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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by 衍坡 2019. 7. 5.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2019.06.28




<목차>
1. 머리말
2. 문체반정과 정조의 군주권
3. 선행 연구에 묘사된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4. 절대적 군주권의 실상과 ‘마키아벨리즘’ 문제
5. 맺음말



1. 머리말


아마도 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시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탐구된 정조 시대는 그간 ‘개혁의 시대’ 혹은 ‘왕조의 중흥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조 개인의 위상도 그에 걸맞게 변화하여 ‘개혁군주’나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무능하고 나약한 군주의 이미지를 대신했다.[각주:1] 이 재평가는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정치사를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이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조 시대를 향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예를 들어서 정조 시대와 세도정치의 연속성을 파악하는가 하면,[각주:2] 국문학계에서는 정조를 ‘마키아벨리스트’로 재평가하기도 했다.[각주:3] 정조에 관한 근래의 평가는 비록 기존과 상반된 것이지만, 여전히 정조 시대에 관한 연구자의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만큼 정조와 그의 시대에 관한 평가도 연구자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조 시대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졌음에도 그 시대의 역사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정조는 민국 이념으로 무장한 ‘유교적 절대계몽군주’였는가, 아니면 절대적 군주권을 지향한 ‘마키아벨리주의자’였는가. 그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주자학자’였는가, 북학 사상에 무젖은 ‘탈주자학자’였는가. 이런 방식의 문제설정과 질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정작 정조 시대의 정치사가 어떤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전개되었는지, 정조 시대 정치사를 규정하는 고유한 정치 원리가 있었는지는 선뜻 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치행위자로서 정조 개인이나 정조 시대에 관한 기존의 설명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보다는 현대 연구자의 정치적인 로망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국왕의 군주권에 초점을 맞춰 정조 시대의 정치사를 그동안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그동안 정조 시대의 정치사 연구에서는 그의 군주권을 어떻게 규정해왔는가? 기존 연구에서 정조의 군주권을 규정해온 방식에는 달리 생각해볼 여지는 없는가? 국왕을 비롯한 정치행위자의 역학관계를 넘어서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정치 원리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을 고려하면서 정조 대 정치사에 관한 선행 연구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화성능행도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맞아 화성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흥에 들른 장면을 그린 그림(시흥환어행렬도)





2. 문체반정과 정조의 군주권


그동안 정조 시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체반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일반적인 설명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도문일체(道文一體)를 지향했던 정조가 당시 유행하던 ‘명ㆍ청의 괴이한 문체’[明淸詭怪之體]를 일소하고 순정한 고문을 구현하려고 일으킨 사건을 가리킨다. 문체반정 자체는 간단한 사건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그다지 간명하지 않다. 한문학과 한국사 분야의 연구가 이 문제에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한문학과 한국사 연구에서는 각기 정조의 문체반정을 어떤 식으로 읽어 왔을까? 논점이 서로 다른 두 분야의 연구에서 공통으로 전제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정조 시대를 바라보는 현대 연구자들의 기본적인 시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강조하는 한문학 연구들은 문체반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 연구들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에 나타난 문화적 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과 지방의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었고,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지식과 정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담론을 꽃피웠다. 이제 조선 지식인들은 17세기를 풍미했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지식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주자학의 추상적인 담론보다 완물(玩物)로 치부되던 구체적인 사물로 옮겨갔다. 서적이나 진기한 물건을 수집하고 탐구하려는 욕구가 강렬해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각주:4] 적게는 수천 권, 많게는 수만 권의 장서를 모은 장서인은 당대의 ‘수집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각주:5] 이전까지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던 주자학적 지식은 이런 변화 속에서 그 위상이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소품문’(小品文)이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은 그런 지식 지형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문학자들이 보기에 정조의 문체반정은 ‘사상 탄압’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사 연구에서는 문체반정을 붕당 간의 역학관계와 결부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각주:6] 한 연구에 따르면, 남인들은 정조 재위 후반에 추진된 사도세자 추숭 작업을 기회로 삼아 중앙 정치에 복귀하려고 노력했다. 남인의 동향에 위기의식을 느낀 노론은 서학(西學)에 관심을 기울이던 일부 남인을 문제 삼아 정치적 공세를 가했다. 세 붕당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는 정국 구도가 무너질까 염려한 정조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노론의 정치적 공세를 차단했다. 노론 측 소장 관료의 ‘순정하지 못한’ 문장을 문제 삼은 것은 그런 의도에서 벌인 일이었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자신을 ‘교속’(矯俗)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군사(君師)로서의 권위를 과시하는 소득도 얻을 수 있었다.[각주:7] 그렇게 보면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다. 문체반정은 특정한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 일시적 사건에 불과하다.


