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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근현대사

한국 근대의 기점 논의

by 衍坡 2018. 4. 16.

「토론 : 한국 근대의 기점 논의」, 『역사와 현실』 9, 1993

발제 : 장동표, 이윤상, 도면회

토론 : 도진순, 이헌창, 이세영, 이영호(사회)



강화조 조약 사진



1. 도입


  역사학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의 전근대 시기와 근대 시기를 나누는 기준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토론회에서는 이러한 ‘근대’의 기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토론회가 개최된 배경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국역사연구회 내부의 문제로, 한국사 개설서를 출간하는 과정에서 “한국사를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시대구분의 문제”가 출판 일정으로 인해 시대구분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전개 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학문적인 문제로,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사의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재구성”에 대한 필요성에 따라 시대구분의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당시에는 시대구분의 이론이나 방법, 실제 등에서 합의된 인식을 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토론회는 “시대구분의 이론, 방법, 실제 등에 대하여 여러 견해를 소개하고 그 의미와 한계들을 드러냄으로써 시대구분의 현단계를 점검하고 그 발전을 모색”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발제문은 이 토론회에서 거론된 각 주제들과 관련하여 토론자들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장동표의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1) 1860년대 반침략 · 반봉건투쟁과 근대의 기준


(1) 장동표의 견해 - ‘1860년대설’

  장동표는 근대의 기점 설정과 관련하여 “현단계에서 근대사의 구체적 기점은 외세의 지배와 매판 관료독점자본을 반대하고 전근대적인 유제 등의 청산과정을 통한 근대 민족사 체제의 완전한 성립이라는 변혁과제와 관련하여 설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이에 따라 ‘1860년대를 근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주장 근거로 ①1860년대에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반침략운동과 반봉건운동의 결합이 맹아적인 형태로서 나타났다는 점”, ②“이 시기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진전이 그 이전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③“정치적 사회적 측면의 변화도 일정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었다. 


(2)도진순의 반론과 장동표의 재반론

㉠도진순의 반론:  장동표의 주장에 대해 도진순은 장동표의 핵심적인 근거인 ①에 대해서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근거를 반박하였다. 우선 그는 반봉건투쟁이 비록 19세기에 “양적으로 크게 비약”하긴 하지만 그것은 만적의 난 처럼 기본적으로 “중세사회 내내 지속된 운동”이기 때문에 근대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반침략운동에 대해 사명대사의 의병활동 등도 반침략운동이므로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 또는 그 결합이라는 것만으로는 근대의 기준으로 불완전”하다고 보았다. 

㉡장동표의 재반론:  장동표는 에 대해 자신이 주장한 반봉건투쟁은 이전 시기 반봉건 투쟁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 근거로는 “농민들의 반봉건투쟁이 일어난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성장한 단계였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그는 에 대해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 침입에 대항”하는 민족개념을 지닌 민족이 1860년대부터 형성되고 있었다는 관점을 피력하여 그 이전 시기의 ‘반침략운동’을 자신이 주장하는 반침략운동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장동표는 위의 두 가지가 “맹아적으로나마 근대화 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이 ‘1860년대가 근대의 기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보았다.


2) 제3세계의 반외세투쟁과 자주성문제


(1)사회자의 문제 제기

  이영호는 장동표의 ‘1860년대설’에 관해 ①“반침략투쟁과 반봉건 투쟁의 상호관계가 1860년대에 어떤 형태로 나타났”으며 “어떤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었는가”하는 점 ②“1860년대 이후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이전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점 ③정치적 사회적 변화(“부르주아적 세력의 맹아적 출현”)가 “사회구성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가”하는 점을 의문으로 제기하였다.


