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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근현대사

1970년대 중ㆍ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행과 ‘교육격차’

by 衍坡 2018. 4. 27.

정무용, 「1970년대 중ㆍ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행과 ‘교육격차’」

(『역사문제연구』 29, 2013)




머리말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평준화는 입시문제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평준화는 추첨식 입학제를, 비평준화는 자유경쟁시험을 치는 입학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평준화와 비평준화의 의의를 자율성 : 획일성 또는 평등 : 경쟁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추진과정을 다룬 대부분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는 평준화 정책과 입학제도를 동일시하는 인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평준화 정책과 입시제도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둘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입시제도가 학생을 선발하는 문제였다면, 평준화는 각 학교의 시설과 교원의 수준 차이를 해소하는 문제였다. 물론 평준화 정책은 ‘무시험 입학’이라는 입시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전제였지만, 단지 입학제도 개선만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평준화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1970년대 평준화 정책의 추진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저자가 이 논문을 쓴 목적이다.




1. 중학교 무시험추첨입학제와 평준화 정책의 시행


1960년대 중반부터 중학교 입시 경쟁이 과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베이비 붐’ 세대가 성장하여 학령인구가 증가하면서 교육에 관한 사회적 수요가 늘어난 결과였다. 중학교 입시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자 교육계는 입학시험 없이 추첨으로 중학교에 진학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1968년 4월 26일 대한교육연합회게 발표한 중학교 입시제도 개혁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중학교구(中學校區)를 구획한 뒤 학생들이 각자 속한 구내의 중학교에 진학하게 할 것, ②무시험을 원칙으로 하되 지원자가 학교의 수용능력을 초과할 경우에만 입시를 볼 것.


문교부는 교육계의 ‘중학교 무시험 추첨 입학제도 시행’ 요구에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취하다가 같은 해 7월에 갑자기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1980년까지 ‘9년제 의무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다만 중학교 무시험 제도가 전국에 동시에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서울에서부터 점차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는 것이 문교부의 방침이었다. 교육계는 문교부의 무시험ㆍ추첨제 중학교 진학제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대한교육연합회는 중학교 간의 격차 해소, 공정한 교원 인사, 사립중학교 재정보조 등의 방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시의 중심과 변두리 지역 학교 사이에 격차가 해소되지 않으면 중학교 무시험 추첨 입학제도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학교 평준화 제도가 단순히 입시제도 개편만을 위해 시행된 정책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는 입시제도 개편의 전제로서 시행된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교육기반을 확대해 9년제 의무교육을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정책이었다. 문교부의 중학교 평준화는 시설 평준화와 교원 평준화를 골자로 추진되었다. 시설과 교원의 양질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학생들이 비슷한 수준에서 교육을 받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문교부는 1968년 9월에 「학교시설ㆍ설비기준령」를 기준으로 사립중학교 130여개의 시설ㆍ설비를 조사해 미비점을 보완하게 했다. 동시에 공립중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지시했으며, 사립중학교의 무자격 교사와 비자격 교사를 정리하거나 재교육했다. 각 시도에 교원을 신규 채용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와 평준화 정책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입학제도 개편과 평준화 정책에 필요한 재정 부담은 개인에게 전가됐다. 문교부가 ‘수익자부담원칙’을 적용해 학교시설비와 증설비를 학부모에게 전가한 결과였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와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중학교 공납금 인상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중학교의 공납금은 1969년 서울의 공립중학교 공납금 인상을 시작으로 1971년에는 전국의 중학교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고교 입학시험

▲평준화 이전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중학생들



2.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과 재정 부담의 전가


1)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혁과 고교평준화 정책의 시행


비록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가 실시되었지만, 입시경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치열했던 중학교 입시경쟁은 고등학교 입시경쟁으로 옮겨갔다. 문교부와 전국 중학교장협의회는 그 대책으로 1971년 내신 성적에 비중을 두는 입시안을 제시했다. 1973년 1월에는 대통령 박정희까지 나서서 일류고교와 일류대학 진학을 위한 경쟁의 폐단을 없앨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문교부는 같은 해 2월 고교 입시와 대학 입시를 1974년부터 연차적으로 개혁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새로 마련된 고교 입시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고등학교를 인문계 고등학교와 실업계 고등학교로 구분한다. ②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의 경우 학군을 나누어 학생들이 지정된 학군 내의 학교에 진학하게 한다. 다만 연합고사를 실시해 학군의 정원만큼 학생을 산발하고, 선발된 학생은 추첨제로 학교를 배정한다. ③실업계 고등학교는 기존의 방식대로 학교별로 지원해 연합고사로 선발하게 한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목표는 학교 간의 평준화와 지역 간의 격차 해소, 실업교육 강화와 교육비 부담 완화, ‘일류병’의 불식 등이었다. 이것은 중학교 평준화의 목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교 평준화의 시책도 중학교 평준화의 시책과 거의 유사했다. 고교 평준화도 시설ㆍ설비 평준화와 교원 평준화를 골자로 시행되었다. 문교부는 중학교 평준화 때와 마찬가지로 부실학교를 정리하고 교원을 재교육했으며 무자격 교사를 정리했다. 물론 차이도 있었다. 중학교 평준화 때는 명문 중학교를 폐쇄하기까지 했으나, 고등학교 평준화에서는 ‘부실학교’를 정리하는 데 그쳤다. 전체 고등학교에서 사립 고등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2) 시설ㆍ교원 평준화와 공납금 인상


