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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차이점을 중심으로 - 2019.12.23. 1. 머리말 2. 고려ㆍ조선 왕조의 개창과 즉위 교서 (1) 개국의 형식과 절차에 보이는 유사성 (2)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드러난 차이점 3. 국왕의 정치권위와 정치적 지향, 그리고 정치의 현실 (1) 패도와 혈연: 고려시대 정치문화의 이상과 현실 (2) 천명과 도덕: 도덕적 군주와 새로운 정치질서의 추구 4.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은 누가 세운 나라일까? 그동안의 연구들은 ‘신흥사대부’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조선을 건국했다고 설명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공민왕 대 이후로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 2019. 12. 29.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2019.12.09 1.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 고려 말 성리학 수용은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수용과정에 관해 많은 논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랜 연구에 비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에 있지만, 여말선초 성리학을 보는 연구자들의 기존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 시각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②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의 정.. 2019. 12. 9.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 2019.12.04 1. 프롤로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20세기의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0년대 이래로 조선 유학에 천착했던 그는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유학사를 구성해냈다. 그런 면에서 다카하시 도오루가 ‘근대적 전통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연구는 철저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카하시가 보기에 조선 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주자학에만 골몰”했고, 그들의 학문도 “지극히 간이하고 또 단조롭다.” 이런 논점으로는 조선 유학사의 역사적 의.. 2019. 12. 7.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2019.12.05 최종석은 한 연구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논증하려 했다. ①몽골 복속기에 이어지던 고려-원 관계가 1356년에도 기본적으로 지속했다. ②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는 몽골 복속기에 ‘본래적’ㆍ‘당위적’ 양상으로 변화했고, 그런 특징은 1356년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나는 두 번째 견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첫 번째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1356년을 기점으로 확실히 약해지는데, ①의 주장은 이런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원은 1356년 이전까지 고려의 국정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남의 ‘한적’(漢賊)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던 원은 1354년(공민왕 3).. 2019. 12. 6.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2019.12.05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元)과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가와 ‘부원세력’을 일시에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아울러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의 지역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의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가 지닌 패를 회수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의 계획 아래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반원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전격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각주:1] ‘반원운동’을 고려의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종합적으.. 2019. 12. 6.
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미야지마 히로시, 1996, 『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강 2019.11.06. 서론: 현대에 살아 있는 유교적 전통 한국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공적을 현창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실제로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대상은 고조 이하의 부계 조상과 그 배우자다. 이런 관습에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제사와 조상 현창은 단순히 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顯示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여전히 조상 숭배 관념 등 유교적 전통이 이어지는 건 이런 현실적 의의 덕분이다. 유교는 본래 중국에서 발생하여 한국ㆍ일본ㆍ베트남 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유교 수용의 양상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불교의 영향이.. 2019. 11. 7.
조선의 건국과 유교문화의 확대 도현철, 2004, 「조선의 건국과 유교문화의 확대」, 『동방학지』 124 2016.12.16 1. 머리말 저자에 따르면, 고려 말에 등장한 사대부는 고려의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들은 위화도 회군, 전제개혁, 조선왕조 개창 등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를 모델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경영을 지향했다. 이러한 지향 속에서 성리학을 개혁사상으로 하여 정치체제 개혁을 도모했지만 현실의 이해관계가 얽혀 쉽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상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고,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도교와 불교에 기초하여 운영되던 향촌 사회를 재편하는 것도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사대부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불교를.. 2019. 10. 19.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 송웅섭,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2019.10.19. 1. 향촌 사회의 유교화 여정 저자는 논의에 앞서 조선시대의 유교화 과정을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18세기에 鄭𣲚이라는 사람이 안정복에게 禮法을 자문했다. 그는 숙부 첩의 侍養子가 숙부의 상에 상복을 입어야하는지, 입어야 한다면 어떤 상복을 입어야하는지를 물었다. 안정복은 시양자가 숙부와는 친속관계가 아니므로 상복을 입어선 안 된다고 답했다.(『순암집』 권8, 答鄭都事𣲚問) 저자는 이 사례를 18세기 조선의 유교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들었다. 16세기 조선의 모습은 18세기와는 사뭇 달랐다. 연안 사람 李同은 아버지와 식사를 하다가 말다툼을 벌이고 홧김에 밥그릇을 던져 아버지에게 상해를.. 2019. 10. 19.
