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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옛 사람 이야기

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by 衍坡 2019. 12. 29.

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차이점을 중심으로 -




2019.12.23.





< 목 차 >
1. 머리말
2. 고려ㆍ조선 왕조의 개창과 즉위 교서
(1) 개국의 형식과 절차에 보이는 유사성
(2)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드러난 차이점
3. 국왕의 정치권위와 정치적 지향, 그리고 정치의 현실
(1) 패도와 혈연: 고려시대 정치문화의 이상과 현실
(2) 천명과 도덕: 도덕적 군주와 새로운 정치질서의 추구
4.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은 누가 세운 나라일까? 그동안의 연구들은 ‘신흥사대부’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조선을 건국했다고 설명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공민왕 대 이후로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신흥사대부들은 전제 개혁과 역성혁명 같은 정치ㆍ사회적 개혁을 둘러싸고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다. 결국은 대세가 급진개혁파의 승리로 기울면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각주:1]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정치 변동을 ‘보혁 갈등의 구도’로 이해하는 이런 설명에는 신흥사대부의 등장과 조선 건국을 역사 발전의 산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15~16세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치열한 노력의 한 과정이었다.[각주:2]


정반대의 설명도 있다. 왕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지배 세력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고려 후기의 유력 가문 22개 중 16개 이상의 가문이 조선 건국 이후에도 중앙정계에서 주요 가문으로 존재했음을 밝혔다. 그들이 굳이 왕조 교체에 참여한 이유는 고려 후기에 들어서 국왕과 양반, 중앙 양반과 지방 향리 간의 이해관계 충돌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새로 건국된 새 왕조는 왕실과 중앙 양반의 이익을 보장하는 개혁을 추구해 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조선 건국은 고려 때부터 이어지던 중앙 양반 세력이 지방 향리 세력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자신들의 정치ㆍ사회적 이익을 보장받았음을 의미한다.[각주:3]



앞의 연구들이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에 주목했다면, 뒤의 연구는 두 왕조 사이의 연속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두 논점은 조선 건국의 의미를 사뭇 대조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여말선초의 정치행위자들이 어떤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려 했는지, 어떤 정치 질서를 지향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이른바 ‘신흥사대부론’은 조선의 건국 세력이 성리학을 수용해 성리학적인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고 설명했지만, 고려 말 성리학 수용과 정치개혁의 관계를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약점을 안고 있다. 구법파(舊法派)와 신법파(新法派)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당대의 정치ㆍ사상적 지형을 단정하거나,[각주:4] 중국 당ㆍ송변혁기에 나타난 변화를 여말선초 역사 전개의 ‘당연한 길’로 전제하는 연구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각주:5] 이 연구들은 고려 말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해 정치개혁을 추진했다면서도, 그들이 어떤 맥락에서 성리학을 수용했는지 혹은 그들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구상했던 정치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과연 성리학이 없었다면 전제 개혁과 조선 건국이 불가능했을까?


지배 세력의 측면에서 고려와 조선의 동질성을 강조한 연구도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말선초의 정치적 갈등과 조선 건국의 의미를 정치ㆍ사회적 이해관계의 문제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사상사에서 역사행위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극단적으로 추구하고자 할 때조차도 그 추구가 정당성을 얻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사상의 필터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그 작업은 “그저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도구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필터가 주는 틀 속에서 자신의 이해관계 자체를 바꾸는 일까지 포함”한다.[각주:6] 이 설명은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조선이 여러 정치행위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건국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가 안정적으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게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조선의 건국 세력으로서는 자신들만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가치와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던컨의 연구에서 그런 측면들이 충분히 고려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과연 여말선초의 정치행위자들은 어떤 현실의 문제들을 고민했을까? 그 고민 끝에 모색한 정치적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여기서는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검토해서 두 왕조의 국왕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했는지 비교해보려 한다. 혹여 둘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역사적 맥락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려 한다. 이 작업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려와 조선의 국왕이 지닌 정치권위가 어떤 덕목과 가치로부터 정당성을 얻는지 비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국왕이 권위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어떤 정치사적 조건 속에서 모색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조선을 건국한 인물들이 어떤 정치적 문제들을 고민했는지, 그 해답으로 제시한 대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고려ㆍ조선 왕조의 개창과 즉위 교서


(1) 개국의 형식과 절차에 보이는 유사성


조선 왕조의 개창 과정은 『태조실록』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해당 기사를 살펴보면 이성계의 즉위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공양왕이 태조의 사저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열고 그와 동맹하려 하여 의장(儀仗)을 늘어세웠다. 시중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에게 아뢰었다. “지금의 왕은 혼암(昏暗)하여 군도(君道)에서 벗어나고 인심도 떠나갔으니 사직과 생민[生靈]의 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를 폐하소서.” 드디어 대비의 교서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했다. (…) 공양왕은 엎드려 명을 듣고 (…) 왕위에서 물러나 원주로 갔다. 백관은 국새를 받들어 왕대비전에 두고 서무를 결재받았다. 대비가 교서를 내려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②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 (…)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과 국새를 받들고 태조의 사저에 이르니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안뜰로 들어와서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③ 태조는 굳게 거부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일어나는 것은 천명이 없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부덕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그리고는 응답하지 않았다. 대소신료와 한량기로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였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맞이했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각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는데, 어좌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각주:7]


근래의 어느 연구는 이성계의 즉위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조선왕조의 개창이 ‘선양’(禪讓)이 아니라 ‘방벌’(放伐)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이 연구는 이성계가 신민(臣民)의 추대로 즉위한 사실을 특히 강조하면서, “체제가 허락할 수 없는 국왕을 신하들이 축출하고 덕이 높은 새 군주를 옹립하는 것”이 조선의 개창 논리였다고 주장했다.[각주:8] 이성계가 공양왕(恭讓王)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설명에 오류가 있다는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렇지만 방벌의 형식과 추대의 논리가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은 다소 과도한 해석이다. 저자의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면, 조선시대 반정(反正)의 기원을 고려 왕조의 건국에서 찾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개창 형식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고려 왕조의 개창 과정에서 ①의 단계가 보이지는 않지만, 이 단계가 고려 왕조의 정치적 관행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려 국왕의 즉위의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추대 형식의 즉위 과정에서 태후(太后) 또는 대비(大妃)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왕(前王)의 폐위와 신왕(新王)의 등극 모두 왕대비의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고, 국새를 전하는 주체도 왕대비였다.[각주:9] 배극렴이 왕대비를 찾아가 국왕 폐위를 요청한 것도, 공양왕 폐위 이후에 국새를 왕대비전에 두고 결재를 받은 것도 모두 그런 고려의 전통과 맞닿는다. 이 점은 오수창의 연구에서도 지적했다. “첫 번째 단계는 공양왕의 폐출에서 이성계를 감록국사로 임명하는 것까지인데 이 과정은 왕대비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형식상 왕대비가 정국의 주체였으며, 고려 통치체제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각주:10]


