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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근대사 기록 읽기7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 2019.12.04 1. 프롤로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20세기의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0년대 이래로 조선 유학에 천착했던 그는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유학사를 구성해냈다. 그런 면에서 다카하시 도오루가 ‘근대적 전통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연구는 철저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카하시가 보기에 조선 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주자학에만 골몰”했고, 그들의 학문도 “지극히 간이하고 또 단조롭다.” 이런 논점으로는 조선 유학사의 역사적 의.. 2019. 12. 7.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을 바라보는 시선들 : 민족주의자 VS 친일파 몽양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ㆍ중국ㆍ미국ㆍ소련 등 다양한 외부세력과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 점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소련과 미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그 모두와 폭넓게 교류했던 여운형의 행보는 분명히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미군정과 한국 우익 세력은 그를 공산주의자ㆍ친일파 등으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좌익 세력은 여운형이 친미앞잡이이자 기회주의.. 2018. 4. 23.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1. 서론 현상윤(1893~1950)은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근대적 학문방법론에 입각해 『조선유학사』(1948)를 저술함으로써 해방 이후 한국 유학사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해방 이후 조선 유학사 연구의 전체 틀은 이미 그의 『조선유학사』에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그런 점에서 현상윤을 “조선유학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각주:2] 하지만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 제시한 유학사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조선유학사』에 담긴 그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의 유학관(儒學觀)은 전통 한학과 근대 학문을 접.. 2018. 4. 22.
The Origin of Korea The Origin of Korea : Dynamic Interaction between Koreans and Foreign Powers in the Liberation Space In October 2015,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ok a decision to use only state-issued history textbooks. At that time, the then president Park Geun-hye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the ‘correct’ history more than once. What is the correct history she said? The Education Minister Hwang Woo-yeo s.. 2018. 4. 16.
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1. 식민지 경제를 보는 두 가지 시선 : 수탈과 근대화 한국에서 ‘근대화’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항 이후 등장한 문명개화론부터 개발독재시대에 국시로 자리 잡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근대화는 한국 사회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였다.[각주:1] 비록 한국에서 근대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은 사람마다, 또는 시대마다 제각기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이때 서구화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체를 수립하는 것이나 만국공법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수용하자는 생각은 모두 조선에 서구적인 근대를 구현하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비단.. 2018. 4. 14.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1. 복원된 청계천의 비극 2005년 10월, 복원공사를 마친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2002년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이명박이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건 지 약 3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이 공약으로 제시되었을 때, 언론과 전문가들은 청계천 복원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대효과는 이런 것이었다. ① 청계천의 역사성을 회복함으로써 서울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되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 ② 친환경 생태하천을 복원하여 대중의 환경의식을 고양할 수 있다. ③ 청계천 주변의 상업 활성화 등으로 서울시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경제적 효과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실현되.. 2018. 4. 14.
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 영유권 발생 시기에 관한 비판적 검토 - 프롤로그 1952년 1월 28일,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한 영토인데도 한국 정부가 불법점거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독도 영유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논쟁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해왔다. 하나는 독도를 울릉도로 도항하는 정박장 및 어업구역으로 활용하면서 늦어도 17세기에 자신들의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00년대까지 주인이 없던 섬을 1904년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2018.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