한문학 분야와 한국사 영역에서 문체반정을 이해하는 시각은 확실히 다르다. 특히 정조의 사상적인 지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양쪽은 극명하게 다른 견해를 드러낸다. 18세기 조선의 새로운 문화에 주목하는 한문학 연구자가 보기에 정조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수호한 ‘보수적 정통주자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각주:8] 문체반정을 사상 탄압으로 간주하는 시각에는 정조가 주자학자라는 전제가 놓여있다. 하지만 문체반정을 단지 단발적인 정치적 사건으로 보면 소품문을 문제 삼는 정조의 태도와 그의 사상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서학을 탐구하는 남인까지 포용하려 한 정조는 “북학에 이미 젖어 들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문학과 한국사 연구의 논점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한문학 연구든 한국사 연구든 정조가 매우 강력한 군주권을 행사했다는 시각을 전제한다. 강명관은 소품문에 담긴 반체제적인 사유가 문체반정을 계기로 단절되었다고 본다. “18세기의 그 다양하고 풍성했던 사유는 이렇게 해서 주저앉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설명에는 정조가 문화적ㆍ사상적 흐름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주권을 휘둘렀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유봉학은 문체반정을 일시적인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하지만,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군사로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유봉학도 정조가 강력한 군주권을 확보했다는 전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체반정을 어떤 관점에서 보든 정조가 강력한 군주권을 확보하고 행사했다는 점은 모두 동의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한 연구에서는 조선이 전제권력과 기반권력 모두 허약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각주:9] 그렇다면 정조가 정말로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했는지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조

▲18세기 후반 돈의문 주변의 풍경. 한문학자들은 이 시기 조선에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3. 선행 연구에 묘사된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정조가 행사한 군주권의 실상을 검토하려면 우선 기존의 정치사 연구에서 그간 정조의 군주권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조 시대의 정치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이태진은 정조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민국이념론은 그런 생각을 잘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탕평군주가 사회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성장한 소민(小民)과 결탁하여 봉건질서와 특권세력을 해소해 나갔다고 한다.[각주:10] 이태진과 달리 오수창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과제가 군주지배체제를 타도하는 데 있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탕평정치의 역사적 의의를 제한적으로 인정한다.[각주:11] 하지만 그 역시 정조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추구하고 행사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탕평정치의 역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더라도, 정조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확보하여 행사했다는 데는 한국사 연구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들은 정조의 군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해 왔는가?


선행 연구에서는 정조가 군사(君師)를 자처하며 정치와 학술을 모두 주도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영역에서 정조는 ‘군신분의’(君臣分義)를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정치 운영의 주도자가 되려고 했다.[각주:12] 그것은 곧 정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의 현실에 관한 위기의식을 드러내며 자신이 직접 국정을 이끌 수밖에 없는 당위를 설명하려 했다. 정조가 보기에 당시 조선의 현실은 마치 큰 병에 걸렸으면서도 어찌할 방법을 모르는 상황과 같았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국왕인 본인이 직접 국정을 주도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국정 목표를 신하들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개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거나 타협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각주:13] 그 점에서 정조는 매우 노련하고 노회한 국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왕 중심의 개혁을 추구했던 정조의 정치관은 국정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신하들에게 자유로운 토론을 독려하거나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려고 노력한 국왕이었다.[각주:14] 실제로 한 신하는 말을 많이 해서 아랫사람들을 번거롭게 하는 정조의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왕이 전교를 내릴 때마다 말을 받아 적는 종이가 가득 찰 뿐 아니라, 급하지 않은 일도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전교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조가 어떤 리더십으로 국정을 운영해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각주:15]


