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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by 衍坡 2019. 9. 6.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 ‘성리학’과 ‘사대부’ 개념의 문제 -


2019.09.06




안향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의 영정.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해 왔다. 신흥사대부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주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견해를 검토하여 기존 연구의 시각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우선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주장이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학문과 사상의 수용이라는 행위는 가시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학문과 사상 그 자체는 국가ㆍ사회ㆍ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과 결합하여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사 연구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신흥사대부가 성리학을 수용했다고 판단했을까? 선행 연구에서는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 왔다고 생각한다.


첫째, 신흥사대부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글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이기론’(理氣論) 같은 성리학적 개념어가 등장하는가 여부다. 예컨대, 정도전과 권근의 학문관을 검토한 강문식은 정도전과 권근이 모두 ‘이법적 천관’(理法的 天觀)을 바탕으로 하늘과 인간이 동일한 이기(理氣)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각주:1] 이 점은 문철영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각주:2] 문철영은 정도전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근거로 그의 글들을 예로 든다. “만물은 비록 나타나지 않아도 천심(天心)은 정히 분명하네. 종횡으로 변화 다르지만 모두 하나 가운데서 생기네.” 문철영의 논점에서 보면, 이 시는 정도전이 이일분수(理一分殊) 관념을 드러낸 명확한 증거다.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이기철학”(理氣哲學)을 드러낸다는 사실도 정도전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둘째, 신흥사대부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유교적 덕목 혹은 유교적 윤리관이다. 실제로 한국사 연구자들은 신흥사대부가 허형(許衡)의 학문을 수용하여 『소학』을 중시하고 ‘실천윤리’에 강조점을 찍었다고 주장해 왔다. 허남진에 따르면, 노재 허형의 성리학은 “소학을 중시하고 일상에서의 수기(修己)와 지경(持敬)의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데” 집중했고, “우주와 인간을 포괄하는 사변적인 이론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허형의 성리학은 주자의 형이상학적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이며 특히 소학을 존중했다”고 본다.[각주:3] 문철영과 강문식 역시 이런 시각을 그대로 공유한다. 문철영은 안향이 『소학』을 중시하며 실천적 윤리를 강조했다거나 정몽주가 『주자가례』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운 사실에 주목하며 그것이 노재학의 전통과 맞닿는다고 보았다. 강문식은 신흥사대부들이 노재학을 수용하여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을 정치ㆍ사회적 문제 해결 방안의 핵심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이 특정한 성리학적 개념과 덕목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신흥사대부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글에서 이(理)ㆍ기(氣)ㆍ천인합일(天人合一)ㆍ충효(忠孝)ㆍ수신(修身) 등의 개념어를 열심히 발굴해 왔던 것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이 고려 말 지식인의 글에서 특정한 개념어에 유독 집중한 것은 성리학을 ‘철학’으로 간주하는 그들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문철영은 성리학이 “송대 유학의 새로운 흐름 중에서 주로 윤리ㆍ철학적 측면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허남진은 허형의 학문이 주자의 학술과 달리 사변적 이론체계를 세우지 못했다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주자학의 핵심이 사변적 이론체계에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리학 인식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영시(余英時)는 ‘철학’으로서의 성리학 연구를 비판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이학(理學)의 ‘철학화’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곧 이학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이학 전체로부터 독립해나갔고, 더욱이 그것은 유학이라는 커다란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것은 물론 20세기 이후 중국의 성리학 연구를 겨냥한 비판이지만, 한국사 연구자들의 성리학 인식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각주:4] 여영시가 보기에 성리학은 결코 윤리나 형이상학적 측면으로 국한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각주:5]. 그가 보기에 송대 사대부들에게 “‘위로 공맹을 잇는 것’[道統]과 형이상학의 수립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전체 이학 체계에서 가운데서 그것들은 두 번째 순서에 머물 뿐”이었다.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합리적 인간질서의 재수립”이었다. 주희를 포함한 송대 사대부들은 정치와 사회의 문제를 가장 중심에 두고 사유했으며, ‘성리학’이라는 학술은 그들의 정치적ㆍ사회적 구상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각주:6] 이런 생각은 민병희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주희가 “그의 이론을 통하여 해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궁극적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인 질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사회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그의 사회ㆍ정치적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각주:7]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성리학에서 이기 담론이나 충효ㆍ인의 같은 덕목을 강조하는 방식의 분석은 자못 피상적이다.


