 시간적ㆍ공간적 조건 속에서 구현된 것이므로 그것을 꼭 가부장제의 전형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유교(주자학)이 보급되어 부계 중심의 가족질서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하면, 주자학의 예법과 가족질서를 재해석하고 수용한 역사행위자가 어떤 현실적 조건을 마주했는지, 그들이 의도했던 효과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 정작 저자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안들이지만, 나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점들이 궁금해진다. 조선 전기부터 국가가 권장했던 친영은 왜 온전히 구현되지 못하고 ‘반친영’의 형태로 정착됐을까? 17세기 이후부터 부계 중심의 종족질서가 확립되어 갔다면 여전히 모친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적서를 차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의식한다면, 정말로 조선이 부계 중심의 종족질서를 완벽하게 구현한 사회일까? 나름의 시간적ㆍ공간적 조건에 따라 일정 부분 타협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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