(2)장동표의 반론

  장동표는 자신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1876년설’과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다만, 자신의 주장이 “자주적 역사전개로서의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고 반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제3세계’의 역사 발전과정을 언급하였는데, “제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해방되어 나가는” 제 3세계의 역사발전 과정은 “기존의 고전적 역사발전” 과는 달리 상당히 특수하고 독특한 것이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제3세계의 독특한 역사발전과정이 한국사 발전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1860년대설’의 근거로 삼았다.


(3)장동표의 반론에 대한 도진순과 장동표의 논의

  도진순은 장동표의 반론에 대해 “일정한 혼란이 있다”며 반박하였다. 근대의 기점을 개항 이전의 시기로 설정할 때 “제 3세계의 특성”이나 “침략의 문제”보다는 “반봉건문제에서 근대성이 내재적으로 있었다는 측면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는 측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반침략운동을 근대를 구분하는 기점의 주축으로 삼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자주성이라는 것이 “외세에 대한 항쟁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체 내재적 근대화의 역사적 과정”도 자주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장동표는 민족의 자주성과 계급의 자주성을 동일한 것으로 여겨 “외세에 대한 항쟁”과 “내재적 근대화”로 가지는 자주성을 동일한 것이라 하였다.




3. 이윤상의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1) 개항과 근대사회의 성격


(1) 이윤상의 견해 - ‘1876년설’

  이윤상은 개항 이후 한국이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급속히 성장하였다는 점”과 성공적인 근대적 상부구조로의 이행이 실패하고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한 개항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급속한 성장,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출발점”으로 보고, 이를 근대사회가 시작되는 근대사회의 기점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이윤상은 “반식민지 · 식민지로서의 근대의 출발점으로 개항을 설정해야되지 않겠느냐”는 이헌창의 견해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윤상은 미국에 의해 개항된 일본의 상황과 일본에 의해 개항된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개항 이후부터 청일전쟁이 종결되는 사이의 시기에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충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개항이 반식민지 혹은 식민지 근대의 시작점이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2)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과 제국주의의 규정성


(1) 3-1-1에 대한 이헌창의 반박

  3-1-1에 대해 이헌창은 “1880 · 90년대에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했다”고 반론하였다. 또한 “개항기에 외국상품과 외국자본의 압박하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대가 상당히 제약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여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대”를 통해 개항 이후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하는 이윤상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헌창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대”와 “제국주의의 규정성의 전달”의 관계를 언급하였는데, “제국주의 자본의 주도하에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헌창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을 통해 식민지자본주의 성립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개항이 근대의 기점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2) 이헌창에 대한 도진순의 반박

  도진순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항하고 식민지가 된 이디오피아 등 아프리카 후진국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근대가 제3세계의 특성만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독자적 성격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개항이 반식민지 · 식민지 근대의 시작이었다는 이헌창의 주장을 비판하고 개항 후 일정 기간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이윤상의 주장을 옹호한 것이다.



4. 도면회의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1) 갑오개혁과 계급관계의 변화


(1) 도면회의 견해 - ‘1894년설’

  도면회는 1894년이 근대사회의 기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호 촉진시키는 국가권력의 수립”에 초점을 두고 그 “국가권력의 수립”이 1894년 개화파정권의 수립과 갑오개혁이라고 보았다. 도면회의 주장이 다른 주장들과 갖는 공통점은 “근대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보고 있다는 점인데, 다른 주장들과 갖는 차이점은 “식민지사회에서도 식민지 지배권력이 부르주아적 권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2) 이세영의 반론

  “생산관계, 계급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갑오개혁”이었다는 도면회의 견해에 대해 이세영은 도면회의 주장에 “실패한 부르주아혁명으로서의 농민전쟁을 첨가”하여 이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하여 근대의 기점으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즉, “시대구분의 기준은 구조의 발전 경향 속에서 어떤 특정한 단계 · 국면에서의 계급관계 · 모순의 내용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하”며 “양적인 측면, 규정성 등은 주관적 측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아진다고 주장하였다.