②와 ③의 내용은 어떨까. 과연 이것은 고려와 무관하게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②의 단계는 배극렴과 조준이 대소신료ㆍ한량기로 등과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에게 즉위를 권하는 추대의 장면이다. 그런데 신민의 국왕 추대라는 방식은 고려 태조의 즉위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장(騎將) 홍유(洪儒)ㆍ배현경(裴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등이 은밀히 모의한 후, 밤중에 태조의 집으로 가서 ‘추대하려는 생각’[推戴之意]을 말하려 했다.”[각주:11] 왕건과 이성계의 추대 장면에 차이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배극렴과 조준이 대낮에 신료를 대거 이끌고 이성계를 찾아갔다면, 홍유와 배현경 등은 밤중에 은밀히 왕건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이 추대의 의미에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왕건의 경우에는 ①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장수들이 은밀하게 모의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③에서 이성계가 즉위를 거부하는 논리도 왕건과 비슷하다. 이성계는 본인을 추대하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일어나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부덕한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각주:12] 이성계는 왕의 즉위가 천명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즉위가 ‘혁명’(革命)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 점은 왕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밤중에 자신을 추대하러 찾아온 장수들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신하면서 군주를 치는 것은 혁명(革命)이라고 한다. 나는 실로 부덕한데 탕과 무왕의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각주:13] 왕건은 심지어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직접 이야기했고, 본인의 즉위가 “탕무지사”(湯武之事)를 본받는 일임을 충분히 이해했다. 왕건 역시 선양이 아니라 방벌로 즉위했던 것이다.


건국의 정당성을 민심에서 확인하는 레토릭도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과정에서 모두 나타난다. 『태조실록』은 배극렴과 조준을 비롯한 대소신료와 한량기로가 “국새를 받들고 태조의 사저에 이르니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라고 전한다. 이것은 인심이 이성계를 따른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정치적인 서술이다. 비슷한 서술은 왕건의 즉위 과정을 묘사하는 기사에도 등장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왕건이 거병하기로 결단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게로 달려오는 국인(國人)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리 궁궐 문 앞에 도착해 북을 치고 기뻐하며 왕건을 기다리는 사람은 만여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각주:14] 고려든 조선이든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인심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과정을 비교해보면,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개창 형식이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와 『태조실록』의 기록이 정말로 사실을 담았는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든 조선이든 이전의 왕조를 ‘방벌’로 무너뜨렸다고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려 건국 세력과 조선 건국 세력이 모두 『서경』이나 『맹자』 같은 텍스트로부터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고,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왕조의 개창 형식을 참고했을 수도 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조선 건국 세력의 정치적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큰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두 왕조의 개창 형식이 비슷한 만큼, 왕조 개창의 형식만으로는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이 글에서 왕조 건국의 과정 대신 즉위 교서를 분석하여 국왕의 정치권위가 정당화하는 방식을 살펴보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





(2)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드러난 차이점


고려와 조선이 건국되는 형식은 서로 유사하지만, 왕건과 이성계가 내린 즉위 교서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각주:15]두 교서의 차이점을 확인하려면 우선 이성계의 교서에서 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하늘이 만백성을 낳고 군장(君長)을 세워 함께 살아가는 도리로 그들을 기르게 하고 서로 안정케 하는 도리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군도(君道)에는 득실이 있고 인심(人心)에 향배가 있어서 천명(天命)의 거취가 그것에 달려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홍무 25년(1392) 7월 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들이 합사(合辭)하여 내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왕씨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훙서한 뒤에 신우가 그틈을 타서 왕위를 도둑질했다가, 죄가 있어서 물러났으나 아들 창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하여 능히 종사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각주:16]



이성계의 즉위 교서 서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군주의 도리와 인심의 향배에 따라 천명이 옮겨갈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성계는 이 대목에서 본인의 즉위가 천명을 받은 정당한 행위임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즉위를 천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두 번째는 고려 말의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부각하는 동시에 신민이 자신을 추대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성계는 이 대목에서 인심(人心)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본인의 즉위가 정당하다는 점을 재차 천명했다. 마지막은 이성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득이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는 다분히 정치적인 레토릭이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즉위가 왕위에 대한 욕심에서 기인했거나 무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려 했다. 요컨대, 이성계의 즉위 교서는 천명의 거취와 인심의 향배를 통해 그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매우 정교한 레토릭으로 구성된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왕위의 가장 근본적인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천(天)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즉위 교서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역시 ‘천명’(天命)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왕건의 즉위 교서는 이성계의 글과 사뭇 다르다. 일단 왕건의 교서를 살펴보고 몇 가지 차이점을 확인하려 한다.


ⓐ 전주(前主: 궁예)는 4군(四郡)이 흙 무너지듯 무너지는 때를 맞아 도적의 무리를 제거하고 점점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천하[海內]를 다 아우르는 데 미치지 못하고 갑자기 잔혹함과 포악함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간사함[姦回]을 가장 올바른 것[至道]으로 여기고 위협과 업신여김을 중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요역(徭役)이 번거롭고 부세(賦稅)가 무거워 사람은 줄어들고 땅은 텅 비었다. 그런데 오히려 궁실만은 크고 장대하며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힘든 요역이 그치지 않으니 원망과 비난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함부로 연호(年號)를 정하고 황제라 일컬었으며[稱尊] 처자를 살육해서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고 귀신과 사람이 함께 원한을 품어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荒墜厥緖]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 나는 여러 공(公)의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九五]에서 관할하는 궁극에 올랐으니, 나쁜 풍속을 좋게 고치고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려 한다[咸與惟新]. 마땅히 법도를 고칠 규범을 쫓을 것이며 깊이 가까운 데서 얻는 원칙[伐柯之則]을 거울삼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같이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어울려 즐거워할 것[魚水之歡]이며 온 천하는 경사[晏淸之慶]를 도우리니 나라의 뭇 백성은 마땅히 나의 뜻을 다 알도록 하라.[각주:17]



이성계의 즉위 교서와 비교하면, 왕건의 즉위 교서에서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하나는 ‘천명’을 받았다는 관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내용은 궁예의 폭정이다. 궁예의 포학한 성정과 잔혹한 폭정을 부각하여 왕건 본인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전략이 교서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서술에서는 궁예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할수록 왕건 본인의 즉위가 지니는 정당성도 훨씬 더 강해진다. 그렇지만 천명이 바뀌어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는 식의 수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왕건은 단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고 귀신과 사람이 함께 원망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천명을 활용해 즉위를 근본적으로 정당화하던 이성계의 교서와는 자못 다르다.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은 궁예의 학정을 왕건 본인이 직접 하나씩 거론한다는 사실이다.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서 우왕과 창왕이 왜 국왕으로서 자격이 없는지, 또 공양왕이 얼마나 잘못된 정치를 일삼았는지를 폭로하는 화자는 이성계를 추대한 신민이다. 이 대목에서 이성계의 즉위가 천명뿐 아니라 인심까지 얻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반면 왕건의 교서에서는 이런 장치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러 공(公)의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九五]에서 관할하는 궁극에 올랐”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건의 즉위에 ‘인심’이라는 측면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왕자(王者)가 일어날 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명과 인심이 그에게로 옮겨간다는 유학의 전통적인 레토릭이 왕건의 조서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측면이 더 중요하다.