물론 성리학의 전체 학문 체계 안에서 형이상학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리학의 전체 학문 체계 안에서 형이상학적 측면만을 강조해 신흥사대부의 사상을 설명하면, 그들에게 성리학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송대 사대부의 언어로 정당화하려고 했는가? 송대 사대부와 유사한 논리를 구사하면서 구현하려고 했던 그들의 정치적 구상은 ‘시사출처’에 관한 송대 사대부의 구상과 동일한가? 만약 같다면 신흥사대부는 송대와 자신들의 역사적 조건을 동일하다고 간주했는가? 같지 않다면 그들이 송대 사대부의 학술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송대 사대부의 정책과 학술이 신흥사대부에게 중요했다면, 그들은 왜 여전히 자신의 상소에서 종래의 ‘천인감응론’을 내세웠는가?[각주:8] 도대체 그들이 송대 사대부의 정치와 학술을 탐구하면서 해결하려고 했던 그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필자는 선행 연구의 설명에서 이런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사 연구자들이 신흥사대부의 사상적 측면에서 성리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유학사 전개 과정이 달랐음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9] 문철영은 고려 중기에 이미 신유학이 유입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했다. “여송(麗宋)간의 교류 및 고려유학의 성장을 통해 송에서 형성되고 있던 신유학의 단계적 흐름을 고려 사상계에서도 똑같이 밟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가 고려와 송의 유학사 전개 과정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1170년(의종 24)의 무신난은 인종ㆍ의종대에 모순으로 노정되기 시작하던 사상계 일각에서의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고려 사상계의 자체적인 발전과정에 따라 극복할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유학사상의 발전적 전개에 왜곡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려 사상계가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극복해야 했다는 견해는 중국사의 당송변혁기야말로 고려가 가야하는 ‘당연한 길’이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바로 그 점에서 고려와 송의 유학사 전개가 달라졌던 지점을 “왜곡”이라고 표현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엄밀히 말해서 송과 고려의 유학사 전개 과정이 달랐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두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영시에 따르면, “당대 문벌은 기본적으로 정치세계의 중심을 점했고 ‘한미한 사’들은 시종일관 변두리에 처했다.” 그러나 송대에는 달랐다. “송대 사람들은 진사과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입신양명할 길이 없었다. 문벌 제도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핵심이 있다.” 이제는 문벌이 아니라 사의 ‘능력’이 중요해졌고, 그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핵심 장치가 진사과였다. 국가로서도 진사과에 합격한 인물들을 매우 극진히 대우했다. 그 결과 진사는 976년부터 1020년 사이에 9,323명이, 1020년부터 1057년까지는 8,509명이 새로 배출되었다. 당나라 통치기 전체를 통틀어 배출한 진사가 6,442명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고려해보면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송대에는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진사시가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사시 합격은 송대에 재상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각주:10]


