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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by 衍坡 2020. 2. 8.

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2020.01.17.




세조구제





1. 들어가며: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의 쟁점


고려와 몽골은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맺었다. 1259년(고종 46)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양국의 관계는 13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고려-몽골 관계는 몽골 복속기 이전에 고려가 다른 중국 왕조들과 이어갔던 외교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고려 국왕이 몽골 황실과 통혼하여 부마의 작위를 받는가 하면, 몽골 황제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의 폐위와 즉위가 결정되기도 했다.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에게 친조(親朝)해서 외교 현안을 해소하기도 하고, 몽골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업은 ‘부원배’(附元輩)가 고려 안팎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왕의 권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은 몽골 복속기에만 나타난 독특한 풍경이다. 그간 한국사 연구자들이 이 시기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려 애쓴 것도 그런 독특한 역사적 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몽골 복속기의 정치사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는 틀로 이해해 왔다.[각주:1] 이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는 몽골과 오랜 항전을 벌인 끝에 강화를 맺고 몇 가지 성과를 얻어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풍속을 따르는 것, 즉 ‘불개토풍’(不改土風)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자신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존속하는 것을 몽골(원)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국가인 고려는 몽골(원)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물론 몽골은 특정한 상황에서 몽골 특유의 ‘6사’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었다.[각주:2] 즉, 몽골 복속기의 고려는 엄연히 고유한 정치체를 유지하며 몽골과 전통적인 ‘외교’를 맺은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설명이다.



2000년대 이후로 몽골사 연구의 성과가 쌓이면서 이른바 ‘세조구제론’도 비판에 직면했다. 세조구제론이 독자적인 국가체로서 고려의 위상을 강조했다면, 몽골사 연구자들은 전체적인 몽골 제국 체제 안에서 고려의 위상에 주목했다. 예컨대, 김호동은 고려를 몽골 제국의 ‘속국’(屬國)이자 ‘속령’(屬領)으로 보았다. ‘속국’은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제국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국가라면, ‘속령’은 제국 질서 안에서 몽골 대칸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다. 고려 군주가 외국(外國)의 군주이자 몽골 황제의 부마(駙馬)라는 두 지위를 동시에 누리면서 고려가 속국과 속령의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고 한다. 한편,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고려-몽골(원)의 관계가 책봉-조공 관계였다는 설명을 부정하고는 고려가 몽골 특유의 분봉제도에 따라 투하된 ‘투하령’(投下領)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들은 그간 한국사 연구자들이 구축해 온 고려 후기사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익주는 몽골사 연구자들의 비판에 대응하여 자신의 입론을 보완하고 고려-몽골(원) 관계가 책봉-조공 관계임을 재확인했다. 그는 몽골 복속기에 책봉과 조공이 이루어진 만큼 책봉-조공의 형식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다만 책봉-조공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또 책봉국과 조공국의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고려-몽골의 관계는 고려의 국가적 존재를 전제로 하는 책봉-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면서 여기에 왕실 혼인이나 내정 간섭 등 시기적 양상이 더해진 것”이었다. 즉, 몽골 복속기의 특수한 현상들은 고려-몽골 관계가 책봉-조공 관계였음을 부정하는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각주:3]



일련의 논쟁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사 연구자와 몽골사 연구자들은 고려가 몽골 제국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했는가를 두고 입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몽골사 연구자들은 고려를 독자적인 국가라기보다 몽골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김호동이 고려의 위상을 ‘속국’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속령’이었음을 강조한다든지, 모리히라가 고려를 아예 몽골의 ‘투하령’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김호동의 견해는 이익주가 지적한 것처럼 속국과 속령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위상이 어떻게 고려에서 공존할 수 있었는지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인다. 모리히라의 견해는 고려의 복잡한 위상을 ‘투하령’으로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다소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조구제론’에서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조구제론’이 전제하는 ‘국가’의 개념이다. ‘세조구제론’은 기본적으로 불개토풍의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독자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명 틀이다. 이익주가 굳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규정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세조구제론에 전제된 국가 개념이 당대의 역사성을 충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더구나 근래의 연구들은 고려-몽골 관계를 단순히 국가와 국가의 관계 또는 책봉-조공 관계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들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근래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세조구제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2. ‘국가’ 개념의 문제


