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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근현대사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

by 衍坡 2018. 5. 3.

이태진, 2000,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이태진은 대한제국기 도시개조사업의 중요성에 주목한 김광우의 연구로 논의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김광우는 한국 도시계획의 역사를 ‘시가지 경영의 시대’(1894~1936)와 ‘시가지 계획의 시대’(1936~)로 나누고, 다시 ‘시가지 경영의 시대’를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단계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치도론(治道論)을 제기했던 때부터 한성부가 치도사업을 진행했던 때까지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토 히로부미의 도시시설 정책이 추진되던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경성시구개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이다. 김광우는 특히 첫 단계에 주목하면서, 도로정비ㆍ방사상 및 환상도로 부설ㆍ주요건물과 도로의 연결 등 이 시기 도시개조사업의 성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태진은 김광우의 연구가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지만, 도시개조사업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서 김광우와 생각을 달리한다. 김광우는 갑신개화파(김옥균)에 의해 제시된 치도론이 갑오개화파(박영효)를 거쳐 독립협회(박정양ㆍ이채연)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태진은 김광우의 연구가 개항 이후 지배층을 개화파-수구파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관점에 기댄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김옥균과 박영효는 친일개화파로 갑신정변 때 망명하여 치도론을 실현할 기회가 없었다. 갑오개혁 당시 박영효가 일시 귀국했지만 곧 일본으로 다시 도망해야만 했다. 반면, 박정양과 이채연은 친미 성향을 띤 인사들이었고, 군주가 주도하는 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기 도시개조사업의 주체는 박정양과 이채연일까? 이태진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이 도시개조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김광우는 이 두 사람이 독립협회 소속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독립협회를 도시개조사업의 주체로 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독립협회에 속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태진은 아관파천 이후의 정국을 활용하려는 고종의 정치적 의도로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 회원보다는 내부대신과 한성판윤으로 개조사업을 주도했다. 이는 고종의 강력한 의지와 지지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종래에는 고종을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실은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고종은 서울개조사업 등을 통해 근대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서울개조사업이 하나의 체계적인 계획으로 진행되었다고 본 이태진은 『독립신문』의 논설과 기사를 활용해 서울도시개조사업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서울개조사업은 크게 ①도로 및 하천 정비 ②새로운 중심 건축물 축조 ③공원 조성 ④서구적 시설 도입 ⑤산업지역 설정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이태진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먼저 도로ㆍ하천 정비는 서울 안팎의 간선도로 정비와 은구(隱溝) 설치, 방사형 도로망 건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종로ㆍ남대문로 등 기존 간선도로의 가가(假家)를 정리하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남대문과 용산, 새문과 삼개, 염창교와 삼개를 연결하는 도로를 정비했다. 이것은 도성과 상공업지대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한편 경운궁 대안문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도로망이 건설된 점도 중요하다. 방사형 도로망 체계는 근대 서유럽 국가들이 주로 활용하던 도시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성부와 외국인 고문관이 함께 서소문 일대를 측량했다는 『독립신문』 기사와 박정양ㆍ이채연이 워싱턴에서 근무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고종은 서울에 방사형 도로망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도시개조사업 계획

▲이태진이 설명한 고종 대 도시개조사업 계획



고종이 새로운 중심건축물을 지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 경운궁의 위상이 변화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본궁으로 삼았고, 환궁 이후에는 대안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사형 도로망 계획을 세웠다. 원수부ㆍ궁내부 등의 관부와 원구단은 이런 계획 위에서 세워졌다. 이것은 전통적인 ‘남면북배(南面北背)’와 다른 것으로 당시의 ‘획기적 변화’를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독립문과 원구단이 건축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두 건물은 각각 영은문과 남별궁 자리에 세워졌다. 영은문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던 곳이고, 남별궁은 조선에 온 중국사신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런 측면에 주목하면, 두 건물을 세운 취지는 유사하다. ‘명실상부한 독립국의 출발을 두 건축물로서 표시하고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문을 세운 것은 서재필이나 독립협회가 아니다. 『독립신문』의 논설로 보면 정부야말로 독립문을 건립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서울개조사업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공원 조성이다. 독립문과 함께 만들어진 독립공원이나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조성한 탑골공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제국기에 공원이 조성된 사실을 근거로 서울개조사업의 모델이 어느 도시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서울개조사업에는 방사상 도로를 전제로 한 공원 조성까지 계획됐다. 사업을 주관한 박정양이나 이채연은 모두 미국 워싱턴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은 방사상 도로망과 함께 공원을 많이 조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의 서울개조사업은 워싱턴시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을 근대적 도시로 개편하려는 가운데 서구적 시설들이 도입되기도 했다. 고종은 미국의 콜브란ㆍ보스트윅과 공동출자 형식으로 한성전기회사를 세워 이 회사가 전차ㆍ전등ㆍ수도ㆍ전화 등을 관리하도록 계약했다. 한성전기회사 출범 이후 서울에는 전차가 개통되고 전등이 부설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다만 왜 미국과 계약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 이유는 사업 주체들이 미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철도다. 고종은 전차와 철도를 연결하여 ‘서울의 교통체계를 전국 교통체계에 연결’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경원선 경의선 경인선 등 다양한 철도를 개발함으로써 서울을 ‘산업의 중심지로 삼는다는 목적의식’을 보였다. 아울러 용산은 공장지대로 개발함으로써 전환국ㆍ인쇄국ㆍ양잠소ㆍ한성전기회사 발전소 등 다양한 관영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여기까지 서술된 내용에 비추어볼 때, 서울도시개조사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것이 지향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이태진의 생각을 좀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896년에 시작된 서울 도시개조사업은 이상에서 살핀 것과 같이 한두 해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군주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 기본 골격은 갖추었으나 그 후에도 추가사업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계속되었다. 서울개조사업은 곧 그간 부당하게 받아온 청나라ㆍ일본으로부터의 강압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새로 출범하는 마당에서 나라의 얼굴을 새로 가다듬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서울개조사업은 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고, 한국 측의 자발적인 근대화 시도였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태진이 고종을 ‘동도서기론의 개화주의자’로 평가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태진은 서울개조사업의 정치사상적 의미를 영조ㆍ정조와 연결시킨다. 이태진은 서울개조사업 중에서 경운궁을 본궁으로 삼은 것과 공원을 조성한 사실이 ‘서구 도시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런 서구적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을 검토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정조의 민국론과 연결시킨다. 즉, 본궁을 도심으로 옮기고 시민 공원을 조성한 데는 “전통적인 위민론(爲民論)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절대다수인 민의지지 없이는 왕조가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민과 국(왕)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민국론”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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