왕건의 즉위가 “여러 공들의 추대”로만 정당성을 얻는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유학의 전통적인 레토릭에 따르면, “하늘의 뜻을 따르면 살아남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망한다.” “하늘의 뜻을 즐거워하면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보전한다.” 여기에는 천명이 거스를 수 없는 공적 권위를 지닌다는 생각이 배어있다. 이 관념에 따르면, 국왕이 천명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정치행위자들이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공적인 권위를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왕건은 즉위 당시에 다수의 정치행위자로부터 공인받은 보편적인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의 권위는 그를 추대한 이들의 변심에 따라 얼마든지 정치적 도전에 직면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던 셈이다. 왕건을 추대한 인물들이 고려 건국 직후에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려 건국 세력들이 천명을 운운하는 유학자들의 정치적 레토릭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왕건은 “신하가 군주를 방벌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면서 탕왕과 무왕의 고사를 거론했다. 그는 거사를 망설이며 “후세에 구실이 될까 염려스럽다”[恐後世將以爲口實]라고 했는데, 이 말의 출전은  『서경』의 「중훼지고」(仲虺之誥)다.[각주:18] 더구나 왕건은 자신을 추대한 환선길(桓宣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에게 직접 일갈했다.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정해졌는데 너희들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각주:19] 훗날 최승로도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에서 태조가 천명을 받아서[受命] 왕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각주:20] 이런 사실들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건국자들이 천명이라는 키워드가 내포하는 정치적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왕건의 즉위 조서에서는 천명에 관한 레토릭이 등장하지 않는 걸까? 과연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顯陵)





3. 국왕의 정치권위와 정치적 지향, 그리고 정치의 현실


(1) 패도와 혈연: 고려시대 정치문화의 이상과 현실


고려의 건국 세력은 천명 개념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잘 이해했고, 본인들의 왕조 개창을 정당화하는 데 그 개념을 일정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왕건이 즉위 교서에서 천명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그 개념이 당대의 현실에서 정치적 효과를 거두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건을 추대한 홍유와 배현경 등은 왕건을 추대할 때 그의 덕망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덕망만큼이나 왕건의 사회적 배경도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권세와 지위가 중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자가 없으니 사람들의 마음이 공을 바라보는 이유입니다.”[각주:21] 이 발언에서는 덕망만큼이나 ‘권세’와 ‘지위’도 중요한 요소로 거론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왕건은 선대부터 송악(松嶽)에 세력 기반을 다진 대호족 출신이었고, 평산 박씨(平山 朴氏) 등 다른 유력 호족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할 때는 왕건이 여러 차례 군사작전을 주도하면서 무력적인 기반도 확고하게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22] 왕건을 추대한 인물들이 눈여겨봤던 것은 바로 이런 측면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건의 덕망만큼이나 그의 현실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에 주목했던 것이다.


고려 건국 직후에 발생한 환선길 모반 사건은 명분과 도덕보다 실력과 힘을 중시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고려사』는 이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전한다. 그에 따르면, 환선길은 왕건을 왕위에 올린 공신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환선길의 아내는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의 재주와 힘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사졸들이 복종하는 데다 큰 공도 세웠는데 권력[政柄]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분하지 않습니까?” 아내의 말을 듣고 공감했던 환선길은 왕건이 즉위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사는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고 환선길 본인도 목숨을 잃었다.[각주:23] 환선길의 상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지만, 그가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세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왕건이 환선길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우대했다거나 환선길이 정예군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느 정도 군사적인 기반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아내가 “사졸들이 따른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환선길 모반 사건에서 의미 있는 사실은 세 가지다. 환선길이 왕건을 추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점, 그런 그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반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반란의 정당성을 자신의 무력적 기반과 공로에서 찾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당시의 정치 운영이 도덕과 명분에 기반하기보다 철저히 힘과 실력에 의지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런 현실에서 천명으로 집약되는 왕자의 덕을 내세워 충분한 정치적 효과를 거두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고려에서도 ‘덕성’(德性)과 ‘공심’(公心)을 중시했다는 지적이 있다.[각주:24] 그 견해에 따르면, 왕건은 즉위 과정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자신의 도덕적인 면모를 부각하려 했다. 만년에는 「훈요」(訓要)를 남기면서 요ㆍ순의 권력승계 과정을 거론하고 공심을 강조하기도 했다.[각주:25] 고려 국왕들이 임종 때 굳이 정침(正寢)에 나아가 신료들 앞에서 유조(遺詔)를 작성하고 후사를 지명했던 것도 왕위계승의 공적인 측면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연구에서도 인정하듯이, 고려의 정치 현실에서 천명과 결합한 도덕적 권위가 국왕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각주:26] 국왕의 위상을 개인의 역량과 힘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가치로 정당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려 사람들이 “더 강한 세(勢)를 가지고 권세가들이 도전해오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능력”을 “고려 정치의 ‘덕’(德)”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각주:27]


고려 국왕의 권위를 지탱하는 또 다른 요소는 태조 왕건의 자손이라는 혈연적 정당성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새로 즉위한 고려 국왕은 자신이 즉위한 사실을 조상에게 고유하는 절차를 밟았다 한다. 고유례(告由禮)는 고려 초에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에서 이루어지다가 나중에는 태묘(太廟)나 경령전(景靈殿)에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는 태조와 선왕의 직계 4대조를 모신 경령전이었다. 태묘와 현릉이 신하를 대신 보내 알리는 장소였다면, 경령전은 새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 직접 행차해서 본인의 즉위 사실을 고유하는 곳이었다.[각주:28] 그런데 국왕이 경령전에서 즉위 사실을 알리는 절차가 고려시대 즉위 의례의 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고려 국왕에게 그 과정은 본인이 왕건의 혈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과시해서 자신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각주:29] 여러 신앙을 활용해 왕건을 신격화하고 그의 동상을 만들어 경배했던 고려시대의 모습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각주:30]