세조구제론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고려에서는 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위 승계가 부정된 적이 없다. 충렬왕은 몽골 황제에게 즉위 교서를 받았지만, 왕위 계승 사실을 고한 곳은 태조를 비롯해 선왕의 4대조를 봉안한 경령전(景靈殿)이었다. 충숙왕ㆍ충선왕ㆍ충목왕ㆍ공민왕 등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태조 왕건에게서 이어지는 왕위 정통성 자체는 몽골 복속기에도 부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가 부정된 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조구제론에서 전제하는 국가의 개념이 과연 당대의 역사성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좀 더 따져볼 여지가 있다.


세조구제론의 국가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윤영인(Peter Yun)의 논의를 비교 준거로 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윤영인은 기본적으로 ‘조공체제론’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 이론이 중국 중심적인 시각(혹은 한족 중심적인 시각)을 강하게 반영하여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국력의 차이를 초월하는 동등한 국제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서구의 ‘평등’한 국제관계와 전근대 동아시아의 계서적 국제관계의 차이는 단지 명목적인 ‘평등’을 얼마나 의례적으로도 인정하였는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이해할 때 중요한 건 명목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정학적 힘의 균형과 실리주의적 대외정책”이었다.[각주:4] 즉, 국제질서의 핵심을 철저히 힘의 논리와 역학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윤영인의 시선에서 보면,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든 근대 세계의 국제질서든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물론 다분히 현대 국제정치학의 논리로 전근대 동아시아의 외교를 이해하는 논점이다. 여기에 전제된 국가 역시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독자적인 단일정부를 구성하는 근대 국가와 유사하다.



이익주의 논점을 윤영인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윤영인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나타나는 계서적인 관계가 힘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본다. 심지어 전근대 동아시아의 계서적인 국제관계는 송(宋)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허구적이기까지 하다. 예컨대, 송은 대하(大夏)에 ‘세폐’(歲幣)의 형식으로 막대한 재물을 지급하면서까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했으나 실제로 송이 차지한 ‘황제국’의 위상은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면 책봉-조공은 “중화주의의 허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익주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책봉-조공 관계의 정의를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로서, 국가 간에 대등하지 않은 상하 관계를 인정하면서 책봉과 조공을 상호 교환하는 관계”로 이해한다. 물론 이것은 책봉-조공에 관한 아주 일반적인 정의다. 그렇지만 이 정의를 세조구제론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익주에게 책봉-조공은 ‘국가’의 존립을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외교적 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윤영인과 이익주의 차이점이다. 윤영인에게는 계서적 질서는 명목상의 의례에 불과하므로 그다지 중요하게 검토할 필요가 없지만, 이익주에게 책봉-조공은 고려라는 국가의 존립을 보장해주는 장치다.


이익주와 윤영인의 견해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다. 바로 국가 간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윤영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제질서의 핵심이 국가 간의 역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가 간의 역학관계를 국제관계의 핵심변수로 간주하는 것은 이익주의 견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중국과 한반도 왕조의 국제관계를 통시적으로 검토하고 양국 관계를 일관되게 책봉-조공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판단의 기준은 책봉-조공 관계를 구성하는 몇 가지 형식적인 요소다. 다만 이 틀 안에서 책봉국이 조공국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강도는 양국의 역학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강해지고 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익주의 설명에서 역학관계가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물론 이익주는 “자주성이란 상황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책봉-조공 관계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5] 하지만 그가 역학관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익주는 고려-몽골(원) 관계의 결정적인 변화가 몽골의 국력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운동이라는 역학관계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각주:6] 그만큼 역학관계는 이익주가 고려-몽골(원)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요소다.