정조가 국왕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6세기에 성립한 조선의 붕당정치는 17세기에 매우 격렬해지면서 현실적 한계를 드러냈다. 조선에는 비록 여러 붕당이 공존했지만, 복수 붕당의 존립 자체가 근본적으로 정당화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붕당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을 때, 그 대립을 조절할 수 있는 논리와 제도가 마련되지도 않았다.[각주:16] 붕당 간의 대립은 자연히 점점 더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정해야 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붕당 간의 대립을 조절하면서 새로운 지배 논리를 창출해야 했다. 국왕을 중심으로 추진한 일련의 개혁들은 자신이 마주한 현실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고민 끝에 정조가 찾아낸 나름의 해법이었다.


정조는 학문적 영역에서도 자신이 신하들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주체가 되려고 애썼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학문을 통해 정치를 하고 학술 담론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영역을 존립시켰던 독특한 정치체”를 구성했던 조선의 지배층에게 정치와 학문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었다. 학문적 역량은 곧 정치적 권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정조가 정치적 권위뿐 아니라 학문적 권위까지 강조했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각주:17]


학문적으로 신하보다 우위에 서려 했던 정조의 태도는 당시 경연의 풍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ㆍ정조 시대 이전까지의 경연에서는 주로 신하들이 학술 담론을 주도하면서 국왕을 가르쳤다. 학문을 활용해 국왕의 권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국왕의 독주를 막으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각주:18] 하지만 정조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정조는 자신의 높은 학문적 수준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압도했다. 1777년 2월에 진행된 야대(夜對)에서 정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무슨 의미냐며 질문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유경이 대답했다. “옛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정조는 이유경에게 면박을 주면서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초학자(初學者)는 이렇게 보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옛 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국왕이 신하를 ‘초학자’라고 면박하는 풍경은 정조 시대 경연의 양상이 그 이전과 달랐음을 보여준다.[각주:19]


정조는 일상에서도 관료와 사족들의 학술 수준을 두고 맹렬한 비난을 쏟아내곤 했다. 권세가의 자제들이 무식하기 짝이 없다며 비웃는가 하면, 세상에서 경학(經學)에 밝은 선비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개탄하기도 했다.[각주:20] 습속이 엉망이 되었다며 걱정을 감추지 않았던 정조는 자신이야말로 교속(矯俗), 즉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어갔다. 이런 견해는 군주 자신의 수양을 우선으로 보는 신하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다. 정조는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군사로서 자신의 역할이 결코 개인적 수양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각주:21] 그가 보기에는 요순(堯舜)도 “팔짱을 끼고 앉아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정치의 한가운데서 정치의 중심을 세우고 신민의 장점과 개성을 살려 그들에게 오복을 베풀어 주는 적극적인 정치가”였다.[각주:22] 그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처한 것도 그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각주:23]



지금까지 선행 연구를 토대로 정조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선행 연구에서는 주로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서 정조의 모습에 주목해 왔다. 그는 군사로서 직접 개혁을 추진하고 신하를 가르치는 정치가였다. 이런 모습에 주목하면 정조는 확실히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정조가 ‘절대군주’였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엄밀히 말한다면 절대적인 군주권을 추구하는 태도와 그 권력을 확보하여 행사하는 행위는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행 연구에서 보여주는 정조는 절대적인 군주권을 추구하는 정치행위자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권력을 신하들에게 관철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만천명월주인옹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새긴 정조의 인장. 주자학의 일인자이자 정치적 권위의 일인자라는 정조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4. 절대적 군주권의 실상과 ‘마키아벨리즘’ 문제


확실히 정조는 자신이 정치와 학술을 모두 주도하는 ‘군사’(君師)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선행 연구에서는 대체로 정조를 “유교적 절대계몽군주”로 평가하거나 “절대적 군주권”을 추구했다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그런 평가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권력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관계 맺는 행위자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을 행사하는 정조와 권력이 관철되는 신하들의 상호 관계를 파악해야만 정조가 행사한 권력의 실체를 분명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선행 연구에서는 대개 정조 본인의 주장에만 주목하여 그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했다고 판단했다.


