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호, 1999,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2019.07.23
1. 머리말
- 선행연구는 고려시대의 천하관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했다. 신채호는 ‘묘청란’을 화풍파와 국풍파의 대립으로 파악했다. 구선우의 연구는 두 세력의 사상적 기반을 단지 유교와 비유교로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고려시대 천하관을 화풍파와 국풍파로 구분하는 관점은 남아있었다.
- 환구사와 팔관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고려가 중화제국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율적ㆍ자존적인 다원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구사와 팔관회를 제정하고 시행했던 세력의 천하관이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한 가지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 이른바 ‘국풍파’로 분류된 이들 중에서도 서로 다른 천하관이 존재했고, ‘유학자’로 구분된 이들 안에서도 中華나 事大에 관해 여러 관점이 있었다.
- 고려시대 천하관은 고려 군주의 天子ㆍ皇帝 위호 사용에 관한 입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고려시대 천하관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①고려 군주가 천자라는 입장, ②유교적 명분론과 현실적 이유를 들며 고려 군주가 천자를 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③다른 중원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독자적 천하를 가진 천자국이라는 입장이다.
- 저자는 고려 군주를 천자나 황제로 일컫는 사례를 검토하고 그것이 당시 천하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아울러 세 천하관의 내용과 사상적 경향을 확인하면서 다원적 천하관의 실체를 규명하려 한다.
2. 해동천자와 그 천하
- 고려 가요 중 하나인 ‘風入松’에는 고려 군주를 ‘해동천자’로 지칭한다. ‘해동천자’라는 표현이 고려 군주가 아닌 帝佛을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른 자료에서도 고려 군주를 천자나 황제로 칭하는 사례가 많다.
- 고려에서 천자 위호가 사용된 시점은 태조 때부터다. 신라 敬順王이 고려로 귀부하며 지어올린 글에서 고려 태조를 ‘天子’라 지칭했다. 崔遠은 후백제 평정을 축하하며 황제에게 올리는 글인 ‘表’를 올렸다. 뒤에 尹彦頤가 稱帝建元을 주장하며 태조ㆍ광종의 칭제건원을 근거로 내세우기도 했다.
- 천자 위호 사용은 대체로 고려 중기까지 이어졌다. 광종 때는 개경을 皇都라 칭했고, 최승로는 성종 대에 고려 군주의 가계를 皇家라고 표현했다. 고려 전기ㆍ중기에 작성된 公的ㆍ私的인 문서에서도 고려 군주를 天子ㆍ皇帝ㆍ陛下ㆍ聖上 등으로 표현한 사례가 다수 보인다. 여러 설화나 도참서 등에서도 고려를 중심국으로 설정하는 천하관을 보여준다.
- 고려는 국내는 물론 여진 등 자국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까지를 하나의 독자적인 천하로 상정하고 천자ㆍ황제를 칭했다. 본래 ‘천자’와 ‘황제’라는 칭호는 기원과 사용처가 서로 달랐지만, 고려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두 칭호를 혼용했다. 천자ㆍ황제 위호는 “대내적으로는 제후들의 위에 있는 최고의 군주”를 의미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천명을 받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국가의 지배자”를 의미했다.
- 고려가 천자국으로 중심 역할을 하는 천하는 좁게는 삼한으로,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범위로 설정되기도 했다. 풍입송에서는 고려 중심의 천하에 속하는 지역을 ‘外國’과 ‘蠻狄’으로 구분해서 표현했다. ‘외국’이 고려와 대등하거나 상위의 집단이라면, ‘만적’은 고려보다 하위의 집단이다.
- 고려는 독자적 천하를 설정하고 천자ㆍ황제를 칭했지만, 宋ㆍ遼 등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실리를 얻기 위해 王을 칭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外王內帝를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송과 요는 고려가 내부적으로 천자ㆍ황제를 칭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묵인했다. 고려의 칭제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타협을 했던 것이다.