왕건의 자손이라는 혈연적 정당성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국왕의 상징적인 권위를 보장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무신집권기의 고려 국왕이 정치적 실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었음에도 상징적인 존재로나마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무신들이 국왕을 폐위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던 건 사실이지만, 태조의 혈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물을 왕위에 올리는 건 여전히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최충헌(崔忠獻)이 국왕을 마음대로 교체할 만큼 강력한 정치적 실권을 확보하고도 직접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태조로부터 이어지는 고려 왕실의 신성성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었다.[각주:31] 그런데 무신집권기 후반에는 국왕이 지닌 혈연적 정당성이 역설적으로 국왕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예컨대, 최충헌은 직접 왕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얼마든지 국왕을 교체할 수 있었다. 태조와의 혈연관계만 이어지면 누구든지 왕위에 올릴 수 있었다. 국왕이 왕건의 자손 중에서 특정한 누군가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무신집권기 말에는 “용손(龍孫)이 금상(今上)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거나 “용손은 한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꼭 금상이어야 하는가”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각주:32] 이런 현상들은 혈연적 정당성이 국왕의 정치권위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고려 국왕의 혈연적 정당성은 몽골 복속기에 들어서 크게 약해졌다. 고려 국왕은 이제 태조와의 혈연보다는 몽골 황제 혹은 몽골 황실과의 긴밀한 관계로부터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몽골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고려 국내에서 실질적인 규정력을 지녔고, 고려 국왕은 몽골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정치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다만 고려 국왕의 정치 권력이 몽골에 철저히 종속된 탓에 고려 국왕은 몽골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각주:33] 그렇지만 이 현상을 몽골의 정치적 ‘간섭’과 ‘압제’로 국왕의 권위가 축소된 결과로만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근래의 연구는 고려 국왕이 지닌 정치권위의 성격이 몽골 복속기에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지적한다.[각주:34] 그 설명에 따르면, 몽골 황제의 권력과 권위가 고려 내부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니면서 고려 국왕의 권위도 상대화했다고 한다. 고려 국왕은 한 나라의 군주[外國之主]이면서도 몽골 황제의 권위에 귀속된 하위 관료이자 부마의 역할까지 부여받았다. 몽골 황제가 고려 내부에서도 최상의 권력자로 자리매김하자 고려 국왕도 이제는 황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치권위를 보장받아야 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정치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몽골이나 고려에 체류하며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다른 정치행위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각주:35] 몽골 황제와의 관계가 국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른 상황에서 종전의 혈연적 정당성이 약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각주:36]



혈연적 정당성이 약해진 상황에서 고려 국왕이 자신의 정치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실력과 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려 국왕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몽골 황실과 결합한 여러 정치세력과 경합하면서 자신의 정치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자신의 정치력과 세력이었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국왕은 설령 왕건의 후예라 하더라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충혜왕의 사례는 바로 그 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이] 교제(郊祭)를 지내고 사면령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대경 도치(朶赤)와 낭중 베시게(別失哥) 등 여섯 사람을 보내왔다. 왕은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 했다. 고용보가 말했다. “황제께서는 항상 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왕께서 나가서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교외에 가서 영접했다.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에 도치와 나이주(乃住) 등이 왕을 발로 차고는 결박했다. 왕이 급히 원사(院使)인 고용보를 부르자 고용보는 그에게 욕을 했다. (…) 도치 등은 왕을 부축하여 말 한 필에 싣고 달려갔다. 왕이 조금만 쉬자고 청하였지만 타적 등은 칼을 뽑아 들고 협박했다.[각주:37]


대도(大都)에 도착한 충혜왕은 2만여 리나 떨어진 게양으로 유배를 떠나야했다. 『고려사』는 당시 충혜왕을 호종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한다. 이런 정치 현실에서 고려 국왕들이 자신의 정치권위를 확보하는 방법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측근정치’라는 정치 형태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측근정치의 구조는 충렬왕 대에 나타나 공민왕 대까지 줄곧 이어졌다.[각주:38] 고려 후기의 국왕들은 본인의 생존과 정치권위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세력 경쟁 혹은 패권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2) 천명과 도덕: 도덕적 군주와 새로운 정치질서의 추구


유가의 전통에서 천명은 대개 군주의 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래에 옮긴 맹자와 만장의 대화는 유학자들의 관념을 잘 보여준다.


만장이 물었다. “요 임금이 천하를 순에게 주었다 하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천자는 천하를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만장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순이 천하를 소유한 것은 누가 준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하늘이 주신 것이다. (…) 옛날에 요 임금이 순을 하늘에 천거하였는데 하늘이 받아들이셨고, 백성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었는데 백성들이 받아들였다. (…) 이렇게 하늘이 주고 백성들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천자는 천하를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 순은 요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를 피하여 남하(南河)의 남쪽으로 가 계셨는데, 천하의 제후로서 조회하러 오는 자들이 요 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으며, 송사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요 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으며, 공덕을 칭송하는 자들이 요 임금의 아들을 칭송하지 않고 순을 칭송하였으니, 그래서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다.”[각주:39]


하지만 천명이라는 용어가 본래부터 도덕성과 긴밀하게 결부했던 것은 아니다. 주나라 건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천(天), 즉 하늘은 그저 절대적 주재자를 의미했을 뿐이다. 주재자로서의 천은 인간의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건국되면서 ‘천명’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한 주나라는 천명으로 자신들의 방벌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천명이 왕조의 멸망과 건국을 설명하는 레토릭으로 활용되면서 하늘과 군주를 이어주는 매개로 ‘덕’(德)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늘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천하를 넘겨주고 덕이 있는 사람은 천명을 받아 자신의 덕을 펼쳐야 한다.[각주:40] “하늘이 하민(下民)을 도와 임금을 세우고 스승을 세운 것은 능히 상제를 도와 사방(四方)을 사랑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다”라거나, “덕은 오직 정사(政事)를 잘하는 것이고 정사는 백성을 잘 양육함에 달려있다”는 『서경』의 구절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각주:41] 천명을 받은 군주는 상제를 받들어 온 나라 사람들을 잘 양육하고 안정케 할 책무가 있고, 이 책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천명이 옮겨간다는 발상이 생겨난 것이다.



천명에 관한 이런 정치적 의미는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도 반영되었다. 천명을 운운하는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는 국왕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훨씬 더 정교하게 짜여있다. ‘이성계는 덕을 갖춘 인물이라 천명을 받았고, 천명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을 잘 양육하고 안정케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런 논리가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 담길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천명에 담긴 정치적 가치에 일정하게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고려의 태조인 왕건도 도덕적인 정치권위를 존중했지만, 정작 그를 추대한 인물들은 도덕적 가치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다. 왕건의 즉위 교서에 천명이 거론되지 않은 것은 실력과 세력을 더 우월한 가치로 여기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계의 처지는 그와 사뭇 달랐다. 이성계는 천명이라는 공적 권위로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했고, 왕위에 올라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도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성계가 즉위 교서의 첫머리에서 천명을 받았다고 밝힌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즉, 조선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덕을 갖춘 군주가 온 나라 사람들을 잘 양육하고 안정케 해야 한다는 정치적 가치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명과 인심을 운운하는 이성계의 즉위 교서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성계의 즉위 교서와 왕조 개창 이후 정도전이 제시한 정치질서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하면, 이성계가 반포한 즉위 교서의 모든 내용을 정치적 허구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성계의 즉위 교서는 『서경』에 담긴 천명의 논리를 반영한다. 그런데 이 즉위 교서를 작성한 인물이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건국 이후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질서 구상에서도 정도전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가 중요하게 참고한 텍스트가 바로 『서경』이기 때문이다.