윤영인이 현대 국제정치학의 개념과 논리를 전근대 국제관계에 고스란히 투영하지만, 이익주는 중국과 한반도 왕조의 형식적인 상하 관계를 엄연한 역사적 현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윤영인과 약간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근대 국가와 유사한 국가 개념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는 이익주와 윤영인의 생각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익주가 생각하는 고려는 엄연히 배타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국가다. 물론 그는 고려에 대한 몽골(원)의 정치적 영향을 엄연한 역사적 현실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몽골 황제의 영향력조차 고려 국왕이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고 간주하고, 고려 국왕의 국왕권이 위축되어 ‘부원세력’이 난립하는 상황을 ‘비정상적 상황’으로 규정한다.[각주:7] 부원세력이 난립하고 왕권이 축소되어 몽골 황제의 개입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은 개혁의 대상이다. 이 생각에는 당연히 주권자인 고려 국왕이 고려의 독자적 영역을 통치해야 하고, 몽골 황제의 영향력조차 이 주권자를 거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 점에서 이익주가 생각하는 고려는 독자적인 단일정부가 배타적인 영역을 통치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익주의 논점으로는 권력 구조가 중층적으로 작용했던 몽골 복속기 고려의 국가적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기 어렵다. 근래의 연구들은 실제로 이익주의 관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분석했다. 이명미에 따르면, 고려의 권력 구조는 몽골 복속기에 들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의 고려 경내에서 최고 권력자는 원칙적으로 고려 국왕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몽골 황제가 고려 국왕의 상위 권력자이자 ‘최고권’으로 존재했다. 즉, “고려국왕 및 신료들에게 몽골 황제권이 최고권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그와의 관계를 통해 권력의 여탈이 이루어지는” 권력 구조가 몽골 복속기에 성립한 것이다. 고려 국왕은 이런 구조 속에서 고위 관원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몽골관인과 고려국왕의 갈등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 내 정치적 분쟁 상황에서도 몽골황제권이 갈등의 중재자 혹은 최종결정권자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외교와 정치(내정)의 경계가 상당부분 흐려진 고려-몽골 관계의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손색이 없다.[각주:8]



이명미의 연구는 몽골이 꼭 국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정치적 영향력을 관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몽골 복속기 동안 고려는 고려 국왕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영역이자 몽골 황제의 성지가 효력을 발휘하는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권력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면서 권력 주체가 이원화하고 권력도 중층적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영역 안에서 배타적이고 균일한 주권이 행사되는 근대 국가와 유사한 국가 개념으로 보면 매우 낯설고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근대 국가와 유사한 국가 개념으로는 몽골 복속기의 중층적인 권력 구조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3. ‘책봉-조공 관계’의 문제


이익주의 입장에서는 이명미의 견해가 충분한 반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책봉-조공 관계를 이해할 때 ‘내포’를 줄이고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책봉-조공 관계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적인 기준은 시기마다 달라지는 세세한 현상들이 아니라 책봉국과 조공국 사이에 나타나는 일련의 ‘형식’이다. 즉, 각 시기마다 달라지는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과 역학관계는 책봉-조공 관계의 본질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익주의 논의를 좀 더 세밀하게 비판하려면 단순히 ‘국가’의 개념만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가 이해하는 책봉-조공 관계 자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그는 책봉-조공 관계라는 틀을 활용해서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했다는 견해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고려-몽골 관계가 정말로 책봉-조공 관계로 규정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일단 고려-몽골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규정하는 이익주는 고려 국왕ㆍ부마ㆍ정동행중서성 승상이라는 세 지위 중에서 고려 국왕의 지위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한 위에서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음을 보장하기 위한 입론이다. 그가 고려 군주의 지위에서 고려 국왕위를 강조하는 핵심 근거는 바로 다음의 사료다.