- 고려 전ㆍ중기에 내부적으로는 王의 위호와 황제의 위호를 혼용했다. 천하관과 관련이 있는 군주 위호를 두고 다양한 입장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3. 천하관의 갈래와 다원적 천하관
(1) 자국중심 천하관
- 자국중심 천하관은 자신의 나라를 온 천하의 중심국으로 보는 입장, 또는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 자국 중심의 천하관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오랜 관념이다. 東明神話와 牟頭婁墓誌는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국으로 설정하는 ‘전형적인 자국중심 천하관’을 반영한다. 단군신화나 백제ㆍ신라ㆍ가야의 건국 신화에도 토속신앙을 이용해 자국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관념이 들어있다.
- 고대부터 존재하던 자국중심 천하관은 고려시대에도 남아있었다. 妙淸ㆍ鄭知常 일파는 고려의 자국중심 천하관을 대표한다. 그들은 ‘大華勢’의 땅(서경 임원역)이 있는 고려의 강역을 신성한 곳으로 간주했고, 그곳으로 천도하면 고려가 천하의 중심국으로서 온 천하에 군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고려가 대내외적으로 황제국임을 천명하고 金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자국중심 천하관이 반영한다.
- 김위제 역시 자국중심 천하관을 보여준다. 그는 고려의 신성한 地德을 강조하면서 도참설을 내세워 南京 천도를 주장했다. 공민왕 대의 승려 普愚도 한양 천도를 주장하며 유사한 주장을 했다. 묘청과 김위제가 도참설을 주장하며 내세운 근거가 道詵이었음을 생각하면 고려가 온 천하를 지배한다는 관념은 이미 국초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 고대부터 존재하여 고려까지 이어진 자국중심 천하관에는 토속신앙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토속신인 八聖에 도교와 불교의 외피를 씌운 묘청은 팔성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신이라고 강조하며 고려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천하관은 고대의 자국중심 천하관이 변형된 형태였다.
(2) 화이론적 천하관
- 華夷論的 천하관은 신라 하대의 도당유학생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중화문화를 선진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토속문화는 낙후한 것으로 간주하고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고려 초기 지배층 가운데 일부는 화이론적 천하관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화이론자로는 최승로를 비롯한 6두품 출신 지식인과 고려 성종, 김부식과 김부의 등이 있다. 하지만 화이론자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소수에 불과했다.
- 화이론적 천하관은 고려를 中華의 변두리에 위치한 ‘夷’로 간주하여 중국에 대한 명분론적 事大를 주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국 문화는 선진 문화로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토속 문화는 비루한 구습으로서 반드시 혁파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 최승로의 개혁안은 중국 문화를 토속 문화보다 우위에 두는 화이론적 천하관의 한 사례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중국을 ‘天上’으로 표현했지만, 고려는 ‘동쪽 변방’으로 표현했다. 최승로를 비롯한 화이론자가 정치적 주도권을 쥐었던 성종 대에는 국가 제도를 모두 제후국의 기준에 걸맞게 정비했고, 황제 위호 사용도 폐지했다. 전통적인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도 폐지되었다. 그 대신 제천의례인 圜丘祀가 존재했지만, 그 내용은 천자국의 제도보다 격이 낮았다.
- 고려 중기에 활동했던 김부식은 중국의 천자를 떠받들면서도 고려 군주에게는 天子나 皇帝라는 위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인종 재위 후반에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권력을 쥐었는데, 이때에는 천자ㆍ황제 위호 사용이 아예 금지되었다. 그것은 외압이라기보다 자발적으로 화이론적 천하관의 명분론을 따른 결과였다.
- 화이론자는 小國인 고려가 사대질서에 따라 강대국에 사대를 하며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이들은 중화에 치우쳐 북방 이민족의 강력한 군사력이 지닌 잠재적 위협을 무시했다. 만일 북방 이민족이 왕조를 세우고 위협을 가해오면 아무런 외교적 대응도 없이 서둘러 사대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權道’라고 합리화했다.
