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65
정리일: 2019.05.04
1. 머리말
일반적으로 1356년(공민왕 5) 5월에 공민왕이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와 만호부를 해체한 사건을 ‘반원운동’(反元運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저자는 공민왕에게 고려-원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의사가 없었다고 파악한다. 오히려 공민왕의 목적은 ‘세조구제’ 회복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원개혁’으로 규정되었던 사안들은 공민왕이 마주했던 국내의 국정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1356년에 단행된 공민왕의 개혁을 재검토했다. 그가 검토한 내용은 ①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②만호부제 폐지 요구, ③재정개혁, ④쌍성총관부 일대 회복이다.
2. 국정 주도권의 회복 및 ‘세조구제’ 거론
공민왕이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한 것은 국내 정치 개혁을 위해서였다. 정동행성 이문소에서 기철 세력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기철 세력이 정동행성 이문소를 장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동행성 이문소를 구성하는 세력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기철은 원나라 내의 다른 세력 관료들과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따라서 기철을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한 것을 꼭 반원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공민왕이 국정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기철 세력과 그 외의 비협조 세력을 제거하려고 추진한 일이었다. 더구나 공민왕은 이 개혁을 위해 ‘세조구제’를 거론하며 원에 행성관 보거권을 요구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기철 세력 숙청과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의 목적은 반원운동보다는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군제의 정비 및 ‘세조구제’ 거론
공민왕은 만호부제를 정비하여 군제 개혁을 도모했다. 만호부제는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시도할 당시 고려에 설치되었던 군제였다. 이때 설치한 중군ㆍ좌군ㆍ우군만호는 점차 지역 만호부로 확대되었으며, 기철 세력과 긴밀하게 얽혀있었다. 따라서 만호부는 기철 세력을 숙청한 공민왕에게 개혁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철 세력을 숙청한 이후에도 공민왕은 국방을 위해 만호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게다가 그는 ‘세조구제’를 만호부 혁신의 근거로 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만호부 혁신은 반원운동의 일환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공민왕이 내정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근거로 ‘세조구제’를 내세웠다는 사실은 그가 여전히 ‘세조구제’를 실질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4. 재정 보호 및 對元 조공 유지
공민왕은 원나라에 물자 징발 중지를 요구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세조구제’에 기초한 책봉-조공 관계의 단절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340년대 기황후 일파가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고려로부터의 물자 징발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고려로부터 물자를 징발한 주체는 원나라 조정이 아니라 기황후 일파였던 것이다. 따라서 물자 징발을 중지해달라는 공민왕의 의도는 반원(反元)이 아니라 기황후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제로 향후에도 원나라와 책봉-조공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거듭 천명했다. 따라서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여전히 책봉-조공 관계로 볼 수 있다.
5. 동북면 강역 회복 및 서북면 국경 유지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이것은 반원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쌍성총관부 수복은 기철 세력을 제거하고 고려의 옛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원나라가 고려의 동북면과 서북면을 각기 어떻게 인식했는지 검토해야 한다. 원나라는 동북면의 쌍성지역을 ‘半고려영역’으로 보고 그 일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북면은 그렇지 않았다. 두 지역에 대한 원의 태도는 달랐다. 공민왕이 기철 세력을 구실로 삼아 쌍성 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의 당위를 강조했을 때, 몽골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서북면에 대한 군사작전에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며 강하게 항의했고, 고려도 즉각 관련자를 처벌했다. 따라서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은 반원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차라리 원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고 기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행위였다.
5. 맺음말
일반적으로 1356년 공민왕의 개혁은 ‘반원운동’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공민왕이 1356년에 추진한 일련의 개혁은 반원운동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공민왕이 즉위 초부터 추구했던 포괄적인 국정개혁의 일환이었다.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조구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개혁의 동력을 얻었다. 따라서 1356년의 개혁은 반원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공민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세조구제에 기초해 양국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공민왕에게 ‘포괄적 국정개혁’과 ‘세조구제 체제의 유지’는 모순된 명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단상
지금껏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반원’의 개념이 그리 엄밀하지 않다는 점, 고려후기 지배층이 매우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에서 국내정치의 맥락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유익했다. 다만 ‘반원’이라는 틀을 배제하고 공민왕의 개혁을 분석하다보니 몽골(원)이라는 변수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공민왕이 ‘세조구제’를 회복ㆍ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원)은 여전히 고려의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몽골(원)이 매우 수동적으로 묘사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몽골(원)과 기씨 일족을 서로 다른 정치주체로 분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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