[1275년(충렬왕 1) 5월] 왕이 조사(詔使)가 온다는 보고를 받고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맞이했다. 왕은 [몽골의] 공주에게 장가들어서 비록 조사라고 하더라도 성 밖으로 나아가 맞이한 적이 없었는데, 역관 김태(金台)가 원에 갔을 때 성관(省官)이 그에게 말했다. “부마왕이 조사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왕은 외국의 군주이니 조서가 도착하면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부터 [왕이 직접 조사를] 맞이하기 시작했다.[각주:9]



이익주에 따르면, 이 기사는 몽골이 고려 군주를 ‘외국지주’(外國之主)로 규정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몽골 관원은 고려 군주가 일국의 국왕인 동시에 몽골 황제의 부마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했지만, 그중에서도 고려 국왕이라는 지위를 우선시했다. 그것은 단지 레토릭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양국 관계에 적용되어 고려 군주가 조사(詔使)를 직접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기사는 고려-몽골 관계 초기에 고려 군주의 위상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충렬왕은 부마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조사를 맞이하는 번잡한 절차를 생략하려 했고, 그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몽골 관원은 고려 국왕의 지위를 들어 조사를 맞이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부마왕이 조사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서를 맞이하라고 요구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이익주의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충렬왕 대 이후로는 ‘부마’의 지위보다 ‘외국지주’의 위상이 우선시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사료의 특정 문구만으로 판단하기보다 고려-몽골 관계의 장기적인 추세 속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근래의 연구는 고려-몽골 관계에 몽골적인 특성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쿠빌라이가 원종의 친조를 요구하면서 천자-제후 관계에 관련된 중국의 전통적인 레토릭을 구사한 기록이 보이지만, 그 실제 내용은 몽골적인 특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명미는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친조를 요구했던 것이 단지 천자와 제후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보다는 쿠빌라이가 여러 왕공(王公)과 군목(群牧)을 소집해 몽골 제국 대칸으로서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각주:10] 정동훈의 판단도 이명미와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르면, 몽골제국은 애초부터 정복지역의 수장에게 몽골의 대칸을 조회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몽골의 입장에서 그것은 중국의 제도가 아니라 ‘복속’을 표현하는 몽골식 전통이었다. 따라서 “고려국왕이 대칸의 조정에 친히 찾아간 일은 사실상 몽골이 일반적으로 주변 지역에 요구한 항복 조건 가운데 한 가지인 군주의 출두가 구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각주:11]


하나 더 생각해볼 문제는 과연 책봉과 조공의 형식이 일정했는가 하는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듯이 이익주는 책봉과 조공의 ‘형식’을 독립변수로, 각 시기의 정치적 상황과 역학관계를 종속변수로 설정한다. 만약 책봉-조공의 형식을 중국과 한반도 왕조의 관계를 규정하는 독립변수로 설정하려면 그 역사적 성격도 일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는 책봉과 조공의 형식조차도 일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중국 왕조가 주변국 군주에게 수여했던 책봉문서는 몽골제국기를 기점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한ㆍ당ㆍ송은 주변국의 군주에게 ‘책’(冊)을 수여했지만, 명ㆍ청은 ‘고명’(誥命)을 보냈다. 이것은 단지 ‘형식’만의 변화가 아니라 책봉의 의미도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책이 기본적으로 피봉자에게 ‘작위’(爵位)를 수여하는 문서였다면, 고명은 송대 이래로 5품 이상의 ‘관료’에게 발행하던 임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군주는 몽골 복속기 이전까지 중국 왕조에게서 ‘작제적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몽골 복속기 이후에는 ‘관료적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다만 몽골 복속기 동안 고려 군주는 ‘부마고려국왕’이라는 작제적 지위와 ‘정동행중서성 승상’이라는 관료적 지위를 함께 부여받았다.[각주:12]


이익주가 책봉-조공의 형식으로 이야기한 조건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①원의 연호 사용, ②원의 역서 채택, ③고려 국왕에 대한 인장 수여를 들었다. 이런 조건들은 고려가 요ㆍ금과 책봉-조공을 맺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던 만큼, 고려인들도 원과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인식했으리라는 것이 이익주의 판단이다. 그러나 정동훈의 연구는 그 요소들을 꼭 책봉-조공 관계의 요소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의 연호와 역서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천자가 주재하는 시간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결국 중국의 역서(曆書) 반포와 긴밀히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작 몽골 복속기 이전까지 중국 왕조가 고려에 역서를 수여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히려 중국의 역서를 사용하는 현상은 몽골 복속기인 1281년 이후에야 일반화된다.[각주:13]


