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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25

조선 초 문물제도 정비의 역사성과 보편문화 요즘은 조금 주춤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대체로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를 ‘보편문화의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분석하고 평가해왔다. 과거의 연구들이 주로 민족주의 혹은 역사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자주성’을 강조했다면, 최근 연구들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며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역사성을 재평가한다.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보면 조선 초의 문물제도 정비는 ‘중화’로 표현되는 당대의 보편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국사적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보편문명’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다는 강점이 있다. 더구나 조선 초의 정치가들이 ‘제후국의 명분’을 중요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설명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의.. 2024. 1. 19.
국장도감 도청의궤 각 편목의 기능 국장도감 도청의궤 각 편목의 기능 2022.06.29 도청의궤에서 국장의 실질적 업무과 관련된 항목은 계사질ㆍ장계질ㆍ이문질ㆍ내관질ㆍ품목질ㆍ감결질ㆍ예관질ㆍ의주질이다. 비록 현종 국장 때는 이문질과 내관질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현종의궤』 이후의 의궤들은 이 항목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계사질부터 의주질까지의 항목이 도청의궤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내용임을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도청의궤를 구성하는 편목들의 순서가 『현종의궤』 이후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의궤가 국가 행사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정리하기 위한 텍스트라면, 도청의궤 편목의 순서는 그 ‘체계’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영조국장도감』을 중심으로 각 편목을 구성하는 내용과 특징을 .. 2023. 3. 29.
국장도감 도청의궤 편목 구성의 변화 국장도감 도청의궤 편목 구성의 변화 2022.06.29 도청의궤가 포함된 가장 오래된 국장도감의궤는 바로 『인조국장도감의궤』(1649)다. 여기서는 이 의궤를 기준으로 이후의 도청의궤 체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인조국장도감의궤』(이하 『인조의궤』)부터 『영조국장도감의궤』(이하 『영조의궤』)까지 국왕 국장도감 도청의궤 체재를 살펴보면 아래의 과 같다. 『인조의궤』가 17-18세기의 나머지 의궤와 구분되는 가시적인 차이점은 총목차가 없다는 점이다. 그 체재에 ‘좌목’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물론 내용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효종의궤』에서 『영조의궤』의 총목차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좌목’인데, 이 항목은 이조단자와 도감사목단자로 구성되었다. 『인조의궤』에도 책머리.. 2022. 9. 22.
『영조국장도감의궤』의 목차 구성과 도청 인원 운용 『영조국장도감의궤』의 목차 구성과 도청 인원 운용 2022.04.20. 1. 의궤의 목차와 구성 • 座目: 19개 항목으로 구성 ‣ 영조국장도감의궤는 도감 좌목과 실제 구성이 대체로 일치 ‣ 도청의궤 중 [서계]는 좌목에 반영되지 않음 ‣ 일방~삼방의궤까지의 세부 목차는 반영되지 않음 • 국장도감의궤 간의 목차 비교 • 일방~삼방의궤의 세부 목차 비교 ‣ 일방의궤: 감결질, 반차도 → 일방의 기능과 관련 ① 역할: 大轝ㆍ靈座交椅ㆍ肩輿ㆍ腰輿ㆍ彩輿 등 제작 - 상여 행렬의 핵심 요소 → 발인 전반을 관할했을 것 ② 감결질: 발인 습의와 관련된 세부 사항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 (cf. 이방 – 吉儀仗ㆍ凶儀仗) 3차 습의 및 발인 때 吉儀仗은 全數 숭정문 밖의 신련이 있는 곳에 줄지어 늘어놓을 일. 【이방】 ∴.. 2022. 5. 9.
『삼현수간』중 송익필과 이이의 편지 『삼현수간』: 송익필과 이이의 편지 2022.03.21. 1. 간찰의 개요 여기에서 다룰 두 편의 간찰은 『삼현수간』에 실린 것이다. “三賢手簡”이라는 제목은 곧 세 현인, 즉 성혼ㆍ이이ㆍ송익필의 서신을 가리킨다. 즉, 『삼현수간』은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것이다. 그 원형은 본래 송익필의 문집 『龜峯集』에 실린 「玄繩編」으로 모두 98편의 편지가 실려있다. 그중 16편은 세 사람의 문집에 실리지 않은 편지다. 그런 점에서 『삼현수간』의 본래 명칭은 「玄繩編」이며 ‘삼현수간’이라는 제목은 후대에 붙인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현승편」에 실린 송익필의 自序에는 세 사람의 편지를 묶은 경위를 간략히 적었다. 그 아들 宋就大가 임진왜란 이후에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수습했고, 그것을 책으로 엮었다.. 2022. 3. 22.