5. 마무리


1) 남북한 시대구분론의 쟁점


(1) 북한의 경우

  북한은 근대의 기점으로 “1866년설과 1876년설”이 있었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는 서로 밀접한 근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근대의 특징을 식민지반봉건사회 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은 변화하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 되어 근대의 기점이 1866년과 1876년에서 1860년대로 변화하게 된다. “북한에서는 우리의 근대사를 자주적 근대화와 식민지적 근대화의 충돌 내지 대립과정으로” 보고, 이를 정리해 “반침략, 반봉건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 규명하고 있다.


(2) 남한의 경우

  남한에서는 ①“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좋든 싫든 일본 또는 외국으로부터 ‘이식’되었다고 보는 입장”(이 같은 경우 자본주의의 형태를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것으로 파악) ②“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의 발생이 내재적으로 준비되었다는 입장” ③“세계사에서 근대의 모습을 ‘자주적=선진국형’과 ‘식민지적=제3세계형’으로 명확하게 분리하고, 우리나라를 후자로 분류하는 입장” 이 세 가지가 존재하고 있다.



2) 동 · 서양 시대구분론의 흐름


(1) 일국사적 파악방법

  이 입장에서 시대를 구분하자면, “15세기는 봉건위기가 일어나는 동시에 근대적인 요소가 배태하기 시작하는,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 전환으로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본주의가 성립 · 발전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근대사의 기점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월러스틴

  월러스틴은 “일국사적인 파악방식을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정치단위를 초월한 분업질서, 곧 세계질서로 이해”하였다. 그에 따르면, “16세기 초에 유럽의 지리지적 팽창, 상품별 지역별 노동통제 방식의 발달, 중심지역에 강력한 국가기구의 건설 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규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자본주의의 내적구조와 특질을 경시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3) 일본 · 중국

  일본은 근대의 시점을 미국에 의해 개항한 후부터 명치유신 까지를 기준으로 한다. “개항은 일본을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강제적으로 편입”하여 막부제 사회 하에서의 사회발전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막부체제가 붕괴되고 국왕중침체제의 국민국가가 성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근대사회의 성격을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구체적 시기를 언급하면 “아편전쟁과 그에 따른 개항, 불평등조약 체결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시대구분은 왜 하는가


(1) 도진순의 도면회 비판

  도진순에 따르면 “도면회 선생은 자본주의는 과학이고 식민지나 제국주의 · 민족 문제는 감정이라고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제국주의· 식민지 · 민족문제는 감정 · 운동 · 주관 ·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명확하게 과학적으로 알아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며 이를 강조하였다.


(2) 도면회의 대응

  도면회는 스스로 “자본주의는 과학이고 민족은 감정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 발전법칙에 의해 사회가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이고 민족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 위에 선 상부구조의 문제라고 보았”다. 즉, 과학적이고 민족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발전법칙의 부차적인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4) 사회구성체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장동표의 주장

  장동표는 시대구분의 자세 중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회의를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은 정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간의 실천적인 경험 속에서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는데, 이를 토대로 살펴볼 때 “기존의 유물론에 바탕”하였던 사회구성체론의 이론적 한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이헌창의 비판

  각각의 시대에 나타났던 역사적인 사건의 차별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사회경제구조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서양과는 다른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보든지 아니면 자본주의로서 다른 유형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과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사회구성체론을 폐기해야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비판을 덧붙였다.


(2)장동표 반론과 이윤상의 재반론

  장동표는 “사회구성체론은 하나의 사회가 가진 역사적 경험을 추상화시켜놓은 이론이기 때문에 한 사회 내로 좁혀 이를 분석하는 도구로서는 적절”하다고 평가하면서도 “19,20세기 이래 현실적으로 존재하느 구체적인 사회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회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19, 20세기를 조명하는 방법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계급론 중심의 사회구성체론은 부분적이고 제한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윤상은 세계의 민족과 국가는 모두 발전 과정이 다른데, 이를 가지고 기존의 이론체계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재반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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