물론 군신분의를 내세우고 군사를 자처하는 정조의 모습이 흡사 절대군주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사뭇 다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 했던 정조는 신하들의 강력한 비판을 마주해야 했다. 예를 들어서 정조의 측근이었던 김종수는 국왕의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며 신하들을 가르치려 드는 정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각주:24]


“전하께서는 이치를 터득하신 정도가 매우 밝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적중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기만 옳다고 여길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 전하께서는 치우친 기질을 모두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고,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모조리 털어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여러 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 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각주:25]


김종수의 비판에서 “거만하게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여러 신하의 의견을 깔본다”는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군사를 자처한 정조의 입장이 당시 조정에서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학에서 이야기하는 군사는 곧 군도(君道)와 사도(師道)를 모두 갖춘 존재로서 대개는 공자 이전의 성왕들을 지칭한다.[각주:26] 그런 점에서 군사를 자처하는 것은 곧 자신이 성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만하게 자신을 성인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자신이 군사라는 정조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 신하의 의견을 깔본다”는 김종수의 지적은 이미 대간(臺諫)에서도 지적한 적이 있다. 장령 오익환(吳翼煥)은 상소를 올려 정조를 이렇게 비판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시고 익히신 학문이 고명하십니다. 그런데도 아직 도를 통하지 못하시고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하신 것은 진실로 지혜가 사람들보다 뛰어나시어 신하들을 가볍게 대우하는 마음이 있고, 생각이 만기(萬機)에 두루 미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삼간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총명을 믿으면 도리어 자만하게 되고, 정위(情僞)를 지나치게 살피면 억측을 하게 됩니다. 가르칠 수 있는 상대를 신하로 삼기 좋아하시어 기를 꺾고 윽박지르는 위엄이 간혹 간신(諫臣)에게까지 행해지고, 신하들을 싫어하고 박대하시어 업신여기는 뜻이 귀근(貴近)에까지 드러납니다.”[각주:27]


오익환은 신하의 기를 꺾고 그들을 가르치려 드는 정조의 태도를 매우 직접 비판했다. 이것은 정약용이 정조 때의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비판하는 취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약용에 따르면, 규장각의 초계문신은 “이미 과거로 뽑아 벼슬을 제수한” 신하를 “다시 시험 보고 고과하려 하”는 제도였다. “한 번이라도 이 선발을 거친 자는 의기가 움츠러들어서 감히 낯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해서 문득 임금의 사인이 되고 만다.” 정조의 최측근 관료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약용조차도 군사를 자처하는 정조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각주:28] 한 연구에 따르면, 정조의 리더십은 실제로 재위 말기에 들어 한계에 다다랐다고 한다. 정조는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신하들에게 훨씬 강하게 요구했고, 신하들은 그의 태도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침묵으로 대응했다.[각주:29]


군사를 자처하는 정조의 정치적 입장이 신하들에게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그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휘둘렀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여러 정치적 행위자의 반응을 계산한 고도의 정치 게임을 벌여야” 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정조가 채제공이나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국정 현안을 두고 막후에서 협상하고 조율했던 사실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각주:30]


그렇게 보면 문체반정을 추진한 정조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관철했는지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옥(李鈺)처럼 문체반정으로 직접 피해를 본 인물도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몇몇 인물의 사례만으로는 정조가 당시의 문화적 흐름을 조작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군주권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옥과 다른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던 이서구는 “자신의 새로운 문풍에 확신을 가지고 정조의 문체반정 주도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박지원도 반성문을 요구하는 정조에게 “자송문 제출을 거부”했다고 한다. 반성문을 제출한 김조순도 “신문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북학풍과 신문체의 유행을 선도”했다고 한다.[각주:31] 한문학계의 통념과 달리 문체반정을 추진한 정조는 본인의 의도를 충분히 관철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정조가 이서구와 김조순에게 반성문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사건을 마무리한 것은 그들이 관료였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각주:32] 그렇다면 “군주가 특정 신하 개인에 대해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는 있어도 신하라는 집단 전체에 대해서는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지적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각주:33]