[동문선]『경제육전원집상절』의 서문(권채) 권채, 「經濟六典元集詳節序」(『東文選』 93) 2022.02.21. ▣임용한, 1999, 「朝鮮初期 法典 편찬과 편찬원리」, 『韓國思想과 文化』 6 ▣임용한, 2003, 「『경제육전속집상절』의 간행과 그 의의」, 『朝鮮時代史學報』 25 ▣윤훈표, 2003, 「경제육전의 편찬과 주도층의 변화」, 『동방학지』 121 (1) 『경제육전』의 편찬 과정 『경제육전』은 처음 간행된 이후로 꾸준히 수정ㆍ증보되었는데, 대체로 『원전』을 두고 별도로 『속집』을 간행해서 수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해 나갔다. 『경제육전』은 태조 7년(1398)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태종대에 새로운 규정들을 수록하면서 별도로 『속집상절』을 간행했다. 문제는 두 법전 사이에 중복되거나 충돌하는 조문이 존재한다는 데 있었다. 태종은 『속집상절.. 2022. 3. 3.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최수천(崔壽天)의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최수천의 공인문기 [원문] 乾隆十五年 庚午 十一月 二十五日。 崔壽天前明文。 右明文事段。 要用所致以。 安世徽處。 自己買 得爲在。 長興庫湖西六月令。 供上紙半 封貢物。 同人前。 價折正銀子貳佰伍兩。 依數 交易捧上爲遣。 本文記貳度幷以。 永永放 賣爲去乎。 日後良中。 子孫族屬中。 若有 雜談。 則此文卞正事。 財主 韓興瑞 [手決] 訂人 尹佑商 [手決] 筆執 李繼興 [手決] [번역문] 건륭 15년(1750) 경오년 11월 25일 최수천崔壽天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은 요긴하게 쓸 까닭으로 안세휘에게 본인이 매득한 장흥고에 호서에서 6월경에 올리는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1) 이 사람[최수천]에게 값은 정은자正銀子 205냥으로 정하여 액수에 따라 바꾸어 받아들이고 본 문기文記 두 장을2) .. 2021. 2. 27.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한흥서(韓興瑞)의 공인문기 1750년 한흥서韓興瑞의 공인문기 [원문] 乾隆十五年 庚午 四月 二十二日。 韓興瑞前明文。 右明文事段。 要用所致以。 金時達處。 自己買 得爲在。 長興庫湖西六月令。 供上紙半封貢 物。 同人前。 價折銀子貳佰伍兩。 依數交易捧上 爲遣。 買得文記壹度幷以。 明年受價米爲 始。 永永放賣爲去乎。 日後良中。子孫族屬中。 若 有雜談。 則此文卞正事。 財主 安世徽 [手決] 訂人 外孫 高漢喆 [手決] 筆執 李繼興 [手決] [번역문] 건륭 15년(1750) 경오년 4월 22일 한흥서韓興瑞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은 요긴히 쓸 까닭으로 김시달金時達에게서 본인이 매득했던 장흥고의 호서 6월경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1) 이 사람2)에게 값은 은자 205냥으로 정하여 액수에 따라 교환하여 받아들이고 매득문기 한 장3)을 아울러서 내.. 2021. 2. 27.
[공인문기] 강희 36년(1697) 안세휘(安世徽)의 공인문기 강희 36년(1697) 안세휘의 공인문기 [원문] 康熙三十六年 丁丑 正月 初九日 安世徽前明文 右明文爲臥乎事段。 要用所致以。 祖上傳來。 長興庫所答湖西六月領所封供上紙。 半令貢物。 同人處。 價折銀子壹百柒拾兩。 依數交易捧上爲遣。 戊寅條爲始。 永永放賣爲去乎。 後此良中。 同生子孫族類中。 若有雜談是去等。 將此文記。 告官卞正事。 財主 金時達 [手決]證人 張漢傑 [手決] 朴震興 [手決]筆執 全永建[手決] [번역문] 강희 36년(1697) 정축년 정월 초아흐레 안세휘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인즉, 요긴하게 쓸 까닭으로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장흥고에 보내는 호서에서 6월경에 바치는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공물을 상납할 권리를] 이 사람[안세휘]에게 값은 은자 170냥으로 정하여 그 액수에 따라 교환하여 받아들이.. 2021. 2. 27.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檜巖寺 妙嚴尊者 無學大師碑 ▲현재 양주 회암사 북쪽에 위치한 무학의 부도와 탑비. 오른쪽은 처음 세운 비석의 받침석과 지붕이며, 왼쪽은 순조 때 중건한 비석이다. 비석 소개 일반적으로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이하 ‘무학비’)이 처음 건립된 시점은 1410년(태종 10)이다. 이 비석을 세운 결정적인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유지遺志였다. 비문 찬술자 변계량의 진술에 따르면, 태종은 상왕에게 태조의 유지를 듣고는 비명을 찬술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때 건립된 비석은 줄곧 제자리를 지키다가 약 400여 년이 지난 1821년(순조 21)에 파괴되었다. 오늘날 회암사 북쪽에 서 있는 무학비는 1828년(순조 28)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무학비가 순조 때 파손된.. 2020.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