(3) 다원적 천하관
- 일원적 천하관을 전제하는 자국중심적ㆍ화이론적 천하관과 달리, 다원적 천하관은 여러 개의 소천하가 병존하고 고려의 천자가 송ㆍ요ㆍ금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그 중 하나의 소천하를 지배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원척 천하관 계열의 인물들은 “자주적인 관점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강대 세력에 대처”했다.
- 다원적 천하관에서는 여러 천하의 풍토와 문화가 각기 다르다고 본다. 고려의 독자적인 문화를 강조하면서 선진문화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수용해야 한다는 고려 태조의 訓要는 그러한 천하관을 반영한다.
- 태조 대부터 존재했던 다원적 천하관은 원 간섭기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승휴는 『帝王韻紀』에 “요하 동쪽에 별도로 하나의 천지(天地)가 있다”[遼東別有一乾坤]고 서술했다. 천하다원론자는 요하 동쪽을 ‘東方’으로 구분하여 고려가 속한 별도의 천하로 간주했고, 이 별도의 천하에 발해로 이어진 고구려의 강역과 유민, 여진이 포함된다고 인식했다.
- 경제ㆍ문화ㆍ군사의 측면에서 고려는 한족왕조인 송이나 북방왕조인 요ㆍ금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실리를 얻으려 했던 다원론자들은 고려 군주를 천자ㆍ황제로 부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주변 강대국에게 사대의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국익을 해치는 엄중한 상황에서는 일전불사의 자세를 취하며 자주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원론자는 이 점에서 자국중심론자나 화이론자와 달랐다.
- 다원론자와 자국중심론자는 고려의 독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주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지 못했던 자국중심 천하관과 달리, 다원론자들은 현실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외국의 선진 문물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 다원론자와 화이론자는 모두 강대국과 사대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원론자는 어디까지나 국익이 보장되는 한도 안에서 사대의 예를 갖췄다. 만약 국익이 침해받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들은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중화에 편중되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다가 요와 금이 압력을 가하자 재빨리 굴복하는 나약한 화이론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 고려 전기ㆍ중기에 유학자 출신의 문신들은 대부분 다원적 천하관 계열에 속했다. 다원론적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고려 군주를 천자ㆍ황제로 지칭하는 사례가 자국중심 천하관이나 화이론적 천하관의 사례보다 훨씬 많다. 오랜 기간 정치를 주도한 쪽도 천하다원론자들이었다. 오히려 자국중심 천하관과 화이론적 천하관이 소수에 속했다.
4. 맺음말: 고려시대 다원적 천하관의 역사적 위상
-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은 고구려의 ‘삼차적 천하관’(노태돈, 1988)과 부분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에는 역사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요소도 있다. 고대에는 천자ㆍ황제 칭호보다는 각국의 전통적인 군주 위호가 사용되었지만, 유교정치문화가 성립했던 고려에서는 천자ㆍ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유교정치문화는 국제적으로도 퍼져나갔다. 자신이 속한 독자적인 천하 안에서 중심국을 자처하려 했던 고려로서는 유교 문화권에서 최고 군주의 위호인 천자ㆍ황제를 칭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발해 유민과 여진 부족은 고려를 천자국으로 인식하고 ‘表’를 올렸다. 뒤에 금이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도 고려 국왕을 ‘高麗國皇帝’로 표기했다.
- 고려 내부에서는 자국중심론자와 천하다원론자가 천자ㆍ황제 위호 사용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물론 유교문화의 수용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 화이론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문화의 수용은 사대주의로 흘러갈 수 있었지만, 다원론자들은 그들과 달리 외국 선진문화에 개방적이면서도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 무신집권기에 들어서 고려 군주의 권위는 상징적인 것으로 변화했으나 다원적 천하관은 여전히 주류였다. 하지만 원 간섭기에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강요받으면서 다원적 천하관은 점차 축소되었다. 오히려 성리학의 도입으로 화이론이 점차 확산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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