정조가 자신의 정치 권력을 신료 집단에 관철할 수 없었다면,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언뜻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그런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 국문학자는 실제로 그 편지에서 애민군주, 도덕군주, 학자군주로 불리던 정조의 또 다른 얼굴을 확인하고 그를 ‘마키아벨리스트’로 규정했다.[각주:34] 그의 평가는 일면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다.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막후교섭 등 다양한 전략과 방법을 구사했다면 그를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정조를 비롯한 당대의 정치행위자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정치 행위를 영위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다. 과연 정조를 비롯한 정치행위자들은 지금처럼 정치적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정치문화에 익숙했을까? 그들의 정치적 행위를 제약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18세기 조선의 특수한 정치문화와 정치의 대원칙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사도세자 추존 문제에 관한 한국사 연구들은 이런 질문을 검토하는 데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사도세자 추존 문제는 그동안 정조 시대 정치사 연구에서 매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들은 어김없이 사도세자 추존을 정조의 왕권 강화와 결부해 왔다. 이른바 ‘갑자년 구상론’은 그런 연구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유봉학에 따르면, 정조는 재위 후반부에 ‘갑자년 구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재위 후반기부터 사도세자를 추존할 계획을 세웠지만, 영조의 임오의리(壬午義理)를 준수해야 했으므로 직접 사도세자를 추존할 수는 없었다. 감수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1804년 갑자년에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후계자의 손을 빌려서 사도세자 추존의 꿈을 이룰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각주:35]



갑자년 구상론은 당시 정치세력의 역학관계를 다방면으로 고려하는 설명이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있다. 만일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정당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추존한다면 국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위를 내려놓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효심(孝心)의 발로라고 보기도 어렵다. 국왕의 통치권을 천명(天命)과 결부하던 유교적 전통에서 통치권을 선양하는 일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정조가 개인적인 효심으로 선양을 계획했더라도 그 자신의 정치적 계획이 뜻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조가 왕위를 내던지는 극단적인 무리수를 두려고 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따라서 ‘갑자년 구상’을 상정하는 설명은 개연성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추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근래의 연구가 ‘갑자년 구상’보다 훨씬 설득력이 높다.[각주:36] 그 연구에 따르면, 정조가 사도세자 추존에 반대한 이유는 단순히 영조에 대한 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세력의 역학관계나 정치적 이익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지 “공공의 대원칙을 사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친을 추숭할 수 없다는 원칙은 왕법(王法)보다도 상위의 가치를 지닌 공법(公法)으로 주장되었다. 즉 권력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져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법을 무너뜨릴 경우 세상의 질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있는 공적 원칙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런 정치문화에서 정치를 하던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존하려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김지영의 연구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정치행위자들이 정치 행위를 영위하면서 의식하던 절대적인 가치[義]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즉, 정치 권력의 강세나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공법(公法)이 정조 시대의 정치행위자에게 강력한 규범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각주:37] 그렇게 보면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를 근거로 정조를 ‘마키아벨리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단지 편지에 담긴 내용 몇 줄만이 아니라 그 편지를 둘러싼 여러 가지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연 정조와 심환지는 자신들의 정치적 교신 활동이 당시 정치의 대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서로 의견을 조율했던 사안들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문제였는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정조가 마키아벨리스트였는가 여부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조

1797년 4월11일,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5. 맺음말


정조 시대에 관한 연구들은 어김없이 정조가 막강한 군주권을 누렸다고 이해한다. 문체반정에 관한 한문학 분야와 한국사 분야의 연구들은 실제로 모두 그런 시각을 전제한다. 물론 그 이유는 각기 다르다. 한문학에서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정조의 ‘사상 탄압’을 비판하기 위해 그의 권력이 얼마나 전제적인지를 강조한다. 그에 비해 한국사에서는 개혁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던 정조의 정치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면서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조선이 전제권력과 기반권력이 모두 허약한 사회였다는 지적을 고려한다면, 정조가 정말로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했는지는 다시 따져볼 문제다.