인장 수여 역시 책봉 문서와 마찬가지로 시기에 따라 다른 성격을 지녔다. 정동훈에 따르면, 요ㆍ금은 고려 군주 ‘개인’에게 일종의 ‘위세품’으로 인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와 조선의 국왕이 명에게 받은 인장은 국왕이라는 지위에 수여된 일종의 ‘직인’(職印)이었다고 한다. 이런 변화 역시 몽골 복속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몽골은 고려 군주의 ‘작위’를 인정하는 ‘부마고려국왕지인’(駙馬高麗國王之印)과 그의 ‘관료적 지위’를 인정하는 ‘정동행중서성인’(征東行中書省印)을 각각 수여했다고 한다.[각주:14] 이처럼 중국 왕조가 고려에 내린 인장의 성격이 균일하지 않았다면, 인장 수여 자체를 반드시 책봉-조공 관계의 한 구성 요소로 볼 필요는 없다.[각주:15] 그렇다면 중국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관계, 특히 고려-몽골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의 틀로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이익주의 설명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고려-몽골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였을까? 이익주의 견해처럼 고려 사람들은 고려-몽골 관계를 일종의 ‘사대관계’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정작 양국 관계의 주도권을 쥐었던 몽골은 일관된 외교 관계의 틀을 구성해내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몽골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지역과 정치체를 단일한 체제로 편입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각 지역의 복속 과정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당 지역의 존재 양태를 결정”했다.[각주:16] 따라서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특정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몽골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 구조 속에서 다양한 정치행위자가 등장하면서 국왕의 지위가 불안정해졌다는 이명미의 지적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고려 군주가 고려 국왕ㆍ부마ㆍ정동행성 승상이라는 세 지위를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활용했다는 그의 지적도 마찬가지다.





4. 나오며


이른바 ‘세조구제론’은 1990년대로서는 매우 탁월한 연구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몽골사나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그 당시의 연구 수준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세조구제론은 책봉-조공 관계라는 틀을 활용해 고려-몽골 관계를 치밀하게 설명하고, 그 안에서 몽골 복속기의 정치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다만 세조구제론이 전제하는 국가의 개념이 과연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개념인지, 또 책봉-조공 관계라는 틀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도구인지는 의문스럽다.


세조구제론에서 전제하는 국가의 개념은 사실상 독자적인 정부가 배타적인 영역을 통치하는 근대 국가와 매우 흡사하다. 물론 세조구제론이 원의 정치적인 개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게 관철되는 고려의 정치 현실을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는 것도 아니다. 몽골 복속기에 추진된 개혁의 목표가 ‘세조구제 회복’에 있었다는 견해에는 바로 그런 생각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근대 국가적인 국가 개념을 전제하면 몽골 황제와 고려 국왕으로 이원화한 중층적인 권력 구조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정치를 해나갔던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충실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편,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했다는 견해는 고려과 몽골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규정하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세조구제론에서 굳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양국 관계가 국가와 국가의 관계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면, 고려는 당연히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보존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고려-몽골 관계를 책봉-조공으로 규정하는 것은 세조구제론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지 중 하나다. 그렇지만 근래의 연구들은 고려-몽골 관계를 꼭 책봉-조공 관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일단 ‘중국적인 요소’라고 간주되던 몽골 복속기의 ‘조근’(朝覲)이 사실은 몽골의 전통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더구나 세조구제론에서 책봉-조공 관계의 일정한 ‘형식’으로 규정했던 책봉과 그 부수적인 관행들의 성격이 사실은 전혀 일정하지 않다는 것도 밝혀졌다. 오히려 세조구제론에서 책봉-조공 관계의 형식이라고 간주했던 것들은 몽골 복속기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반드시 책봉-조공 관계로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조구제론이 더는 13~14세기의 역사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제 몽골 복속기의 정치사와 국제관계사를 설명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몽골 복속기에 관한 한국사 연구가 주로 고려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부각하는 데 진력해 왔다면, 이제는 몽골 제국의 독특한 통치 질서 속에서 고려의 권력 구조가 보이는 특징과 그 특징이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현상의 역사성을 밝히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고려를 정말로 고려답게 설명해내는 방식일 것이다.






