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우, 2018, 「1960~70년대 고려 귀족제설의 정립과 그 전망」, 『한국사연구』 183
정리: 2019.04.28
1. 머리말
ㆍ이미 식민지시기부터 고려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지칭했다. 하지만 고려 귀족제설이 통설로 정립된 것은 1960~70년대의 일이다. 이 시기에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하고 관료제설이 대두하면서 고려 전기 지배층에 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종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귀족의 개념과 범주, 귀족제의 기반과 역사적 위상 등이 규명되었고, 귀족제설은 통설로 자리 잡았다.
ㆍ내재적 발전론은 귀족제설 정립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귀족제설은 귀족제-관료제 논쟁을 거치며 어떻게 정립해 갔는가. 귀족제설은 여전히 고려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효한가. 저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고려 귀족제설을 검토한다.
2. 논쟁 이전 귀족제설의 내용과 특징
(1) 해방 후~1950년대 귀족제설의 양상
ㆍ검토대상: 『國史敎本』(김상기ㆍ이병도 著, 1946), 『國史大要』(손진태 著, 1949), 『國史大觀』(이병도 著, 1952), 『國史新講』(한우근 외 著, 1958)
ㆍ1960년대 이전에도 고려 지배층을 貴族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귀족’이라는 용어를 고려 지배층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 개념어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고대와 조선의 지배층도 귀족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 귀족은 한국사 전 시기의 지배층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의미였다.
ㆍ한국사 전 시기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파악한 것은 한국사 발전 과정에 따른 지배층의 특질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 연구가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여전히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1960년대 귀족제설의 내용과 특징
ㆍ이기백과 변태섭은 고려 귀족제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기백이 식민사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면, 변태섭은 고려사회가 귀족정치기에서 무신집권기로 이행하면서 사회가 발전했다고 파악했다.
ㆍ고려 귀족에 관한 이기백과 변태섭의 견해는 유사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가문과 문벌의 중시,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특권의 향유, 왕실 및 귀족과의 통혼을 고려 귀족의 특성으로 파악했다.
ㆍ이기백과 변태섭의 견해는 한국사 발전 과정에서 고려 귀족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고려 귀족제설의 단초가 마련되자 연구자들은 귀족제설의 내용을 정리해 나갔다.
ㆍ1960년대에 정리된 고려 귀족제설은 한우근의 『한국통사』(1970)에 반영되었다. 이 책에서는 고대와 고려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조선의 지배층을 양반으로 구분했다. 고대와 고려의 귀족 역시 역사적 성격이 다르다고 파악했다. 고대ㆍ조선의 지배층과 구별되는 고려 귀족의 여러 특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①식읍ㆍ공음전 등의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고, ②왕실과 통혼 관계를 맺었으며, ③ 음서를 통해 5품 이상의 자제가 등용되는 특권을 누렸다. 이런 내용은 1960년대 이전보다 훨씬 더 정제된 설명이었다.
ㆍ김의규는 음서가 귀족제의 재생산 기반이라는 것을 논증하고, 신라의 골품제도를 해체하고 성립한 고려의 관인사회가 귀족제에 기반을 두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1971) 이때부터 음서제는 귀족제의 기반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ㆍ1960년대에는 식민사학 비판과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문제의식 위에서 고려 귀족제설의 내용이 정리되어 갔다. 하지만 귀족제설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에 대한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3. 귀족제설-관료제설 논쟁과 통설의 정립
ㆍ1970년대 초에 박창희가 고려 귀족제설을 부정하고 고려 관료제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박창희가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료제설도 귀족제설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정치사적 발전단계를 의식하며 제기된 입론이었다. ①공음전은 모든 관료가 아니라 특별유공자에게 제기되었고, 지급기준인 品은 관품이 아니라 단계를 의미하므로 공음전은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아니다. ②관리 등용에서 음서보다 과거제가 일반적이었으므로 귀족제설은 부정되어야 한다. ③한미한 출신이 과거 급제로 문벌을 세우거나 자손이 과거에 급제해 가업을 이어 문벌을 형성한 경우 귀족이 아닌 관료적 문벌이라 해야 한다.
ㆍ박창희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종전까지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던 귀족제설의 개별 요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변태섭은 고려의 지배층을 ‘문벌귀족’으로 규정해 그 역사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이기백은 성종대 지배세력, 과거제 운영의 성격, 중앙관료의 귀족적 성격, 최승로의 유교사상 등을 검토해 귀족제설을 옹호했다.
ㆍ박용운은 막스 베버의 가산관료제 개념을 고려에 적용한 박창희의 관료제설을 비판하고 귀족제설을 재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귀족의 개념과 범주를 구체적으로 정의했고, 과거제ㆍ음서제ㆍ공음전 역시 귀족제의 기반으로 자리매김했다. ①고려 군주와 관료의 관계는 막스 베버가 상정한 가산관료제의 군주-관료 관계와 다르다. ②베버는 과거제가 실력을 토대로 하는 근대 관료제의 속성이 있다고 했으나, 고려의 과거는 지배신분층이 응시했으므로 실력에 기초한다고 볼 수 없다. ③작위귀족 대신 관직귀족이 있었던 고려에서는 5품 이상이면 귀족적 특권을 부여받았고, 4세대를 거듭하면 귀족가문이 되었다. ④소수의 귀족가문이 왕실 또는 다른 귀족과 중첩된 혼맥을 맺고 누대로 정부의 요직을 점유해 국가를 귀족제적으로 운영했다. ⑤과거시험은 관료후보자를 선발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관직 진출은 가문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⑥음서제의 시행 범위가 넓고 일반적이었다. ⑦공음전은 귀족관료의 경제적 토대였다.