주로 정도전의 재상정치론에 주목해 온 기존의 연구들은 그가 『주례』를 바탕으로 국왕의 권력을 제어하는 신권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상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근래의 한 연구가 제시한 결론은 그런 통설과 다소 거리가 멀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관한 선행 연구들이 『주례』를 정당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책의 내용이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관료제를 설명하는 『주례』는 어디까지나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를 전제하고 작성된 저술이다. 신료에 관한 저술이 『주례』의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질서 속에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정도전이 『주례』를 참고한 이유도 분명하다. 주공이 그 책 안에 “『서경』의 이상적 모델인 주나라의 정치제도”를 자세히 기록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각주:42] 그렇다면 정도전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했던 텍스트는 『서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연 정도전은 어떤 정치질서를 구상했으며 『서경』은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었을까? 같은 연구에 따르면, 정도전이 『서경』으로부터 추출한 정치적 자원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최상의 정치행위자인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청사진을 얻어냈고, 성왕(聖王)으로 표현되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 모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운 국가공동체의 건립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과 방법을 얻어낸 것도 정도전의 소득이었다. 왕조 개창 이후에 그가 집필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에는 이런 자원들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한다.[각주:43]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정도전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질서는 천명을 받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통합된 국가였다. 정도전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어떻게 권력을 분할해서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느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패도를 앞세워 각축을 벌이던 현실을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통치질서 안으로 편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군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천명이 동시에 군주의 자의적인 정치를 규제하는 논리로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천명은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지만, 부덕한 정치가 이루어지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논리도 내포했다. 맹자가 선양과 방벌의 논리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천명이 지닌 양면성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군주의 정치가 도덕적인지 여부 혹은 그의 행위가 천명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맹자는 인심의 향배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인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인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게 된다는 맹자의 논리는 결국 인정(仁政)에 대한 당위로 이어진다. 이런 맹자의 논리는 『조선경국전』에도 반영되었다. “임금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을 행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임금을 부모처럼 우러러보게 한다면, 안부(安富)와 존영(尊榮)의 즐거움을 길이 누리고 위망(危亡)과 복추(覆墜)의 우환이 없게 될 것이다. 인(仁)으로 직위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각주:44] 이런 논리에 따르면 국왕의 정치권위는 철저히 도덕정치가 이루어질 때만 보장받을 수 있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일원적 정치질서의 최고 정치행위자인 국왕은 철저히 도덕적인 군주여야 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정도전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질서는 도덕 군주를 정점으로 삼아 도덕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일원적인 왕정질서였다.[각주:45]


하지만 과연 ‘정치가’가 내세우는 논리와 현실정치의 권력운용이 일치한다고 말해도 좋은가? 물론 두 가지가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선의 통치자들이 국가의 제도를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도덕정치의 구현을 고민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조선의 통치자들은 현실의 정치와 제도에 어떻게 도덕을 구현할 것인지 고민했고, 조선 초기에 정비된 예제는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조선의 사위의례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예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통치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도덕의 정치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해 낸 고대의 정신을 어떤 제도가 담아낼 것인가”였다. 그들은 고려에서 시행되던 역월제(易月制)를 전격적으로 폐지했고, 사위의례를 흉례(凶禮)의 일부로 배치했다. 새로운 국왕의 즉위가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례 안에 배치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흉례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적 책무를 왕으로서의 정치적 책무에 앞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의 바탕에 도덕적 책무감이 자리해야 하며, 임금이 선도적으로 이를 수행하고 전 사회가 자발적으로 이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조선의 정치 문화의 지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각주:46]


조선 국왕의 정치권위가 도덕으로부터 비롯한다면 여전히 국왕의 혈통이 중시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조선에서도 국왕의 혈통이 중요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모두 혈통을 중시했다고 해서 그 혈통을 바라보는 인식까지 같았던 것은 아니다. 고려에서 혈연적 정당성은 철저히 태조의 자손인가 여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은 단순히 이성계의 자손이라는 점만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없었다. 왕위는 원칙적으로 ‘적적상승’(嫡嫡相承)의 원칙에 따라 종통을 계승한 자에게 돌아가야 했다. 달리 말하면 왕위계승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정통의 계승’이었다. 조선 성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친부를 추봉하고 부묘하려 하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런 관념 때문이었다. 특히 친부를 추봉하려는 성종에게 신하들이 올리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부터 제왕은 방계(旁系)ㆍ지자(支子)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면 의리상 사친을 돌아보지 않는 법입니다.”[각주:47]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혈통은 단순히 혈연적인 관계만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혈연관계뿐 아니라 도덕적인 당위성까지도 중요하게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 점은 고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모습이었다.[각주:48] 그런 면에서 고려와 조선에서 ‘혈연적 정당성’이 지니는 의미는 서로 결이 달랐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왜 도덕적 군주의 도덕적인 통치를 지향했을까? 고려의 정치가 혼란해진 이유가 부도덕한 정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부도덕한 정치는 패도를 내세워 명분을 어지럽힌 정치에서 출발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은 『고려사』에 붙은 정인지의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서 엿볼 수 있다.

후손들이 혼미해서 인종[仁廟] 때 권신(權臣)이 제멋대로 굴며 군병(軍兵)을 끌어안고 왕위[神器]를 엿보는 일이 한 번 벌어지자, 의종 때는 순리를 범하여 태아검(太阿劍)을 거꾸로 잡듯이 신하가 정권을 잡는 일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로부터 크고 간악한 권신들이 번갈아가며 세력을 잡고서 임금 앉히기를 바둑이나 장기 두듯이 했습니다. (…) 충렬왕은 연회에서 폐행(嬖幸)과 어울리다 끝내 부자지간에 불화를 빚었습니다. 충숙왕 이래로 공민왕 때까지 변고가 자주 일어나 쇠미함이 더욱 심해졌고, 위조(僞朝: 우ㆍ창)에 들어서 근본이 다시 오그라들어 역수(曆數)가 마침내 참된 주인에게 돌아왔습니다.[각주:49]



흥망성쇠를 기준으로 고려의 ‘왕조사’를 서술하는 이 글은 고려가 중기부터 점차 쇠미해졌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쇠퇴의 원인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왕의 무능과 도덕적 타락이고, 다른 하나는 권신과 폐행의 발호였다. 왕의 무능과 도덕적 타락 때문에 왕정이 무력해졌고, 그 틈을 타 권신과 폐행이 자신의 이익과 패권을 추구해 나라가 점점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 말부터 정치ㆍ사회의 개혁을 추구했던 조선의 건국자들이 도덕적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정치질서를 구상한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이었던 것이다. 조선 태조의 즉위 교서는 바로 그런 정치적 지향점을 반영한 하나의 상징적인 정치적 텍스트였다.






4. 맺음말


여말선초의 정치행위자들은 어떤 문제들을 고민했는가? 그들이 고민 끝에 모색한 정치적 대안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었다.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비교하여 국왕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원천이 무엇인지 살피고, 두 교서의 차이점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국왕이 지닌 권위의 정당성이 무엇인지를 비교하는 작업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글에서는 조선 국왕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정치적인 레토릭이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어떤 문제에 대응하며 나온 대안인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비교하면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천명과 인심으로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이성계의 교서와 달리, 왕건의 교서에서는 천명과 인심이 왕자에게 옮겨간다는 레토릭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왕건은 단지 궁예의 폭정과 여러 사람의 추대 때문에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음을 천명했을 뿐이다. 동아시아의 정치 풍토에서 천명이 거스를 수 없는 공적 권위를 부여한다면, 왕건은 자신의 위상을 공고하게 할 만한 공적인 정치 권위를 확보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왕건이 천명과 인심을 골자로 하는 유학의 정치적 레토릭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건국세력은 방벌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천명과 인심이라는 레토릭을 일정하게 활용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왕건의 즉위 교서에는 천명이라는 공적인 권위의 원천이 등장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고려의 정치 현실과 관련이 있었다. 고려가 개창되었을 당시 정치의 영역에서 더 중요하게 여긴 덕목은 명분과 도덕이 아니라 실력과 힘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천명을 운운하며 왕자의 덕을 내세우는 건 정치적으로 큰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고려의 정치행위자들도 도덕적인 정치권위를 이상으로 여기기는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도덕적인 정치권위는 확립되지 못했다. 국왕의 정당성도 개인의 역량과 힘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가치로 정당화하지 못했다.