한국교육원이 1974년 9월에 발간한 『교육발전계획(72~76의 수정보완(안)』는 고등학교 평준화가 반영되었다. 이 보고서에 제시된 교육발전계획의 중점 여섯 가지 중 두 번째가 중등학교(중학교ㆍ고등학교)의 평준화였다. 당시 교육계획의 과제는 중등교육의 수용능력을 확충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고등학교의 시설을 확충하고 질적 평준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학교 시설 확충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이었다. 물론 『수정보완(안)』에서도 재정 문제를 지적했다.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대안은 학생ㆍ학급ㆍ학교 당 교육비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립 고등학교들은 평준화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증대되는 재정 부담에 불만을 표출했다. 문교부로서는 고교 평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사립학교의 재정 부담을 완화하는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고등학교의 비중에서 사립 고등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립 인문계 고등학등학교는 전체 인문계 고등학교 중에서 49.3%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문교부와 시립 고등학교 사이의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교원 처우 문제였다. 사립 고등학교의 세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인건비(77.56%)였기 때문이다. 1973년 사립학교는 사립학교 교원에게도 공립학교 교원과 같은 수준의 연금을 지급할 것을 문교부에 요구했다. 문교부는 사립학교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사립교원 연금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예산 문제로 시행이 지연되던 사립교원 연금제도는 결국 1975년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한편, 문교부의 교원 평준화는 교원의 봉급도 평준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사립학교는 교원 봉급 평준화에 따라 상승한 봉급 비용을 정부가 지원해줄 것을 문교부에 요구했다. 문교부는 사립학교의 재정 지원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열악한 사립학교의 재정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문교부는 1976년 9월 15일 사립 고등학교의 국고 보조를 백지화하고 고교 평준화에 필요한 비용을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해결하도록 결정했다. 고등학교 평준화에 필요한 비용(학교 신설과 시설 확충 비용, 교원 처우 개선에 필요한 비용 등)을 학부모에게 전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는 공립ㆍ사립 고등학교의 공납금이 1976년부터 1981년 사이에 매년 20~45%씩 인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0년대 고교 배정

▲평준화 이후 고등학교 추첨 배정 결과를 바라보는 중학생들



3.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확대와 ‘교육격차’


1)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확대 실시와 도농 ‘격차’


1974~1975년에 대도시에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정책은 본래 점차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립학교가 중심이 되어 고교 평준화 정책 확대에 반대하면서 1977년까지 시행될 수 없었다. 사립학교는 평준화를 반대하는 이유로 ‘하향평준화에 따른 학력저하’와 ‘고교 교육열 후퇴’ 등을 들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재정 부담이었다. 시행이 지연되던 고교 평준화 정책은 1978년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문교부 장관은 전국 시ㆍ도교육감을 소집해 연합고사에 의한 새로운 고교 입시제도를 확대 실시하겠다고 밝히면서 고교 평준화 확대 실시에 차질이 없게 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한국교육개발원은 『교육발전의 장기전망과 과제(요약)』이라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한국 교육이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제시된 위기의 여러 징후 중 하나는 교육격차의 심화였다. 이는 1970년대 전반에 시행된 중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역펼 교육 격차의 문제를 도시-농촌의 격차로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중등학교 평준화는 주로 대도시 내 학교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대도시 내 ‘도심’과 ‘변두리’ 지역의 학교 격차는 해소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육재원이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와 농촌 학교 간의 교육 시설 격차는 해소되지 못했다.


2) 학생 ‘격차’ 문제와 인력개발


정부는 고교 평준화 정책에서 시설과 교원뿐 아니라 교육 내용의 평준화도 추진했다. 문제는 학습능력ㆍ가정환경ㆍ학습경험 등이 다른 학생들을 어떻게 평준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당시 교육내용의 평준화는 학생의 개성보다는 학습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학생 간의 학습능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우열반을 편성하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1978년에 간행된 한 연구보고서에서는 고등학교 평준과 정책이 명문 고교와 하급 고교 사이의 질적인 격차가 완화되었다고 평가했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학생집단의 형성’을 평준화 정책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업 수준의 학생들이 뒤섞이게 되었다는 지적이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교육발전의 장기전망과 과제(요약)』에서 그 대책으로 이질적인 학생들을 수준별로 구분하여 교육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목별ㆍ수준별로 학생들을 구분하여 교육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학생들을 일정한 수준으로 통합하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산업화에 필요한 기능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고급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직업과정이 설치되거나 직업교육과정에 속하는 교과목이 강화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요컨대, 고교 평준화 정책의 목적은 학생의 평준화였고, 그 근본적인 목적은 산업화에 필요한 ‘표준적인’ 산업 인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맺음말


중ㆍ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시설ㆍ설비 평준화와 교원 평준화를 골자로 시행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는데, 정책 수행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지 못한 문교부는 ‘수익자부담원칙’을 내세워 공ㆍ사립학교의 공납금 인상을 허용했다. 그 결과 공ㆍ사립학교의 공납금은 매년 큰 폭으로 상승했고, 평준화 정책 추진에 필요한 비용은 학부모에게 전가되었다.


정부의 중ㆍ고등학교 평준화는 특정 지역의 ‘도심’과 ‘변두리’ 학교 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빚어냈다. 평준화 정책을 위한 재원이 도시 지역의 학교에 집중되면서 도시와 농촌 학교 사이의 심각한 격차가 나타난 것이다. 한편, 평준화 정책은 단지 입시개혁의 일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 정책은 학생의 평준화를 통해 산업 인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표준적인’ 산업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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