문제는 이 송대에 배출된 그 많은 진사들이 모두 중앙에 진출해 관직 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민병희에 따르면, 성리학은 “관료가 되는 것에 실패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지역 사인들에게 엘리트 신분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호소력을 가졌다.” 지방의 사들이 마음공부를 핵심으로 하는 학(學)의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엘리트로서의 존재 기반을 구축하고 보존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각주:11] 즉, “지역사대부들이 어떻게 어떠한 종류의 외부적 권위–즉 국가권력이나 기타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의 권력들-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권력의 주체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 것이었다.”[각주:12] 그렇게 보면 성리학은 중앙의 엘리트 뿐 아니라 지방의 엘리트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상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고려의 역사적 조건은 송의 상황과 매우 달랐다. 물론 정도전은 1362년 10월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각주:13] 그가 지방 출신이었음을 고려하면, 송대 사대부와 표면적으로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송과 달리 여전히 문벌이 고려의 정치세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전기와 후기의 주요 문벌은 서로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려 전기에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문들이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학의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국가의 역할을 일정 부분 대리할 수 있는 지방 엘리트가 고려의 지방 사회에 존재했는지, 그들의 존재 양상은 송대의 지역 엘리트와 유사했는지는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당송변혁기와 여말선초기의 역사적 조건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서로 역사적 조건과 맥락이 달랐다면, 유학의 흐름도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선행 연구들은 고려 말 정치사상으로서 ‘성리학’이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선행 연구에서는 고려 말의 정치가 혹은 지식인의 저술에서 성리학적 개념어를 발견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은 송대의 사대부와 고려의 ‘사대부’를 매우 유사한 존재로 가정해 왔지만, 두 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달랐던 만큼 두 정치세력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제는 관심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으로 돌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려 말의 지식인들이 송대 사대부의 정치와 학술을 탐구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송대 사대부의 정치와 학술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가? 이런 질문들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1. 강문식, 2004, 「鄭道傳과 權近의 생애와 사상 비교」, 『한국학보』 30, 142~178면. 강문식은 기본적으로 신흥사대부의 두 계열, 즉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의 정치적 입장 차이를 학문적 입장 차이로까지 확대하여 이해하는 데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다. 그의 글이 발표된 2004년에 신흥사대부론이 여말선초 정치사ㆍ사상사에 관한 통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강문식의 지적은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의 여지도 있다. 강문식에 따르면, 정도전과 권근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것은 학문적 견해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한다. 학문 경향보다는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지위야말로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달라지게 한 핵심 변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근래에 들어 날카로운 비판을 받는 중이다. 송웅섭에 따르면, 선행 연구들은 정치사의 흐름을 사회경제적 변동과 즉자적으로 연결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증을 결여했다고 한다. (송웅섭, 2017,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 세력의 이해’ 다시 보기」, 『역사비평』 120, 12~39면) 이런 지적은 강문식의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강문식은 정도전과 권근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원인을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찾지만,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경제적ㆍ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사회변혁을 추구할 것이라는, 혹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거부하거나 온건한 개혁을 추구할 것이라는 가정은 그 자체로 충분히 논증이 필요하다. 반례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던 조준의 집안은 몽골 복속기 이래로 번영을 누렸다. 만일 강문식의 논점에서 보면 ‘기득권층’이었던 조준이 역성혁명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문철영, 1982, 「여말 신흥사대부들의 신유학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 3, 97~123면. [본문으로]
  3. 허남진, 1991, 「조선전기의 성리학연구」, 『국사관논총』 26, 183~206면. [본문으로]
  4. 여기서 언급한 철학(哲學)은 19세기 이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정립한 학문 영역을 말한다. 그것은 물론 유럽의 철학 체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정통적 사유를 재해석해낸 결과로 성립했다. [본문으로]
  5. 엄밀하게 말한다면, 여영시는 ‘이학’(理學)과 ‘도학’(道學)을 서로 다른 범주로 활용한다. ‘이학’은 주희 이전에 활동했던 사대부의 학술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으로 왕안석의 학술까지 포함한다. 그렇지만 ‘도학’은 왕안석의 학술과 구분되는 ‘성리학’을 지칭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학’은 문철영이 말하는 ‘신유학’과 유사하고, ‘도학’은 ‘주자성리학’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학술을 어떻게 불러야할지는 연구자마다 천차만별이므로 우선 이 글에서는 북송의 사대부부터 주희까지의 학문을 모두 ‘성리학’으로 포괄한다. [본문으로]
  6. 여영시, 이원석 역, 『주희의 역사세계(상)』, 글항아리, 270면. [본문으로]
  7. 민병희, 2009, 「성리학(性理學)과 동아시아 사회 -그 새로운 설명 틀을 찾아서-」, 『사림』 32, 1~34면. [본문으로]
  8.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정도전은 「공양왕에게 올리는 소」[上恭讓王疏]에 이렇게 적었다. “하늘과 사람의 관계란 털끝만큼도 사이가 날 수 없어서 吉凶, 災祥이 각각 類로써 응하는 것입니다.…동중서가 이르기를, ‘천심은 인군을 인애하여 먼저 재이를 내어 譴告하니 이는 공구수성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등용하고 형벌을 내릴 때에 그 친소나 귀천을 따지지 마시고 하나같이 功, 罪의 유무로써 처리하여 각기 공평하고 서로 넘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면 임용이 공정하고 상벌이 바르며 인사가 잘되고 천도가 순응할 것입니다.”(정도전, 『삼봉집』, 「상공양왕소」. 강문식, 2004, 앞의 글, 158면에서 재인용) 이런 논변은 종전의 ‘천인감응론’과 큰 차이가 없다. [본문으로]
  9. 가장 근본적 원인은 물론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를 역사 발전론의 관점에서 보려는 시각에 있다. 그간 한국사 연구자들은 조선이 성리학 국가임을 강조하여 고려와 차별점을 두려고 했다. 그것이 한국사를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사대부가 건국한 조선은 고려와 달리 성리학적 국가 체제를 지향했다. 따라서 조선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역사 발전의 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신흥사대부의 성리학 수용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이런 생각이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익주의 글은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익주, 2004, 「고려말의 정치사회적 혼돈과 신흥사대부의 성장」, 『한국사시민강좌』 35, 24~48면.) [본문으로]
  10. 여영시, 이원석 역, 2015, 앞의 책, 292~317면. [본문으로]
  11. 여영시와 민병희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위에서 성리학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성리학이 송대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적ㆍ사회적 구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두 사람 모두에게 발견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집중하는 구체적인 이슈들은 조금 다르다. 여영시의 사대부들이 활동하는 배경은 지방보다는 주로 중앙 정부의 권력망과 연계된 공간처럼 보인다. 반면, ‘학의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병희가 염두에 두는 사대부들은 주로 지방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들이다. [본문으로]
  12. 민병희, 2009, 앞의 글. [본문으로]
  13. 강문식, 2004, 앞의 글, 144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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