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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근현대사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by 衍坡 2018. 4. 17.

안외순, 2000,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동방학』6




1. 머리말


저자는 대원군 연구가 주로 정치ㆍ군사적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권력 운용과 정책 집행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정권의 지지기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의 ‘사회계급적 지지기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원군 정권이 지방의 상인과 부농, 하급 이서층을 지지기반으로 했다는 梶村秀樹와 대원군이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藤間生大의 평가가 있는데, 이는 실증된 적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유림양반-농민-대원군 정권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대원군 정권의 지지기반과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2. 대원군과 양반유림의 관계


저자는 2장에서 대원군과 양반유림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대원군은 양반질서를 타파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전제왕조질서 유지는 확고한 신분질서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원군 집정기에 이루어진 개혁을 두고 대원군과 양반유림은 누차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대원군과 양반유림이 추구했던 정치체제가 상이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양측 모두 전제왕조라는 틀 안에서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했을 뿐이다. 대원군 하야 후 양반유림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 사라졌다고 느낄 정도로 양자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실제로 대원군은 전제왕조질서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양반유림에 대한 개혁을 실시했지만,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즉, ‘기존의 토지 소유 관계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토지분배를 도모’한 것이 아니라 권문세가에 의한 토지탈점과 불법적 소유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양반에게도 군포(軍布)를 부과했던 것도 양인과 양반에게 동등하게 조세를 부과하려고 했다기보다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대원군이 추진했던 개혁의 기본적인 방향은 확고한 신분질서를 기초로 한 강력한 전제왕조의 확립이었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대한 양반유림 세력의 반응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양반유림은 원납전 징수ㆍ호포 부담 등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자신들의 불이익을 감수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양반에게 경제적 부담을 부과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양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특히 만동묘와 서원 철폐는 ‘선현의 사당을 모신다는 명분’으로 특권을 향유하던 양반유림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매우 치명적인 정책이었다. 이에 양반유림은 만동묘 폐지가 부당하다는 복합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이 비판한 요지는 ①군신간의 윤리를 단절(만동묘 폐지) ②사제간의 의리 단절(서원 철폐) ③부자간의 인륜 문란(종실제사 잇기) ④忠逆의 개념 혼란(죄인들의 방면) ⑤華夷 구분 혼재(청전 사용) 등이었다. 이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진정한 유교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분론적ㆍ명분론적 의식에 입각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유림양반과 달리 관료양반들은 대원군의 정책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대원군이 지향했던 사회가 유림양반이 추구했던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균관 유생들은 대원군의 정책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칭송하였을 뿐 아니라, 최익현이 대원군을 탄핵했을 때 권당(捲堂)하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을 포함하는 관료양반들은 대원군의 개혁정책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이익과 배치되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



3. 대원군과 농민


양반과 대원군 정권의 관계를 살펴본 저자의 논의는 대원군과 농민계층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대원군이 재건하려는 전제왕조체제는 더 이상 정치ㆍ사회적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벅찬 상태였다. 더구나 대원군이 전제왕조질서 재건을 표방하며 추진한 사업은 농민에게 부담으로 돌아갔다. 대표적으로 대원군이 강행한 경복궁 공사는 막대한 재정과 농민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경복궁 공사와 각종 관청 건축ㆍ보수는 백성들의 원성을 유발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梶村秀樹와 藤間生大의 주장처럼 대원군이 농민 등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대원군 집정기에 6차례나 민란이 발생했다. 이 시기 민란은 ①부패와 탐학을 일삼는 고을 수령과 아전의 징치를 요구한 사례와 ②체제변혁을 추구한 사례로 구분할 수 있다. 황해도 풍천 민란(고종 1) ․ 경상도 칠원현 민란(고종5) ․ 경상도 고성현 민란(고종 6)은 ①에 해당하고, 전라도 광양현 민란(고종 6) ․ 경상도 영해부 민란(고종 8) ․ 경상도 문경 조령관 민란(고종 8)은 ②에 해당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계층은 대원군의 지지기반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4. 대원군의 지지기반적 성격


저자에 따르면, 대원군의 ‘계층적’인 지지기반은 바로 왕족과 종친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원군은 별도로 왕족ㆍ특정 관료ㆍ하급 서리ㆍ건달ㆍ예능인ㆍ보부상 등 ‘각계각층 출신의 사람들을 개인적(個人的) ․ 사조직적(私組織的)으로 운용’하기도 했다. 이는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원군 개인의 권력 운용을 위한 목적에서 조직된 지지기반이었다.


그 중 ‘천하장안’으로 불리는 운현궁의 가령(家令)은 가사(家事)뿐 아니라 원납전 징수ㆍ정계동향 전달 등 정치적 업무에도 개입했다. 그런 점에서 대원군이 권력을 유지하고 운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원군의 사적 지지기반에는 상궁과 내관, 보부상과 예능인도 포함되었다. 대원군은 상궁과 내관을 통해 궁궐 안의 동향을 파악해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보부상들을 통해 전국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군대에 군자금과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으며, 예능인들을 통해 대원군의 정책에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대원군의 지지기반은 단순히 가령이나 중인, 상궁과 내관 뿐 아니라 중앙행정기구인 6조와 지방 행정기구에도 존재했다. 6조 소속인 형조집리 오도영, 호조집리 김완조, 병조집리 박봉래 등이 대원군의 사조직에 속하여 정책보좌역을 담당했고, 팔도감영의 감사와 유수영문의 유수는 대원군의 사조직인 아전 세력에게 제어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는 ‘신분질서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분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정상적인 정치행정체계 내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와 ‘공식적 관직이 없으면서도 최고 통치권을 행사하는 일종의 변칙적인 집정자인 대원군’의 상호 필요성에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지지기반이 되는 이들이 “호방하고 포악하며 그 행패 또한 적지 않았다”는 평이 받았던 것으로 보아, 대원군이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5.맺음말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대원군이 지지세력으로 삼은 계급이 기본적으로 왕족ㆍ종친세력이었고, 넓게 보면 양반지주계급이다. 농민과 대원군 정권의 이해(利害)는 상반되는데, 대원군 집정기에 발생한 6차례 민란과 과도한 부역ㆍ조세부담이 그것을 방증한다. 다만 대원군은 개인적ㆍ사조직적 권력기반을 운영했는데, 이 조직에 속한 이들이 특정한 사회계층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대원군이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대원군의 권력은 독재권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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