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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by 衍坡 2019. 12. 6.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2019.12.05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元)과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가와 ‘부원세력’을 일시에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아울러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의 지역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의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가 지닌 패를 회수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의 계획 아래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반원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전격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각주:1]


‘반원운동’을 고려의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한 선구적인 연구는 민현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에 따르면, 반원운동은 반원자주적 개혁의지로 충만했던 공민왕의 정치적 기반세력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원의 국력 쇠퇴가 맞물리며 이루어진 “전격적이며, 근본적이고, 또한 적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려와 원의 관계를 근본에서부터 전면적으로 재조정했다고 한다.[각주:2] 이 설명은 이후 연구에서도 그대로 수용됐다. 이익주는 공민왕이 세조구제 목표를 초기 대원정책의 목표로 설정했다가 원의 국력 쇠퇴를 틈타 전면적인 반원정책으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파악했다. 그렇게 설정된 반원의 목표는 “국내의 부원세력을 척결하고 원에 대해서 완전한 자주성의 회복”이었고, 공민왕이 1356년 5월에 단행한 조치들은 “원과 관계를 단절할 것까지 염두에 둔 과감한 조치”였다.[각주:3]



물론 민현구와 이익주의 설명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민현구는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점부터 일관되게 반원자주적 개혁을 추구했다고 판단했지만, 이익주는 그의 방침이 세조구제 회복에서 반원으로 대폭 수정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고려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양국 관계가 달라졌다고 보는 시각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어느 쪽이든 1356년의 반원운동이 고려와 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근래의 연구들은 1356년을 기점으로 고려-원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화했다는 설명에 비판적이다. 이강한은 공민왕의 목표가 1356년 이후에도 세조구제 회복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1356년에 단행된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이 즉위 초부터 추구했던 포괄적인 국정개혁의 일환이었다. 공민왕의 정치적 의도는 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세조구제 회복을 바탕으로 국정 주도권을 장악해 포괄적인 국정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각주:4] 한편, 최종석은 1356년부터 1369년까지 고려와 원의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1356년을 전후한 시기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양국이 1356년 이전에 관계 맺던 방식을 그 이후에도 유지했던 만큼 당시의 양국 관계를 ‘형식적인 사대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각주:5] 아울러 형식적 군신관계에 그쳤던 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가 몽골 복속기에 실질적인 군신관계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책봉-조공 관래의 ‘본래적ㆍ당위적 측면’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이강한과 최종석의 논점은 1356년에 추진된 개혁을 반원운동으로 보는 데 비판적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점이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강한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이익주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세조구제’라는 틀을 부정하지 않고, 공민왕의 목표가 세조구제 회복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익주는 공민왕의 초기 목표가 세조구제 회복이었다고 보았다. 이강한은 이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공민왕의 외교방침이 반원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반면, 최종석은 이익주의 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책봉-조공 관계라는 틀로는 고려와 원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거나 양국 관계가 1356년 전후에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이익주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다.


결론적으로 현재 반원운동을 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몽골 복속기에 이어진 양국 관계가 반원운동을 계기로 형식적인 책봉-조공 관계로 변화했다는 설명인데, 민현구와 이익주의 논의가 대표적인 연구다. 두 번째는 반원운동은 사실상 원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세조구제 회복을 통해 포괄적인 국정 개혁을 달성하려는 조치였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몽골 복속기의 고려-원 관계가 기본적으로 1356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입장으로 반원운동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생각은 반원운동의 성격과 1356년 이후의 고려-원 관계를 두고 서로 입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1. 1356년의 개혁을 ‘반원운동’으로 명명해도 무리가 없는지를 두고 여러 논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이강한은 1356년의 개혁을 몽골 복속기의 하한선으로 설정해 온 암묵적인 전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견해는 1356년의 개혁이 꼭 ‘반원’이라는 성격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실제로 그는 몽골 복속기 고려 국왕의 정치적 성향을 ‘친원’과 ‘반원’으로 재단하는 것이 ‘목적주의적 역사 해석’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다. 즉, 종래의 연구들이 당대의 사실을 바탕으로 국왕의 정치적 지향을 규명하기보다 국왕의 정치적 지향을 ‘친원’ 혹은 ‘반원’으로 전제하고 당대의 모든 사실들을 그 틀에 맞게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이강한, 2010, 「‘친원’과 ‘반원’을 넘어서 - 13~14세기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역사와 현실』 78) 필자는 ‘반원운동’이라는 명칭이 당대의 역사적 맥락보다는 1960년대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원운동’이라는 용어가 꼭 적절한 역사 용어인지 의구심을 품는다. 하지만 아직 ‘반원운동’을 대체할 만한 대안적인 용어가 아직 제시되지 않았으므로 일단 이 글에서는 ‘반원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2. 민현구, 1989, 「고려 공민왕의 反元的 개혁정치에 대한 일고찰―배경과 발단」, 『진단학보』 68. [본문으로]
  3.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본문으로]
  4.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49. [본문으로]
  5. 최종석, 2010,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 : ‘원간섭기’와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역사교육』1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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