한편, 고려 국왕의 권위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왕건이라는 혈연적 정당성이었다. 그것은 극심한 정치변동 속에서도 국왕과 고려 왕실의 상징적 권위를 보장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하지만 국왕의 혈연적 정당성이 역설적으로 국왕 본인의 왕위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혈연적 정당성은 국왕의 정치권위를 확실하게 보장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몽골 복속기에 들어서 혈연적 중요성은 크게 축소되었다. 고려 국왕의 위상이 몽골제국의 신하로 상대화하면서 다른 정치행위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혈연적 정당성이 약해진 상황에서 고려 국왕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력과 힘이었다. 이제 고려 국왕은 다른 정치행위자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와 달리 이성계는 천명과 인심 양쪽에서 자신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명이었다. 이 개념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자신들의 방벌을 정당화하면서 활용한 장치였다. 그 레토릭에서 천명을 받은 주체인 군주는 ‘유덕자’여야 했다. 그에게는 세상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안정케 할 의무가 있고,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천명이 옮겨갈 수 있다. 이런 레토릭이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즉위가 공적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을 만큼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 건국세력이 도덕적인 정치권위의 필요성에 일정하게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명을 운운하는 이성계의 즉위 교서가 정치적 텍스트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성계의 즉위 교서와 왕조 개창 이후 정도전이 제시한 정치질서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하면,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정치적 허구로만 폄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교서의 작성자가 정도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건국 이후에 새로운 정치질서를 제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가 중시했던 텍스트가 바로 『서경』이었다. 그가 『서경』을 바탕으로 구상한 새로운 정치질서는 도덕적인 군주를 정점으로 삼아 도덕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일원적인 왕정질서였다. 그에게 중요한 건 군주의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가 아니라, 패도를 앞세워 각축을 벌이던 정치행위자들을 도덕적 정치권위가 지배하는 통치질서 안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세력이 내세웠던 정치적 논리가 반드시 현실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조선 초의 정치행위자들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바탕으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또 임금이 그 도덕정치의 선도적인 위치에 서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조선 초의 예제는 바로 그런 공감대 위에서 확립된 것이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혈통’이라는 측면이 중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종법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혈통은 단순히 혈연적인 관계만을 지칭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혈통은 생물학적 혈연뿐 아니라 종통이라는 공적이고 도덕적인 개념까지 중요하게 고려하는 개념이었고, 이것은 고려와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건국자들은 왜 도덕 군주의 도덕적인 정치를 지향했는가. 아마도 그들이 고려 말에 지녔던 현실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초의 정치행위자들이 인식했던 고려의 역사에서 그런 현실인식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고려가 쇠퇴한 이유는 왕의 무능과 도덕적 타락 때문에 왕정이 무력해졌고 권신과 폐행이 그 틈을 타 자신의 이익과 패권을 추구해 각축전을 별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려 말부터 정치ㆍ사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구했던 조선의 건국자들이 도덕적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정치질서를 구상한 것은 그 현실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이었다. 조선 태조의 즉위 교서는 바로 그런 정치적 지향점을 반영한 하나의 상징적인 정치적 텍스트였다.[각주:50]





