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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by 衍坡 2019. 5. 28.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2019.05.28




공민왕

▲공민왕 부부 초상화





몽골(원)은 1351년 충정왕을 폐위하고 몽골에 머무르던 왕기(王祺)를 새로 고려의 국왕으로 임명했다. 몽골(원)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이 폐위되거나 즉위하는 사례는 몽골 복속기 내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만큼 공민왕의 즉위 과정 자체가 특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점에도 몽골(원)이 고려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몽골(원)이 공민왕 초반에도 고려의 국정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원)은 아주 손쉽게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에 관철했다. 1354년(공민왕 3) 당시 몽골(원)은 장강 이남에서 봉기한 ‘한적’(漢賊)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었다. 몽골(원)의 승상 톡토(脫脫)는 직접 남쪽으로 원정에 나서면서 고려에 원군을 요구했다. 이때 몽골(원)에 머무르던 채하중(蔡河中)이 고려의 장수로 재상 유탁(柳濯)과 염제신(廉悌臣)을 천거했다. 고려에서는 실제로 유탁과 염제신을 지휘관으로 삼아 원병을 파견했다. 고려는 두 사람을 전장으로 보내기를 원치 않았지만, 몽골(원)의 요구였으므로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몽골(원)은 재상 임면 등 내정 문제에까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했다. 몽골(원)에서 채하중과 이수산(李壽山)에게 관직을 내리도록 요구하자 고려는 두 사람 모두 재상으로 삼았다. 공민왕 초반에 몽골(원)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황은 1356년(공민왕 5) 이후로 크게 달라졌다.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매우 주도면밀하게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가장 먼저 몽골(원)과 결탁해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족과 부원세력을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동시에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지를 회복했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의 패를 모두 회수했다. 일련의 조치들은 매우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이 사건은 공민왕의 뚜렷한 계획 아래 치밀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은 1356년 5월을 기점으로 군국(軍國)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기철을 중심으로 한 부원세력이 제거되면서 몽골(원)의 영향력도 이전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에 대한 몽골(원)의 영향력이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몽골(원)의 통치력이 현저하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몽골(원)의 통치력은 이미 14세기 초부터 약해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정치집단 간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1328년에는 상도파(上都派)와 대도파(大都派)가 각기 황제를 옹립하고 화북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조정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다. 수해와 가뭄은 물론이고 황해(蝗害)와 전염병까지 닥치면서 전국 각지를 떠도는 백성은 날로 늘어났다. 몽골(원) 조정이 민생고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장강 이남에는 여러 반란 세력이 일어났다. 이들은 대체로 1340년대 후반부터 1350년대 초반 사이에 집중적으로 봉기했다. 중원에 대한 통제력조차 거의 상실한 몽골(원)이 이전처럼 고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고려는 1356년 이후에도 몽골(원)과 계속 외교 관계를 맺었다. 길이 막혀서 사신이 왕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양측이 국교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몽골(원)은 더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었다. 그만큼 고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들은 1362년(공민왕 11)에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로 임명했다. 이 사실은 같은 해 12월에 서북면병마사 정찬을 통해 고려 조정에 알려졌다. 고려 측은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듬해 3월에 몽골(원)에 사신으로 갔던 이공수가 공민왕 폐위 결정을 철회하도록 청원했고, 4월에는 백관(百官)과 기로(耆老)가 몽골(원)에 글을 보내 이공수와 똑같은 의견을 올렸다. 그러나 몽골(원)의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덕흥군은 곧 공민왕 폐위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최유(崔濡)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출발했다. 고려 측은 덕흥군의 입국을 저지하는 동시에 군사적 충돌에 대비했다. 결국 최영(崔瑩) 등은 최유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큰 승리를 거두어 몽골(원)의 국왕 폐위 조치를 거부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원)로서는 공민왕을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몽골(원)이 이제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몽골(원) 관계가 공민왕 초반과 확실히 달랐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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