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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는 그저 '종교의 시대'인가? 유럽의 중세는 그저 '종교의 시대'인가? 2017.12.15 흔히 유럽의 중세는 ‘종교의 시대’로 불린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중세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인식에 기대고 있다. 카노사의 굴욕이나 ‘마녀사냥’이 중세 유럽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 또는 교회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과 충돌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고, 그런 점에서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 위상도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편적인 사실들로 중세 유럽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보다 그 사실들의 이면에 놓인 역사적 맥.. 2018. 4. 15.
형식과 감정 사이에서 형식과 감정 사이에서 - 죽음을 애도하는 18세기 한 조선인의 제문 - 아! 며칠 전 아침 바람에 정을 따라 충문공(忠文公 : 徐命善)의 영령에 제사를 드렸다. 저 관서(關西) 지방의 들판을 일찍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다시 경에게 술을 따르게 되었도다. 정신은 모여 있지만 장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니, 강호의 한 가지 병통은 흘러가는 물처럼 멈추지 않는 것임을 어찌하랴? 아!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서로 사귐이 깊어 《춘추》에서 명분과 의리를 논하였고, 피를 뿜고 간담이 파헤쳐져도 원수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선왕[英祖]의 해와 달처럼 밝은 보살핌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파도가 가라앉으면 돌이 드러나듯이, 그윽한 하늘을.. 2018. 4. 15.
이규보-경설(鏡說) 경설(鏡說) 이규보 居士有鏡一枚, 塵埃侵蝕掩掩, 如月之翳雲. 然朝夕覽觀, 似若飾容貌者.어떤 거사가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먼지가 껴서 가려진 것이 마치 달이 구름에 가려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 용모를 꾸미는 사람과 비슷했다. 客見而問曰 : “鏡所以鑑形. 不則君子對之, 以取其淸. 今吾子之鏡, 濛如霧如, 旣不可鑑其形, 又無所取其淸. 然吾子尙炤不已, 豈有理乎?”손님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거울은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자가 그 맑음을 취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거울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흐릿하여 얼굴을 볼 수 없고, 그 맑음을 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오히려 얼굴을 비추어보며 그만두지 않으니, 어떤 이.. 2018. 4. 15.
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1. 식민지 경제를 보는 두 가지 시선 : 수탈과 근대화 한국에서 ‘근대화’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항 이후 등장한 문명개화론부터 개발독재시대에 국시로 자리 잡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근대화는 한국 사회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였다.[각주:1] 비록 한국에서 근대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은 사람마다, 또는 시대마다 제각기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이때 서구화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체를 수립하는 것이나 만국공법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수용하자는 생각은 모두 조선에 서구적인 근대를 구현하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비단.. 2018. 4. 14.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1. 복원된 청계천의 비극 2005년 10월, 복원공사를 마친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2002년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이명박이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건 지 약 3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이 공약으로 제시되었을 때, 언론과 전문가들은 청계천 복원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대효과는 이런 것이었다. ① 청계천의 역사성을 회복함으로써 서울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되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 ② 친환경 생태하천을 복원하여 대중의 환경의식을 고양할 수 있다. ③ 청계천 주변의 상업 활성화 등으로 서울시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경제적 효과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실현되.. 2018. 4. 14.
허균 - 유재론(遺才論) 유재론(遺才論) 허균 爲國家者, 所與共理天職, 非才莫可也. 天之生才, 原爲一代之用, 而其生之也, 不以貴望, 而豐其賦, 不以側陋, 而嗇其稟, 故古先哲辟知其然也, 或求之於草野之中, 或拔之於行伍, 或擢於降虜敗亡之將, 或擧賊, 或用莞庫士. 用之者咸適其宜, 而見用者亦各展其才, 國以蒙福, 而治之日隆, 用此道也.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왕과 함께 하늘이 내린 직분을 다스리는 이들이니 인재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다. 그래서 인재를 낼 때 귀하다는 이유로 그 타고난 재능을 풍부하게 하지 않고, 미천하다는 이유로 타고난 재능를 인색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그러한 바를 알아서 혹은 초야에서 인재를 구하기도 했고, 혹은 병졸 중에서 인재를 선발하기도 했.. 2018. 4. 14.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정정훈,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군주론(II Principe)』은 너무도 유명한 책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책의 이름을 들었고,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비열한’ 내용이 담긴 ‘악마의 저작’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정훈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의 기예”라고 보았다. 즉 정정훈은 『군주론』으로부터 “도덕적 이상과 추상적 원칙에 매몰되어 현실의 투쟁 속에서 무력화되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의 중심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2018. 4. 14.
부조리한 현실과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부조리한 현실과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 왜 정약용은 「고금도 장씨 여자 이야기」를 썼을까? - 1. 프롤로그 조선 지식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18세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옥은 일상이 지루해서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이옥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에게 글은 학문을 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신변잡기는 글다운 글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정조가 이옥 같은 사람들의 글을 두고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다’며 혹평한 것도 그런 문장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지식인들이 반드시 학문과 정치만을 위해.. 2018. 4. 14.
정조에 투영된 정치적 열망, 무엇이 문제인가? 정조에 투영된 정치적 열망, 무엇이 문제인가? -이덕일의 책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논평- 1990년대 이후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의 이미지는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개혁군주’ 또는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무능하고 나약한 군주의 이미지를 대신했다. 자연스럽게 정조에 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는 정조의 삶과 치세를 다룬 다양한 저서가 출판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저서는 이덕일의 책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고즈윈, 2008)다. 정조의 극적인 삶은 물론 그의 개혁과 좌절을 매우 유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국왕 정조와 ‘수구 정파’ 노론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정조시대를 이해한다. 정조가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 2018. 4. 14.
<병정님>, 국가주의와 남성주의가 뒤섞인 프로파간다 : 국가주의와 남성주의가 뒤섞인 프로파간다 2017.09.05 식민지기 전시동원체제(1937~1945)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매우 낮선 경험이었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 자체가 한국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전시체제기의 폭력과 강압은 1910년대나 1920년대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예컨대, 한국인에게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거나 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던 일제의 정책은 전시체제기 식민통치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주체인 일제도 한국인들에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정책만 구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통치 권력도 다양한 조건과 제약 속에서 구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제로서는 전시체제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포장하기 위한 좀 더 ‘세련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 2018. 4. 13.
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 영유권 발생 시기에 관한 비판적 검토 - 프롤로그 1952년 1월 28일,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한 영토인데도 한국 정부가 불법점거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독도 영유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논쟁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해왔다. 하나는 독도를 울릉도로 도항하는 정박장 및 어업구역으로 활용하면서 늦어도 17세기에 자신들의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00년대까지 주인이 없던 섬을 1904년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2018. 4. 13.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공리주의적’일까?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공리주의적’일까? - 함익병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반박을 중심으로- 1. 함익병의 논쟁적인 인터뷰 몇 년 전,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의사 함익병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철인정치지,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것, 바로 1인 독재입니다. 오죽하면 플라톤이 중우(衆愚)정치를 비판했겠습니까. …… 독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dogma)입니다. 정치의 목적은 최대 다수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죠. …… 더 잘살 수 있으면 왕정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민주’란 말만 붙으면 최고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 자본주의가 지고지선(至高至善)이 아니듯, .. 2018.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