  1. 몽골 복속기 고려의 위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세조구제론’ 외에도 ‘부마국체제론’, ‘이중국가론’, ‘책봉-조근 체제론’ 등이 있다. 이 설명들에 관한 연구사 정리는 채웅석, 2003, 「원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를 참조하면 유용하다. 다만 그 여러 설명 중에서 지금껏 가장 유력한 설명틀은 역시 ‘세조구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채웅석 역시 세조구제론에 기초에서 자신의 견해를 입론했다. [본문으로]
  2. 이익주, 1996,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소위 ‘세조구제’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36. [본문으로]
  3. 이익주, 2009,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검토: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시적ㆍ통시적 접근」, 『한국중세사연구』 27; 2011,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본문으로]
  4. 윤영인(Peter Yun), 2007, 「10-13세기 동북아시아 多元的 國際秩序에서의 冊封과 盟約」, 『동양사학연구』 101 [본문으로]
  5. 이익주, 2009, 앞의 글. [본문으로]
  6.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본문으로]
  7. 이익주, 1995, 앞의 글. [본문으로]
  8. 이명미, 2017, 「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ㆍ외교 환경」, 『역사비평』 121. [본문으로]
  9. 『고려사절요』 권 19, 충렬왕 원년 5월. [본문으로]
  10. 이명미, 2016, 「고려국왕의 몽골 入朝양상과 국왕권의 존재양태」, 『한국중세사연구』 46. 이명미는 몽골 복속기에 ‘입조’(入朝)가 “고려-몽골 관계에서 외교적, 정치적 소통방식의 한 가지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은 물론이고, 그것이 향후에 어떤 양상을 보이며 변화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충선왕 대까지 입조는 외교적ㆍ정치적 소통방식의 하나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지만, 충숙왕 대부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고려 국왕이 몽골 황제 개인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혹은 몽골 황실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설명은 경청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몽골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충숙왕의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본문으로]
  11. 정동훈,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專有) -」, 『역사와 현실』 113. [본문으로]
  12. Jung Donghun, 2016, “From a Lord to a Bureaucrat: The Change of Koryo King’s Status in the Korea-China Relations,” Review of Korean Studies 19-2; 정동훈, 2019a,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역사와 현실』 113. [본문으로]
  13. 정동훈, 2019a, 앞의 글 [본문으로]
  14. 정동훈, 2019a, 앞의 글. [본문으로]
  15. 오늘날에는 중국과 그 주변국이 책봉과 조공이라는 틀로 ‘외교’ 관계를 구성했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동훈은 애초에 전근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조공시스템’(tributary system)을 구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오늘날 책봉-조공 관계라는 틀은 몇 가지 요소들을 재료로 후대에 사후적으로 재구성해낸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정동훈, 2019a, 앞의 글) 종종 책봉-조공 관계의 ‘전형’이라고 간주된 명과 조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동훈의 시각에서 보면, 명이 처음부터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이고 체계적인 예제질서를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명이 주변국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일원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몽골제국과의 관계 맺는 데 익숙했던 고려였고, 명은 고려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주변국에까지 확대 적용하려 애썼다. 명이 주변국에까지 확대 적용하려 했던 제도들의 기원은 물론 몽골제국기 고려-몽골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정동훈, 2019, 「明과 주변국의 外交關係 수립 절차의 재구성 ― 이른바 ‘明秩序' 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여 ―」, 『명청사연구』 51) [본문으로]
  16. 정동훈, 2019a, 앞의 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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