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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옛 사람 이야기

형식과 감정 사이에서

by 衍坡 2018. 4. 15.

형식과 감정 사이에서

- 죽음을 애도하는 18세기 한 조선인의 제문 -

 

 

아! 며칠 전 아침 바람에 정을 따라 충문공(忠文公 : 徐命善)의 영령에 제사를 드렸다. 저 관서(關西) 지방의 들판을 일찍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다시 경에게 술을 따르게 되었도다. 정신은 모여 있지만 장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니, 강호의 한 가지 병통은 흘러가는 물처럼 멈추지 않는 것임을 어찌하랴? 아!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서로 사귐이 깊어 《춘추》에서 명분과 의리를 논하였고, 피를 뿜고 간담이 파헤쳐져도 원수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선왕[英祖]의 해와 달처럼 밝은 보살핌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파도가 가라앉으면 돌이 드러나듯이, 그윽한 하늘을 바라보면 거마(車馬)와 누대(樓臺)가 화려하고 성대한 것은 잠시 동안의 영화에 불과하다. 국사를 위하고 공무에 힘쓰며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후세의 이름을 누릴 수 있으니, 경이 여기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저승으로 돌아가는 길이 편안할 것이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진부(秦府)의 옛사람이 생각나 한밤중의 종소리를 차마 듣지 못했는데, 나도 새벽에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배회하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아! 천고의 긴긴 밤에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구나. 봄을 맞이한 강은 아득히 넓고, 산골짜기 새들은 사방에서 지저귄다. 지난 일을 생각하며 상심에 잠겼다가 저승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탄식하노라.

정조, 〈贈右議政內閣提學忠獻公鄭民始致祭文〉, 《홍재전서》 25

 

 

1. 글을 시작하며

 

예로부터 ‘죽음’은 문학 작품 속에서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다루어졌고, 조선시대 ‘제문’(祭文)이라는 양식은 그 다양한 표현 방식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제문은 상당히 빈번하게 작성되었는데, 조선이 성리학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나라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당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왕(國王)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국왕이 직접 치제문을 작성하는 일이 잦아진다.[각주:1]

 

일반 사가(私家)에서 작성되었던 제문과 달리 국왕의 제문[致祭文]은 공식적인 ‘규범성’이 강조되었다. 이때의 규범성이란 “정(情)을 절제해야 하는 예(禮)의 규범”과 “사은(私恩)을 앞세워서는 안 되는 공의(公義)의 논리”를 의미한다.[각주:2] 즉, 치제문은 자유로운 형식을 통한 진솔한 감정의 표현방식이라기보다는 엄격한 형식 속에서 절제된 감정을 표현한 고전문학의 한 장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치제문이 일반 제문과 달리 4자구(四字句)의 운문 형식으로 정형화된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정조의 치제문 중에서 종종 산문 형식의 치제문이 등장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정조가 작성한 전체 치제문 속에서 산문 형식의 치제문이 일반적인 편은 아닌데, 그렇다면 정조가 산문의 형식을 통해 치제문을 작성한 것은 의도적인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정조는 치제문에 산문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이 글은 바로 이 질문을 중심으로 하여 정조의 치제문을 감상하려고 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정조의 산문 치제문 전체를 분석하여 그 일반적인 성격을 규정하기보다는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실린 「증 우의정 내각제학 충헌공 정민시 치제문」(이하 ‘정민시 치제문’)을 분석하려고 한다. 정조가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 굳이 산문의 형식으로 치제문을 작성한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민시 신도비

▲정민시의 초상화와 그의 신도비. 비명의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다.

 

 

2. 작품의 기승전결 구조와 감정의 심화

 

이 작품은 정조가 그의 친신(親臣)이었던 정민시의 죽음을 슬퍼하며 내린 치제문이다. 정민시는 1800년 3월 10일 사망하여 3일 뒤인 3월 13일 발인하였는데, 정조는 이 날 치제문을 내려 오랜 동료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래서 작품 전반에는 애도와 추모의 정서가 짙게 드러나고 있다. 즉, 정민시 치제문은 정민시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슬픔을 잘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을 면밀히 살펴보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기승전결의 구조로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필자가 임의로 작품을 네 문단으로 나누어 기승전결의 구조에 따라 슬픔이 전개되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1) 기(起) : 절제된 감정 표현

 

[A] 아! 며칠 전 아침 바람에 정을 따라 충문공(忠文公 : 徐命善)의 영령에 제사를 드렸다. 저 관서(關西) 지방의 들판을 일찍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다시 경에게 술을 따르게 되었도다. ㉠정신은 모여 있지만 장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니, 강호의 한 가지 병통은 흘러가는 물처럼 멈추지 않는 것임을 어찌하랴?