ㆍ박용운은 이어서 고려시대 문ㆍ무반 가문과 해주 최씨ㆍ파평 윤씨 같은 문벌을 분석해 귀족제설의 논거를 강화했다.
ㆍ박창희는 1977년에 다시 한번 귀족제설을 비판했다. ①과거제는 개인의 능력이 결정적 척도이며 가문과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귀족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적다. ②과거제는 본질상 반귀족적이고 관리 등용의 중심이었으며, 음서제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이다. ③음서는 初職을 주는 것이며 승진이나 최종 관직을 보장하지 않는다.
ㆍ귀족제설에 대한 박창희의 비판은 귀족제설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귀족제설이 통설로 정립되는 상황에서 논쟁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4. 귀족제설에 대한 평가와 전망
ㆍ귀족제설이 통설로 정립되기는 했으나 관료제설과의 논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제설의 적절성 또는 유효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1960~70년대 정리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귀족제설은 현재까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ㆍ귀족의 개념을 따져봐야 한다. 고려 지배층을 귀족으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신분제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아니라 고려사회만의 특징을 지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문벌을 중요시하는 고려사회에서 출신 문벌이 좋은 사람이 귀족이었다는 입장에서는 고려 지배층을 문벌귀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고려가 문벌을 중시했더라도 문벌이 곧 귀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벌은 어느 사회에나 있을 수 있으므로 문벌 자체의 성격이 귀족적인가 관료적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고려 지배층을 귀족으로 이해하려면 관료나 문벌이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귀족으로서의 특징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위진남북조의 귀족처럼 군주의 권력이나 관료제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율적인 위상을 구축해야 하지만, 고려의 귀족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귀족이라고 보기 어렵다.
ㆍ유승원은 귀족제설과 관료제설을 모두 비판하며 문벌사회론을 제기했다. 그가 생각하는 문벌사회는 개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배경이 우선시되어 상류층에 대한 우대책이 공공연히 시행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3성 6부제와 교육제도, 음서제도는 모두 가문 재생산과 강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①그가 정의한 문벌사회의 특징은 너무 포괄적인 탓에 신분제 사회의 일반적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②교육제와 음서제는 기본적으로 관료에 대한 우대책이었고 문벌만을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ㆍ문벌의 범주도 따져봐야 한다. 문벌의 범주를 5품 또는 宰樞를 기준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3세대가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내면 문벌이 된다는 견해는 음서제 수여, 공음전 지급, 국자감 입학의 자격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관료를 배출한 가문을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재추를 배출한 가문은 3품 이하를 배출한 가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다수의 재추를 배출해야 문벌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ㆍ음서제는 귀족제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다. 그러나 음서제는 관료제 상의 官品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했다. 음서는 문벌 여부와 상관없이 관품이 5품 이상이면 혜택을 주는 제도였다. 음서제는 기본적으로 관료 재생산을 위한 제도이지 문벌이나 귀족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회가 귀족사회나 문벌사회였다는 것을 음서제만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ㆍ공음전 지급기준이 관품이 아니라 공적의 단계이고 지급대상은 有功者라는 박창희의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설령 공음전 지급기준이 5품이라고 하더라도 관료제상의 지위를 기준으로 지급한다는 것이지 문벌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공음전을 귀족제의 경제 기반으로 해석할 수 없다.
ㆍ과거제는 분명히 신분제의 테두리 안에서 운영되었다. 고려가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응시대상이 중앙관리와 지방향리의 자손이었다면 과거제가 특별히 문벌이나 귀족만을 위한 제도라고 보기 어렵다. 지방향리는 문벌이나 귀족이 아니었고, 중앙관리도 모두가 문벌이나 귀족인 것도 아니었다.
ㆍ고려 지배층의 특권은 지배층 내에서 관료가 배출되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인 과거제, 음서제와 관료로서 봉사한 대가나 공로를 세운 관료에게 주는 경제적 혜택인 전시과, 녹봉, 공음전에 집중됐다. 반면 귀족이나 문벌을 위한 특혜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를 귀족제 사회로 보기는 어렵다.
ㆍ귀족제설은 고대와 고려의 지배층에서 귀족이라는 공통성을 강조하고, 조선의 지배층은 관료적 성격을 강조해 고려의 지배층과 구분한다. 하지만 지방 호족이 건국한 고려는 지방세력도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런 변화를 반영해 문무양반의 관료제를 정립했다. 이것은 골품제에 바탕을 두고 진골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신라와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지배층은 귀족보다 관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며, 문벌은 누대에 걸쳐 고위관료를 배출한 가문으로 보아야 한다.
5. 맺음말
ㆍ1960~70년대 내재적 발전론과 귀족제-관료제 논쟁은 고려 귀족제설이 통설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귀족제설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고려의 지배층은 귀족이 아니라 관료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문벌은 누대에 걸쳐 고위관료를 배출한 명망 있는 가문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이해다.
◎ 단상
저자는 이 글에서 귀족제-관료제 논쟁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귀족제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확실히 귀족제설은 더 세밀하게 검토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생각도 든다. (1) 저자의 대안이 1970년대 박창희 교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더 확장되었을까? (2) 고대의 지배형태였던 귀족제가 단숨에 해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고려 초기에는 그런 영향들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과연 고려가 관료제 사회였다면 관료제는 귀족제를 어떤 방식으로 대체해 나갔는가? (3) 고려의 관료제가 가지는 ‘고려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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