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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189집, 2006 Ⅰ. 들어가며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15세기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15세기, 특히 세종 시대의 문화가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라는 이러한 관점의 서술이 비단 국사 교과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연구들은 .. 2018. 4. 19.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후마스스무,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한양대학교 초청강연 원고)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 땅을 밟은 홍대용은 1766년 2월 우연히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만나 교제했다. 엄성과 반정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절강성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필담을 주고받으며 교분을 나누었다. 자신들의 관계를 ‘천애지기’(天涯之己)라고 부를 정도였다. 홍대용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엄성과 반정균은 조선 사절단이 머물던 숙소로 홍대용을 찾아왔다. 홍대용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엄성과 반정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온 것은 그저 천하의 뛰어난 지식인을 만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국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 2018. 4. 19.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강정숙, 2005,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역사비평』 74 ▲'위안부' 소녀상 지금은 ‘위안부’라는 명칭이 익숙하지만, 기존에는 종군위안부나 정신대, 성노예라는 명칭과 혼용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위안부’를 공창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이처럼 ‘위안부’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안부’가 제도적인 것이었느냐, 또는 강제성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명칭도 달라졌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강정숙의 논의를 요약함으로써 각 명칭의 의미와 그 인식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1. 종군위안부, ‘위안부’, 정신대? 일단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먼저 사용된 이름이다. 1970년대 이후 .. 2018. 4. 19.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이익주,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소위 ‘세조구제’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36, 1996) 1. 논문의 목적 이익주의 논문은 고려 원종과 충렬왕 때의 고려-몽골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소위 ‘세조구제’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고려-몽골의 형식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는 “元代史의 전개에 있어서 世祖代는 원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는 시기로, 고려와의 관계를 비롯한 외교정책 역시 이 때 일정한 원칙을 가지면서 정립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조구제’가 성립되는 과정 및 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고려 ‧ 원관계의 구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원종대 고려 ‧ 원관계의 전개 저자의 말에 따라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 2018. 4. 19.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이 글은 『조선시대사 2』(푸른역사, 2015)에 실린 김건태의 글 일부를 정리한 것임 조선 전기의 양반에게 노비와 토지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특히 16세기 초반에 수조권을 통한 토지지배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서 노비와 토지는 양반이 부를 증식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양반은 수조권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대신 노비를 동원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게 함으로써 부를 늘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양반은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는 데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양반들은 조세 부담으로 몰락하는 양인농민을 노비로 포섭하거나 자신들의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킨 뒤 그 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노비가 많으면 전답을 증식시키기도 훨씬 수월했다. 무주공황지(無主空荒地), 즉.. 2018. 4. 18.
『국가』 7권(521c~541b) 요약 『국가』 7권(521c~541b) 요약 7권 중반(521c)부터 소크라테스는 ‘생성되는 것에서 실재로 혼을 끌어당기는 교과’와 변증술, 교과별 교육시기에 관해 자세하게 논한다. 이 논의는 6권 말미에서 이루어졌던 논의의 연장선이다. ◉ 혼의 전환을 위한 예비 교육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혼의 전환을 위해 배워야 할 교과들은 전사들에게도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통치자의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전쟁 투사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3권에서 이들은 체육과 시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체육과 시가 교육은 혼의 전환을 위한 교과에는 속하지 않는다. 체육은 성장ㆍ쇠퇴와 관계되므로 생성ㆍ소멸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체육과 상관관계에 있는 시가 교육은 선법을 통해 조화로움을, 리듬을 통해 단.. 2018. 4. 17.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안외순, 2000,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동방학』6 1. 머리말 저자는 대원군 연구가 주로 정치ㆍ군사적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권력 운용과 정책 집행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정권의 지지기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의 ‘사회계급적 지지기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원군 정권이 지방의 상인과 부농, 하급 이서층을 지지기반으로 했다는 梶村秀樹와 대원군이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藤間生大의 평가가 있는데, 이는 실증된 적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유림양반-농민-대원군 정권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대원군 정권의 지지기반과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2. 대원군과 양반유림의 관계 저자는 2장에서 대원군과 양반.. 2018. 4. 17.
송시열과 중화 송시열과 중화 송시열(1607~1689)은 노론의 영수로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특히 사이비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덕일은 송시열이 학술적 자유를 억압하고 조선을 친명 사대주의의 길로 빠뜨리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송시열에 관한 이덕일의 평가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송시열을 ‘친명사대주의자’로 이해하는 그의 관점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덕일은 송시열이 마주했던 조선의 현실이 무엇이었으며 그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송시열은 왜 중화를 그토록 강조한 것인가? 그가 중시했던 중화는 망해버린 그저 망해버.. 2018. 4. 16.
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 김백철 저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을 읽고 - 김백철은 숙종-영조대 최대 과제였던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영조대 탕평정치의 지향점이 민국이념이었음을 주장한다. 그의 논의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일단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떤 시대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는지 설명했다는 점,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영조대 탕평정치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입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탕평정치의 운영논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전 시기의 붕당정치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민국이념에 대해서 김백철과 다른 생각을 견지한다.. 2018. 4. 16.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김백철, 2007,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한국사연구 138 김백철의 문제의식은 17세기의 황극론과 양역변통이 어떻게 18세기에 황극탕평론과 균역법으로 정립될 수 있었는가에서 출발한다. 명목적으로 요순의 정치로 표현되는 이상정치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탕평정치ㆍ균역법처럼 국가의 근간을 개혁하는 일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김백철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성관의 변화를 당시 정국 운영의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영조대부터 ‘민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시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1) 백성인식의 사회적 배경 김백철의 논의는 백성관 변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긴급한 과제는 양역문제를 해결하고 .. 2018. 4. 16.
한국 근대의 기점 논의 「토론 : 한국 근대의 기점 논의」, 『역사와 현실』 9, 1993발제 : 장동표, 이윤상, 도면회토론 : 도진순, 이헌창, 이세영, 이영호(사회) 1. 도입 역사학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의 전근대 시기와 근대 시기를 나누는 기준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토론회에서는 이러한 ‘근대’의 기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토론회가 개최된 배경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국역사연구회 내부의 문제로, 한국사 개설서를 출간하는 과정에서 “한국사를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시대구분의 문제”가 출판 일정으로.. 2018. 4. 16.
The Origin of Korea The Origin of Korea : Dynamic Interaction between Koreans and Foreign Powers in the Liberation Space In October 2015,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ok a decision to use only state-issued history textbooks. At that time, the then president Park Geun-hye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the ‘correct’ history more than once. What is the correct history she said? The Education Minister Hwang Woo-yeo s.. 2018.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