권근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지문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지문」 권근(權近) 天下至廣也. 內自中國, 外薄四海, 不知其幾千萬里也, 約而圖之於數尺之幅, 其致詳難矣. 故爲圖者率皆踈略.천하(天下)는 매우 넓다. 안으로는 중국(中國)에서 바깥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 알 수 없는데, 몇 자 되는 폭(暴)에다 줄여서 그리자니 자세한 내용을 다 담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것이 대개는 소략하다. 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圖頗爲詳備, 而歷代帝王國都沿革, 則天台僧淸濬混一疆理圖備載焉. 오문(吳門) 사람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만이 매우 상세한 내용을 갖추었고,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 연혁은 천태종 승려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실려있다. 建文四年夏, 左政丞上洛金公士衡,右政丞丹陽李公.. 2019. 9. 28.
[소지]1717년 안세휘 공인권 이록 요청 소지 1717년 安世徽 貢人權 移錄 요청 所志 本庫貢物主人安世徽。 본고(本庫: 장흥고)의 공물주인(貢物主人) 안세휘가 올린 소지 右謹陳所志矣段。 矣身丁丑年分。 同貢物主人金時達處。 湖西六月令所封供上紙。 半令貢物乙。 給價買得爲白有置。 依他例移錄事。 行下爲白只爲。 行下向敎是事。 삼가 소지를 올립니다. 저[矣身]는 정축년(1697) 즈음에 공물주인 김시달(金時達)로부터 호서에서 6월에 바쳐야 할 공상지(供上紙)에서 공물 절반을 [진상할 수 있는 권한을] 값을 주고 매득하였습니다. 다른 예에 의거하여 [공안(貢案)의 공인 명부를 김시달에서 본인으로] 바꾸어 적는 일을 분부하도록 처분해주십시오. *矣段(의딴): 이것은, 이것인즉 *矣身(의신): 이 몸, 저 *貢物主人(공물주인) : 공인(貢人)을 가리킴 *月令(월령) :.. 2019. 9. 26.
[단자]1866년 백종수 원납전단자 1866년 백종수白宗洙 원납전단자願納錢單子 單子단자 景福宮營建時。 再願納錢伍兩。 경복궁을 영건할 때 재(再) 원납전 5냥을 납부함 丙寅 正月 日 新平 白宗洙병인년(1866) 정월 일 신평(新平: 전라도 임실 신평면) 백종수 [수령의 답변]如是殫竭。 極爲嘉尙事。이와 같이 남김없이 다 내어주니 지극히 가상한 일이다. 卄十七27일 2019. 9. 26.
[소지]1699년 이동표의 종 분선이 올린 소지 1699년(숙종 25) 이동표의 종 분선이 올린 소지(所志)[소장처: 최승희 선생님] □□□□□李東標奴粉先 (左寸)□□□□□이동표의 노비 분선이 올린 소지 (분선의 수촌) *□□□□□: 이동표 집안에서 다섯 글자를 오려내어 알 수 없는 글자*左寸: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와 둘째 마디 사이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직접 송장을 접수하기보다는 노비를 대리인으로 세워 송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노비들은 서명을 할 때 자신의 좌촌 길이를 재어 그려넣었다.*이하 이두는 밑줄을 쳐둔다. 右謹言所志矣段。矣上典亦年前占得一穴於春陽面於老洞矣內上典墳山局內不遠之地。삼가 소지(所志)를 말씀드립니다. 저의 상전은 몇 해 전에 춘양면(春陽面) 어로동(於老洞)에 있는 안상전 분산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묫자리를 ..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