*이 글은 2019년 2학기 조선시대사특강 수업의 기말보고서로 작성되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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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흥사대부론’의 선구적인 연구로는 이우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무신집권기에 ‘능문능리’(能文能吏)한 사대부가 출현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특징으로 ①지방의 중소지주, ②향리 출신, ③과거를 통한 중앙 진출, ④조선 건국의 주동 등을 들었다. (이우성, 1964, 「高麗朝의 ‘吏‘에 對하여」, 『역사학보』 23) 민현구는 이들이 공민왕 때 신돈의 개혁을 거치며 ‘신진문신세력’으로 성장했다고 보았고, 한영우는 신흥사대부가 우왕ㆍ창왕 대를 거치면서 ‘온건개량파’와 ‘급진개혁파’로 분기했다고 파악했다. (민현구, 1968,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ㆍ下), 『역사학보』 38ㆍ40 ; 한영우, 1973, 「朝鮮王朝의 政治ㆍ經濟基盤」, 『한국사』 9) 이태진은 이우성과 달리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한 문신과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를 서로 다른 존재로 구분했지만, 신흥사대부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라는 점,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했다는 점, 고려 말의 개혁을 주도하며 조선 건국을 주도했다는 점은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아울러 신흥사대부가 성리학을 학습했고 농업 생산력 발전이 그들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사회경제적 배경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태진, 1983, 「高麗末 朝鮮初의 社會變化」, 『진단학보』 55) 이 연구들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를 계기적 발전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연구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여러 약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기존 연구의 약점을 예리하게 비평했다. (송웅섭, 2017,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 세력의 이해’ 다시 보기」, 『역사비평』 120) [본문으로]
  2. 한국사에서 조선시대의 역사적 위상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조선을 근세사회로 보는 쪽이 가장 적극적인 입장이라면, 조선 후기를 중세해체기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조선 건국을 중세 사회의 재편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건국과 조선 사회의 역사적 위상에 관한 논의로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중세사회의 변화와 조선 건국』, 혜안을 참고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존 B. 던컨, 김범 역, 2013, 『조선왕조의 기원』, 너머북스. [본문으로]
  4. 도현철, 1999, 『고려말 사대부의 정치사상연구』, 일조각. [본문으로]
  5. 문철영, 1982, 「여말 신흥사대부들의 신유학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 3.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술로는 “여송(麗宋)간의 교류 및 고려유학의 성장을 통해 송에서 형성되고 있던 신유학의 단계적 흐름을 고려 사상계에서도 똑같이 밟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문철영이 여말선초와 당송변혁기의 사상적 흐름을 완벽하게 동일시하는 건 아니다. “1170년(의종 24)의 무신난은 인종ㆍ의종대에 모순으로 노정되기 시작하던 사상계 일각에서의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고려 사상계의 자체적인 발전과정에 따라 극복할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유학사상의 발전적 전개에 왜곡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려 사상계가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극복해야 했다는 견해는 중국사의 당송변혁기야말로 고려가 가야하는 ‘당연한 길’이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바로 그 점에서 고려와 송의 유학사 전개가 달라졌던 지점을 “왜곡”이라고 표현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본문으로]
  6. Quentin Skinner, 1978,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vol.1: The Renaiss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xii-xiii ; 김영민, 2013, 「조선중화주의의 재검토」, 『한국사연구』 162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1392) 7월 17일 丙申. [본문으로]
  8. 오수창, 2016, 「조선왕조 개창의 형식과 논리」, 『동방학지』 176. [본문으로]
  9. 김철웅, 2015, 「고려시대 국왕의 즉위의례」, 『한국학』 38-2. [본문으로]
  10. 오수창, 2016, 앞의 글. [본문으로]
  11.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년(918) 6월. “騎將洪儒裴玄慶申崇謙卜智謙等密謀, 夜詣太祖第, 將言推戴之意.” [본문으로]
  12.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1392) 7월 17일 丙申, “自古王者之興, 非有天命不可。 余實否德, 何敢當之!” [본문으로]
  13.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년(918) 6월, “以臣伐君, 斯謂革命, 予實不德, 敢效湯武之事乎. 恐後世將以爲口實.” [본문으로]
  14.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년(918) 6월. “諸將扶擁而出, 黎明, 坐於積穀之上, 行君臣之禮. (…) 國人奔走來赴者, 不可勝記, 先至宮門鼓譟以待者, 亦萬餘人.” [본문으로]
  15. 엄밀히 구분하자면 왕건이 즉위 직후에 내린 글은 ‘조서’[詔]이고, 이성계가 반포한 글은 ‘교서’[敎]다. 전자가 황제국의 제도를 채택한 것이라면, 후자는 제후국의 분의에 걸맞는 제도를 채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두 제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 ‘교서’ 혹은 ‘즉위 교서’로 표현하려 한다. 고려시대의 황제국 제도와 조선 초기의 제후국 제도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 연구가 유익하다. 노명호, 1999,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한국사연구』 105 ; 최종석, 2010, 「조선초기 ‘時王之制’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 52. [본문으로]
  16.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1392) 7월 17일 丙申. [본문으로]
  17.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918) 6월. [본문으로]
  18. 『시경집전』, 「탕서」, 仲虺之誥. “成湯放桀于南巢, 惟有慙德, 曰: ‘予恐來世以台爲口實.’” [본문으로]
  19.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桓宣吉. “朕雖以汝輩之力至此, 豈非天乎? 天命已定, 汝敢爾耶?” [본문으로]
  20. 『고려사』 권93, 열전6, 제신2, 崔承老. “伏審我太祖神聖大王之御極也, 時當百六, 運協一千. 當初翦亂夷凶, 天生前主而假手, 在後膺圖受命, 人知聖德以歸心.” [본문으로]
  21.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년(918) 6월. “且權位重者, 皆遭殺戮, 今之德望未有居公之右者, 衆情所以望於公也.” [본문으로]
  22. 채수환, 2008, 「王建의 高麗建國 過程에 있어서 豪族勢力」, 『백산학보』 82. [본문으로]
  23.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桓宣吉. “桓宣吉, 與其弟香寔, 俱事太祖, 有翊戴功. 太祖拜宣吉馬軍將軍, 委以腹心, 常令率精銳宿衛. 其妻謂曰: ‘子才力過人, 士卒服從, 又有大功, 而政柄在人, 可不懊乎?’ 宣吉心然之, 遂陰結兵士, 欲伺隙爲變. (…) 一日, 太祖坐殿, 與學士數人, 商略國政, 宣吉與其徒五十餘人持兵, 自東廂突入內庭, 直欲犯之. (…) 宣吉見太祖辭色自若, 疑有伏甲, 與衆走出, 衛士追及毬庭, 盡擒殺之.” [본문으로]
  24. 장지연, 2016, 「고려 초 卽位儀禮와 喪禮를 통해 본 권위의 성격」, 『한국중세사연구』 47. [본문으로]
  25. 왕건의 「훈요」는 고려 전기의 정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권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숙종ㆍ예종 연간에 추진된 동전 유통 정책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는데, 신하들은 반대의 논리를 내세우며 「훈요」를 근거로 활용했다. 예종이 태조의 「훈요」를 신하들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그들의 논리를 반박한다는 사실도 「훈요」가 가진 정치적 권위를 잘 보여준다. “뜻하지 않게도 신하들이 ‘당과 거란의 풍속을 쓰지 말라’는 태조의 유훈에 의지해서 전폐 사용을 배척한다. 그러나 그 유훈에서 쓰지 말라고 한 것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속을 말한 것이다. 문물과 법도에서 중국(中國)을 버리고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고려사』 권79, 지 33, 식화 2) 하지만 왕건의 유훈이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권위를 지님에도 왕건이 지향한 도덕적 정치권위가 고려에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본문으로]
  26. 장지연은 도덕에 기초한 정치권위가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왕건은 대신들을 모두 모은 공개적인 자리나 공식적인 유조와는 별개로 박술희를 불러 내전에서 작성한 비밀스러운 훈요를 남겼다. 천명으로 합리화하기는 하였으나, 추대는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태자로서 상당 기간을 보내고 즉위한 경우에도 왕위는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혜종은 후백제 정벌 과정에서 혁혁한 무훈을 거두었으며, 일찌감치 태자로 자리를 잡은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군사들을 끼고 있어야 했다. 광종~경종대 왕실 내부의 잔혹한 숙청도 마찬가지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심지어 건국한 지 약 1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유덕자에 대한 추종이나 왕씨의 왕위 세습에 대한 관성도 아직 뚜렷하지 않았”고, “개경 바깥만 나가도 국왕의 권위에 대한 인식도 희미”했다고 한다. (장지연, 2016, 앞의 글) [본문으로]
  27. 김지영, 2012, 「조선시대 嗣位儀禮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61. [본문으로]
  28. 김철웅, 2015, 앞의 글. [본문으로]