정조 시대의 정치사를 탐구한 한국사 분야의 연구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탕평정치를 이해한다. 정조의 탕평정치에 적극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는가 하면, 그 역사적 의의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두 연구는 정조가 강력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근거는 대체로 ‘군신분의’를 내세우며 국왕 중심의 국정 운영을 강조하던 정조의 정치적 입장과 ‘군사’를 자처하며 신하를 몸소 계도하려 했던 정조의 학문적 태도였다. 그렇게 묘사된 정조는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절대군주’처럼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볼 점도 있다. 그동안 정조가 절대적 군주권을 행사했다는 판단의 근거는 대개 정조 본인의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는 쪽과 그것이 관철되는 쪽의 관계 속에서 그 권력의 의미와 강도가 규정된다. 따라서 정조가 절대적 군주권을 누렸다면, 그의 권력이 신하들에게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군사를 자처한 정조는 막강한 군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신하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정조의 노력은 신하들의 강력한 비판을 초래했다. 김종수나 정약용 같은 정조의 측근 관료조차 절대적 군주권을 확보하려는 정조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조의 정치적 입장이 신하들에게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그가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과 방법을 구사하며 여러 정치행위자와 정치 게임을 벌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정조가 신하들과 벌인 정치 게임을 강조하며 그를 ‘마키아벨리스트’로 평가하는 견해가 근래에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 평가는 정조를 비롯한 당대의 정치행위자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정치 행위를 영위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다. 오히려 근래의 한 연구에서는 사도세자 추숭 논쟁을 재검토하여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추숭할 의사가 애초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정치적 유불리나 역학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정조가 마지막까지 추숭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공공의 대원칙을 훼손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조 시대에 정치를 행했던 정치행위자들에게 훼손할 수 없는 혹은 훼손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가치’[義]가 여전히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정치행위자들에게 결코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했다면, 단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만을 근거로 그를 단순히 ‘마키아벨리스트’로만 규정하기는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편지에 담긴 몇 줄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편지를 둘러싼 여러 가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정조와 심환지는 자신들의 정치적 교신 활동이 당시 정치의 대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서로 의견을 조율했던 사안들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문제였는가? 이런 정치사적 맥락이야말로 정조 시대 정치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안일 것이다.




* 이 글은 2019년 1학기 '조선시대사 통론'의 기말 보고서로 작성되었음.