 

작품은 ‘아!'[嗟乎]라는 한 마디의 탄식과 함께 시작된다. 이어 정조는 정민시가 죽기 며칠 전에 충문공 서명선에게 제사를 지낸 사실이 언급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명선(1728∼1791)은 정민시와 더불어 정조의 측근이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정조는 왕이 된 이후 자신의 측근들과 ‘동덕회(同德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년 모임을 가졌는데, 서명선이 동덕회의 일원이었음은 그가 정조에게 얼마나 각별한 신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정조는 1800년 3월 7일 서명선의 시호를 충헌공(忠憲公)에서 충문공(忠文公)으로 고치고 제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며칠 후 정민시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작성된 정민시 치제문 글머리에는, 서명선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민시의 죽음을 접한 정조의 정서가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정조는 이 정서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자신의 정서를 절제된 표현방식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 같은 표현을 읽다보면 마치 정조가 정민시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는 [C]와는 대조적인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승(承) : 과거를 회상하는 화자와 감정의 심화

 

[B] 아!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서로 사귐이 깊어 《춘추(春秋)》에서 명분과 의리를 논하였고, 피를 뿜고 간담이 파헤쳐져도 원수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선왕[英祖]의 해와 달처럼 밝은 보살핌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파도가 가라앉으면 돌이 드러나듯이, 그윽한 하늘을 바라보면 거마(車馬)와 누대(樓臺)가 화려하고 성대한 것은 잠시 동안의 영화에 불과하다. 국사를 위하고 공무에 힘쓰며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후세의 이름을 누릴 수 있으니, 경이 여기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저승으로 돌아가는 길이 편안할 것이다.

 

이어서 정조는 정민시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데, 정민시와 처음 만났던 일과 그가 세손 왕위 계승을 방해하던 홍인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일, 그리고 관료로서 정민시의 면모를 언급하고 있다. 즉, 정조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벗으로서 정민시의 면모와 개인의 영화보다 국사(國事)를 위해 힘썼던 신하로서 정민시의 모습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품 속에서 정서를 더욱 심화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D]에서 “지난 일을 생각하며 상심에 잠겼다가”라는 구절은 정민시에 대한 회상이 감정을 심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C]에서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음을 생각하면, [B]가 정서를 심화하는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전(轉) : 절정에 이른 감정

 

[C] 옛날 당나라 태종이 진부(秦府)의 옛사람이 생각나 한밤중의 종소리를 차마 듣지 못했는데, 나도 새벽에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배회하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아! 천고의 긴긴 밤에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구나.

 

정민시와 함께 했던 기억을 추억하면서 정조의 슬픔은 절정에 달한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진부에서 만났던 옛 신하들이 생각나 한밤중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다는 고사처럼, 정조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자신의 동료이자 신하였던 정민시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새벽에 베개를 및리고 일어나 배회하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거나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이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즉, 정조가 [A]에서 절제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다면, [C]에서는 절정에 달한 슬픔을 더욱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B]에서 정민시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감정이 더욱 깊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A]-[B]-[C]의 과정을 거쳐 심상이 점차 깊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결(結) : 허탈감의 강조와 여운

 

[D] 봄을 맞이한 강은 아득히 넓고, 산골짜기 새들은 사방에서 지저귄다. 지난 일을 생각하며 상심에 잠겼다가 저승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탄식하노라.

 

결말부에서는 화자의 시선이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서 허탈감이 강조된다. [C]부분까지는 화자가 정민시의 죽음에 초점을 두어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에 머물러있었다면, [D]에서는 정민시가 죽고 난 현재로 시선을 옮기면서 허탈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극도로 슬픈 정조의 정서와 너무나 평온한 봄철의 경치 사이를, 그리고 회상과 현실 사이를 대비시킴으로써 정조의 슬픔과 허탈감이 극대화된다. 그러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며 상심에 잠겼다가 저승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탄식하노라”며 작품 마지막에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는 정조라는 화자의 정서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3. 글을 맺으며 : 감정의 표현방식과 형식의 관계성, 그리고 죽음에 대한 태도 

 

지금까지 정민시 치제문에서 정조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동료이자 신하인 정민시의 죽음을 접한 정조의 슬픔이 기승전결의 구조에 따라 표현된다. 정조가 정민시 치제문을 작성하면서 산문의 양식을 취한 이유는 그러한 감정 표현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문의 규범을 따르면 치제문은 4자구의 정형화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감정을 솔직하고 풍부하게 표현하는 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문의 형식으로 치제문을 작성한 정조의 의도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풍부하게 표현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의외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예(禮)를 강조하면서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국가로 인식된다. 실제로 후마 스스무는 주자학을 받아들였던 조선은 인간의 감정을 억누르는 사회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치제문의 형식을 벗어나 자신의 절절한 슬픔을 표현한 정조의 치제문을 보면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다. 오히려 정조의 치제문은 조선 사회가 인간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그에게 형식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 형식을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태도로 인간의 감정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정조의 치제문은 우리의 통념과 다른 18세기 조선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글은 2013년 2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교양 수업 '한국인의 삶과 문학'에서 중간 보고서로 제출한 글임

 

 

 

  1. 숙종은 재위기간 동안 58편, 영조는 194편, 정조는 431편의 치제문을 지었다고 한다.(李恩英, 「朝鮮後期 御製 祭文의 規範性과 抒情性」, 『한국문학연구』 제30집, 2002) [본문으로]
  2. 李恩英, 앞의 논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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