  29. 태조의 자손이라는 혈통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은 왕조 초기부터 태조의 자손끼리 근친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정용숙, 1988, 『고려 왕실 족내혼 연구』, 새문사 참조. [본문으로]
  30. 왕건의 동상에 관해서는 노명호, 2004,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 『한국사론』 50 참조. [본문으로]
  31. 이정란, 2014, 「高麗 王家의 龍孫意識과 왕권의 변동」, 『한국사학보』 55. [본문으로]
  32. 『고려사』 권130, 열전43, 반역4, 金俊 ; 『고려사』 권130, 열전43, 반역4, 林衍. [본문으로]
  33.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본문으로]
  34. 이익주는 고려 왕에게 부여된 세 가지 지위, 즉 정동행성승상ㆍ부마ㆍ고려 국왕 가운데 ‘고려 국왕’이 가장 중요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의 기록을 그 근거로 들었다. “왕[忠烈王]이 [원의] 조사(詔使)가 왔다는 말을 듣고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을 이끌고 시복(時服) 차림으로 서문 밖에 가 사신을 맞았다. 왕은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서 비록 조사가 오더라도 성밖에 나아가 사신을 맞은 적이 없었다. 역관[舌人] 김태(金台)가 원에 갔을 때, 성관(省官)이 그에게 말했다. ‘부마이신 국왕께서 조사를 맞이하지 않은 것에 관해서 선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왕은 외국의 군주[外國之主]이시니 조서가 이르면 성을 나와서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성밖에서] 사신을 맞았다.” (『고려사』, 권65, 지19, 예7, 빈례) 이익주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료는 몽골이 고려 국왕의 지위를 부마 자격에 우위에 두기로 인정한 명확한 증거다. (이익주, 2011,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그러나 해당 기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그의 견해는 다소 무리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 사료는 양국이 공유하는 일정한 외교 의례가 적어도 충렬왕 단계에서는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고려 왕의 세 가지 지위 사이에 특정한 위계가 설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고려와 몽골이 우선시하는 고려 왕의 지위는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익주의 입장에서는 몽골 관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만큼 충렬왕 대 이후로는 고려 국왕의 지위가 부마ㆍ정동행성 승상보다 중요했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고려-몽골 관계의 장기적인 추세 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들로 입증되어야 할 사안이다. 근래의 연구를 살펴보면, 고려 국왕의 지위가 정동행성 승상과 부마의 지위보다 우월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정동훈,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역사와 현실』 113을 참조하면 유익하다. [본문으로]
  35. 이명미, 2012, 『고려-몽골 관계와 고려국왕 위상의 변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19~124면. [본문으로]
  36. 몽골 복속기에 혈연적 정당성이 약해졌다고 해서 왕건과의 혈연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건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 건국 세력은 고려 말부터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제기했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므로 왕의 자격이 없다는 이 논리는 결국 왕건으로부터 이어지는 혈연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정치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혈연적 정당성이 여전히 국왕의 정치권위를 구성하는 요소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건국 세력이 처음부터 우창비왕설을 내세웠던 건 아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건국 세력은 본래 우왕의 퇴진을 선양의 형태로 포장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우창비왕설을 내세우면서 명의 반응을 의식했다는 점이다. (이명미, 2017, 「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ㆍ외교 환경」, 『역사비평』 121) 조선 건국 세력이 명의 반응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점이나 혈연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정치 전략이 최선의 방책으로 강구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국왕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혈연적 정당성이 상대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37. 『고려사』 세가 권36, 충혜왕 후 4년 11월 22일. 托以告郊頒赦, 遣大卿朶赤·郞中別失哥等六人來. 王欲托疾不迎, 龍普曰, “帝常謂王不敬, 若不出迎, 帝疑滋甚.” 王率百官朝服郊迎. 聽詔于征東省, 朶赤·乃住等蹴王縛之. 王急呼高院使, 龍普叱之. (…) 朶赤等卽掖王, 載一馬馳去. 王請小留, 朶赤等拔刃脅之. 王悶甚索酒, 有一嫗獻之. [본문으로]
  38. 몽골 복속기의 측근정치에 관해서는 이익주, 1996, 『고려ㆍ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 정치체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에 상세히 정리되었다. [본문으로]
  39. 『맹자집주』, 「만장장구 上」. “萬章曰: ‘堯以天下與舜, 有諸?’ 孟子曰: ‘否. 天子不能以天下與人.’ ‘然則舜有天下也, 孰與之?’ 曰: ‘天與之. (…) 昔者堯薦舜於天而天受之, 暴之於民而民受之, (…) 天與之, 人與之, 故曰 天子不能以天下與人. (…) 堯崩, 三年之喪畢, 舜避堯之子於南河之南. 天下諸侯朝覲者, 不之堯之子而之舜. 訟獄者, 不之堯之子而之舜. 謳歌者, 不謳歌堯之子而謳歌舜, 故曰天也.’ [본문으로]
  40. 임헌규, 2012, 「天命과 倫理」, 『온지논총』 30. [본문으로]
  41. 임헌규, 2012, 앞의 글. [본문으로]
  42. 송재혁, 2017, 「정도전의 신질서 구상과 서경」, 『아세아연구』 60-3. [본문으로]
  43. 송재혁, 2017, 앞의 글. [본문으로]
  44. 『삼봉집』 권13, 「조선경국전上」, 正寶位. “人君以天地生物之心爲心, 行不忍人之政, 使天下四境之人, 皆悅而仰之若父母, 則長享安富尊榮之樂, 而無危亡覆墜之患矣. 守位以仁, 不亦宜乎!” [본문으로]
  45.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도전이 생각한 재상의 역할이 정말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왕의 일을 독점하는 것이었는지 의심스럽다. 필자는 정도전의 고민이 그가 구상했던 정치체제의 대전제, 즉 도덕군주의 영속적인 확보에 집중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는다. 도덕군주의 도덕정치가 이루어지는 국가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도덕적인 군주가 지속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선행연구에서도 지적하듯이, 정도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정도전은 군주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재상에게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정도전이 생각하는 재상은 국왕 대신 국사를 도맡는 존재가 아니라 제각각의 성향을 가진 군주들이 일정하게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보좌해야 하는 존재다. 다음의 문장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독해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주(人主)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조선경국전』, 「治典」)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도전이 이윤(伊尹) 같은 재상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생각들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삼봉집』 등의 자료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46. 김지영, 2012, 앞의 글. [본문으로]
  47. 『성종실록』 권9, 성종 2년(1471) 1월 7일 庚辰. [본문으로]
  48. 고려 경종은 사촌동생인 개령군(開寧郡)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정윤(正胤) 개령군 왕치는 나라의 어진 종친이고 내가 우애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조종의 대업을 받들고 국가의 기틀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 권2, 세가2, 경종 6년 7월) 이런 계승 방식에서는 사적인 혈연관계가 중요하며, 정통과 도덕의 측면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고려 성종이 친부를 대종(戴宗)으로 추숭할 때도 딱히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고려사절요』 권2, 성종 즉위년, 11월) “옛날부터 제왕은 방계ㆍ지자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면 의리상 사친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본문으로]
  49. 『고려사』, 「진고려사전」. “迨後嗣之昏迷, 有權臣之顓恣, 擁兵而窺神器, 一啓於仁廟之時, 犯順而倒大阿, 馴致於毅宗之日. 由是, 巨姦迭煽, 而置君如碁奕, 强敵交侵, 而刈民若草菅, 順孝定大亂於危疑, 僅保祖宗之業. 忠烈昵群嬖於遊宴, 卒構父子之嫌, 且自忠肅以來, 至于恭愍之世, 變故屢作, 衰微益深, 根本更蹙於僞朝, 歷數竟歸於眞主.” [본문으로]
  50. 여전히 이 글에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다. 국제질서의 변동은 여말선초의 정치행위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조선 건국세력은 ‘천명을 받은’ 조선을 명 중심의 국제질서에 어떻게 자리매김하려 했는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조선의 새로운 정치적 지향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질서 안에서 민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가. 고려의 전통적인 제도와 질서와 관습은 조선 건국세력의 정치질서 구상에 어떤 방식으로 고려되고 있는가. 새롭게 모색한 정치적 지향은 15~16세기의 조선시대사와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필자는 이런 많은 문제들에 답할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이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싶다. 다만 필자는 특정한 역사행위자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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