  1. 정조의 이미지 변화에 관해서는 김백철, 2011, 「1990년대 한국사회의 ‘정조신드롬’ 대두와 배경」, 『국학연구』 18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2. 이경구, 2016, 「총론 :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 『역사비평』115. [본문으로]
  3. 정병설, 2012,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본문으로]
  4. 정민, 2007,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휴머니스트. [본문으로]
  5. 강명관, 1996, 「조선후기 서적의 수입 유통과 장서가의 출현」, 『민족문학사연구』 9-1. [본문으로]
  6. 물론 모든 한국사 연구자들이 문체반정을 붕당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오수창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예로 들며 이렇게 주장한다. “정조는 순정한 고문체를 구현하기 위한 문체반정을 추진하였지만 자신은 오히려 그러한 정책에 구애되지 않았다. 정조가 지향한 군주의 절대권이 거듭 확인된다.”(오수창, 2012,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역사학보』 213) [본문으로]
  7. 유봉학, 2001, 『정조대왕의 꿈: 개혁과 갈등의 시대』, 신구문화사. [본문으로]
  8. 강명관, 2001, 「문체와 국가장치: 정조의 문체반정을 둘러싼 사건들」, 『문학과 경계』 1-2. [본문으로]
  9. 김영민, 2018, 「국문학 논쟁을 통해서 본 조선 후기의 국가, 사회, 행위자」, 『일본비평』 19. [본문으로]
  10. 이태진에 따르면, 소민과 결탁한 탕평군주가 정치적ㆍ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백성[民]과 임금[國]을 나라의 주체로 보는 ‘민국이념’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의 설명은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났던 절대 군주의 한 모델을 한국사에 대입하여 내재적 발전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군주정이 출현하고 소멸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 국가마다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딱히 주목받지 못했다. 게다가 근래에는 유럽사 연구에서도 절대 군주정의 등장을 봉건질서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의 절대군주가 강력한 왕권으로 봉건 계급을 타도했다거나 시민 세력과 결탁해 봉건질서를 일신했다는 통념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근대화’의 전조로 알려진 절대군주의 ‘위업’은 오히려 다양한 정치세력 간의, 혹은 중앙과 지방 간의 복잡한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영림, 2009, 『루이 14세는 없다』, 푸른역사) [본문으로]
  11. 오수창이 탕평정치의 역사적 의의를 제한적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역사발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이태진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이태진이 탕평군주가 주도하는 정치질서 속에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면, 오수창은 민(民)을 역사발전의 주체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12. 윤정, 2007, 『18세기 국왕의 文治사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67~283면. [본문으로]
  13. 박현모, 2007,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 스타일 비교」, 『오늘의 동양사상』17. [본문으로]
  14. 박현모, 2007, 앞의 글. [본문으로]
  15. 박현모, 2007, 앞의 글. [본문으로]
  16. 오수창, 2012, 앞의 글. [본문으로]
  17. 백민정, 2010, 「정조의 사대부 인식과 정치철학적 입장 연구」, 『한국실학연구』20. [본문으로]
  18. 오수창, 2012, 앞의 글. [본문으로]
  19. 박현모, 2007, 앞의 글. [본문으로]
  20. 백민정,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21. 백민정,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22. 박현모, 2007, 앞의 글. [본문으로]
  23. 이태진, 1993, 「正祖 : 儒學的 계몽 절대군주」, 『한국사시민강좌』 13. [본문으로]
  24. 백민정,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25. 『정조실록』, 정조 13년 11월 17일 [본문으로]
  26. 군도와 사도가 공자 이래로 분리되었다는 생각은 주희가 지은 「중용장구서」에서 알 수 있다. “夫堯舜禹天下之大聖也 而天下相傳 天下之大事也 以天下之大聖 行天下之大事 而其授受之際 丁寧告戒 不過如此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 自是以來 聖聖相承 若成湯文武之爲君 皐陶伊傅周召之爲臣 旣皆以此 而接夫道統之傳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 開來學” [본문으로]
  27. 『정조실록』, 정조 12년 1월 23일. [본문으로]
  28. 백민정,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29. 유봉학, 2001, 앞의 책. [본문으로]
  30. 김영민, 2018, 앞의 글. [본문으로]
  31. 유봉학, 2001, 앞의 책. [본문으로]
  32. 실제로 관료가 아니었던 이옥은 벼슬길 자체가 막힐 정도로 강도 높은 처벌을 받았다. 반면 이서구와 김조순은 별다른 정치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배우성은 이 사실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정조는 문체반정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순정한 고문체’ 사용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대를 책임져야 할 벌열가의 후예들을 대할 때와 중인 검서관의 후예들을 대할 때 문체를 꾸짖는 맥락과 강도가 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배우성, 2015, 『독서와 지식의 풍경』, 돌베개, 16~26면) [본문으로]
  33. Etienne Balazs, 1964, Chinese Civilization and Bureaucracy: Variations on a Theme, Yale University Press(김영민, 2018, 앞의 글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4. 정병설, 2012, 앞의 책. [본문으로]
  35. 유봉학, 2001, 앞의 책. [본문으로]
  36. 김지영, 2013, 「正祖代 思悼世子 追崇 典禮 논쟁의 재검토」, 『한국사연구』 163. [본문으로]
  37. 물론 이때의 의(義)는 국왕과 신하가 당대의 상식으로 받아들이던 내용과 재해석을 요구하는 추상적인 관념을 모두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관념으로서의 의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국왕과 신하가 정치적 경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경쟁이 있었다면 그 자체가 절대적인 규범으로서의 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넘어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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