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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옛 사람 이야기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by 衍坡 2018. 4. 27.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2018.04.03

 

 

유자광은 조선시대 내내 '간신'(奸臣)으로 기억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출세해서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해친 흉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유자광의 삶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비판이 꼭 불합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는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풀었고, 연산군 재위 내내 왕의 비위를 맞추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가담해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유자광의 부귀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은 여기저기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벼슬과 공신 작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 1512년(중종 7)에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유자광을 평가한 기록

▲유자광에 관한 평가가 담긴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유자광이 다시 사면ㆍ복권된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였다. 사망한 지 거의 400년이 지난 뒤에 자신의 관작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시점에 갑자기 유자광을 사면ㆍ복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매체에서는 종종 이완용의 건의로 유자광이 복권되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조선 중후기 유림은 (유자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국을 농단했다는 이유로 그를 간신의 교과서로 삼았다. 1908년이 되서야 삭탈됐던 그의 관작이 회복됐다. 그러나 이는 친일파 이완용의 건의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것이다. 그런 덕에 현대까지 명예가 실추돼 간신의 대표주자로 남았다."(

'간신' 유자광도 할 말이 있다

) 하지만 이런 설명은 명백하게 오류다.

 

유자광의 신원 회복은 1907년 11월 18일(양력) 순종이 내린 대사면령과 관련이 있다. 이 사면령의 대상은 “나라를 개방한 이후로 이름이 죄인 대장에 있는 자로서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침범한 자와 강도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죄명”이었다. 그 결과 반역죄와 강도죄를 제외하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죄안(罪案)에 오른 모든 이들이 신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유자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사면령이 내려진 이듬해 유자광의 13대손인 유시춘(柳時春)은 조상의 신원을 회복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엎드려 생각건대, 본인의 13대조 휘(諱) 자광이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작은 보국(輔國)에 이르렀고, 훈공으로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그런데 중종조 3년에 갑자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먼 곳에 유배되어 끝내 신원되지 못했으니, 저승과 이승 사이에 머물러있는 것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는 이때를 맞이하여 융희 원년 11월 18일날 조칙 가운데 ‘원통함이 있으나 신원되지 못한 여러 사람을 모두 죄안(罪案)에서 없애주라’고 하신 처분을 받듭니다. 본인은 농사를 지어 먹는 헐벗은 백성으로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거주하여 예로부터 드문 이 은전을 듣지 못하고 다만 밭을 갈다가 지금에야 읍소하오니, 이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통촉하여 위의 사유를 황제 폐하께 아뢰어주시옵소서. 저의 선조 유자광의 죄명을 조칙에 의거해 없애주시고 이미 삭탈한 관작을 전례에 따라 복구하여 한을 품은 혼령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게 해주시기를 천만 번 울며 기원합니다.

 

탄원서가 올라가자 내각총리회의에서 유자광의 신원 회복 여부가 논의되었다. 물론 이 회의는 유자광의 신원 회복만을 위해 열린 것은 아니었다. 유자광은 단지 수많은 검토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논의 결과 내각총리회의에서는 유자광을 포함해 21명의 신원을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옛 관작까지 회복하는 일은 보류되었다. 그래서 같은 해 10월 유시춘은 다시 한 번 청원을 올린다.

 

엎드려 생각건대, 본인의 13대조 보국무령부원군 휘(諱) 자광의 죄명을 없애고 관작을 회복하는 일을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는 법부의 지령(指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관작을 회복하는 처분은 아직 받들지 못했으니 이날 애가 타고 답답하여 이에 법부의 지령에 증거를 첨부하여 청원하오니 헤아리신 뒤 관작을 회복시키셔서 유명(幽明)의 원통함을 풀어주시기를 천만 번 엎드려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 청원이 올라간 뒤에도 약 두 달 동안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시춘의 동생 유시동(柳時東)이 다시 한 번 청원을 올렸다.

 

본인의 선조 보국무령부원군 휘 자광의 관작을 회복하는 일에 대하여 본인의 사형(舍兄) 시춘이 본년 10월경에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시춘은 체류한 날이 오래되어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고, 본인이 선조에 대해 조칙을 받기를 머무르며 기다리다가 이에 세계(世系)를 별지에 첨부하여 청원합니다. 조사하셔서 보국무령부원군의 관작을 회복한다는 조칙을 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결국 유자광의 완전한 사면ㆍ복권은 그의 13대손인 유시춘ㆍ유시동 형제가 세 번이나 청원을 올린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완용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의 신원을 회복시켰다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과만 놓고 보면 최종 결재권자가 이완용이었기 때문에 그가 유자광을 사면ㆍ복권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완용의 역할이 그리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시춘 형제의 지속적인 청원이야말로 유자광 복권의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완용은 단지 접수된 민원을 논의해서 처리했을 뿐이다. 따라서 1908년 유자광의 사면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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