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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by 衍坡 2018. 9. 15.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 최성환, 2016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 『역사비평』 115 )




●總結: 저자는 정조 개인에 대한 평가로 정조 시대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정조 시대를 ‘근대의 전사(前史)’로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경향을 비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문제제기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의 서술이 지나치게 거칠거나 피상적이라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저자가 글 안에 제시한 설명 중 많은 부분이 치밀한 논증을 요한다. 그러나 이 글만 놓고 본다면, 저자의 주장이 글 안에서 충분히 논증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아쉽다.



근래 임오화변에 대한 설명에서 당쟁의 요인을 부각시키는 것이 구태의연한 시각인 것처럼 되었다. 임오화변은 당쟁이 원인이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닌 부자(父子)가 벌인 비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사실 이는 새로운 시각은 아니고, 순조 5년에 집필된 『한중록』에서 유독 강조된 주장을 ‘사도세자 반역설’에 의거해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임오화변은 일회성 해프닝에 불과하게 된다. 게다가 정조대까지 임오화변 문제를 둘러싸고 벌였던 정치적 갈등들은 모두 의미가 없거나, 군주 정조의 부친에 대한 지나친 명예회복 욕심 때문에 벌어진 촌극에 불과하게 된다.(134~135면)


○愚案: 이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임오화변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은 정병설 선생님이 저술한 『권력과 인간』의 기본적인 논점이다. 그 논점이 꼭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정병설 선생님의 논점대로만 보면 임오화변의 특수한 역사적 성격을 포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조는 아버지-국왕이었고, 사도세자는 아들-세자였다. 따라서 임오화변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뿐 아니라 국왕과 세자라는 관계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이 부분은 『권력과 인간』에 관한 오수창 선생님의 서평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이 책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인간적인 결함을 바탕으로 하였을 뿐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직결되지 않은 채 빚어진 것이었다면, 역설적으로 그 사건의 탐구에 크게 정력을 집중시키지 않은 역사학계의 연구 격향에 큰 하자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오수창, 2012, 「문학의 시각에서 확인하는 조선후기 정치사의 기초: 정병설, 『권력과 인간: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민족문학사연구』 48)



조선 후기에서도 당쟁이 극성하였던 숙종과 영조와 정조 시대에 조선은 국왕이 환국 혹은 조제ㆍ보합의 방식으로 이들 당파를 관리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 당쟁의 폐단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당시의 군주들은 이들을 적절히 관리할 능력이 있었다. (…) 정조는 정국 운용의 방향에 따라 이들을 안배하며 적절히 등용하거나 물러나게 하였다. 말 그대로 황극(皇極)=군극(君極)의 작동방식이었다. 따라서 정조의 탕평책은 여러 붕당들과 공존할 수 있었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작동되었던 조선 후기 특유의 붕당정치 질서도 존중되었다. 그러나 세도정치 시기에는 도리어 붕당의 활동이 지극히 위축되었다. 벽파는 정순왕후의 권위를 빌어 시파 가운데 사도세자 추숭에 동조하였던 노론ㆍ소론ㆍ남인 세력을 제거 혹은 축출하였다. 그야말로 황극의 붕괴 상황이었고, 정치는 실종되었다.(138~139면)


○愚案: 이 대목에 관해 동의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일단 조선 후기에 붕당 정치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작동’되었다는 서술이 마음에 걸린다. 저자의 서술을 사실로 전제하면 18세기에 탕평정치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영조가 “붕당의 소멸”[破朋黨]을 재삼 강조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저자의 서술은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이유로 저자의 서술에 동의하기 조심스럽다. 이 글이 속한 기획은 19세기를 정조 시대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논점은 이미 정조 대의 정치와 세도정치기의 정치를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글 안에서는 ‘황극의 붕괴 상황’과 ‘정치 실종’이 정조 대 정치의 흐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저자의 설명은 정조 시대와 그 이후의 변화를 단지 ‘국왕의 역량’에서만 찾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서술은 복잡다단한 18~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한편으로 그런 논점은 자칫 뚜렷한 근거 없이 왕권 강화를 긍정하던 기존의 서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본다.



세도가들 역시 군주제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그것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황극은 존재하였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고종이 정조를 이상적 모델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 후기의 군주제 전통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고종의 등장으로 다시 개화 세력이 ‘개화당’을 형성하여 활약하였고, 이에 맞서는 ‘사대당’이 등장하여 개화의 방향과 속도를 제어하였다. 여기에서 파생된 친청파ㆍ친일파ㆍ친러파ㆍ친미파 등의 붕당들 역시 고종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경쟁하였다. 개화정책을 척사(斥邪)의 차원에서 거부하던 유림(儒林) 역시 재래의 당론을 견지하던 세력이었다. 조선의 군주제는 개항 이후의 급변기에도 여전히 신하들의 다양한 붕당을 매개로 작동하였던 것이다.(140면)


○愚案: 이 대목은 서술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고종이 정조를 이상적 모델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 후기의 군주제 전통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이 문장이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저자는 정조 이후 정치사에서 정조가 지니는 독특한 위상을 고려하여 이런 글을 썼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만일 그렇다면 정조 이후의 국왕들에게, 특히 고종에게 정조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논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고종은 자신이 마주한 정치적ㆍ역사적 조건에서 정조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국정운영에 활용하였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별도로 논증이 필요하다. 한편, 저자가 ‘붕당’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하는 데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정의하는 ‘붕당’은 16세기 이래 조선 정치사에 나타났던 특수한 정치세력이다. 반면, 저자는 ‘붕당’을 단순히 ‘정당’의 동의어로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만일 그렇게 보면 붕당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개념어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조가 각종 개혁사업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지향은 평등과 균분을 내용으로 하는 대동의 이상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의 현실에서 도출된 지극히 현실적인 개혁이었다. (…) 실제로 정조는 공노비 혁파나 서얼 허통 확대 등 신분제 완화 정책을 취하였지만, 신분제 자체를 철폐하려는 문제의식은 없었다. 정조는 더욱 심해지는 경향분기(京鄕分岐) 추세를 완화하여 경화벌열을 견제하고자 지방의 사대부를 교목세신(喬木世臣)으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정조에게는 실력있는 사대부가 정치의 파트너였지, 중인 이하 일반백성들은 여전히 애민(愛民)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愚案: 이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지금껏 대중매체에 그려진 정조는 기존의 봉건체제를 완전히 넘어서려 했던 군주, 혹은 근대를 향한 개혁을 선두했던 군주로 그려졌다. 단적인 사례가 바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이덕일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 식민지 경험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정조의 이미지일 뿐이다. 정조는 자신이 마주한 역사적ㆍ시대적 현실 속에서 개혁의 내용과 방향을 구상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탕평의 세계를 일군만민(一君萬民)의 대동사회 지향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일군만민론은 메이지유신 무렵 현존의 태양신으로 격상된 천황을 빙자하여 유신의 주체인 군부(軍府)로 권력을 귀일시켜 근대 군국(軍國)을 건설하였던 일본식 전통에서 형성된 이념이다. 만천명월주인으로 상징되는 탕평군주상은 외형상 일군만민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만천명월주인은 ‘리일분수론’의 변형으로서 군주로부터 신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리’를 기준으로 유학적 이상을 추구한 데 비하여, 일군만민론은 막부 휘하의 신료층을 배제하는 천황권의 절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대부의 공론을 중시하였던 군신공치(君臣共治) 전통을 배경으로 탄생한 조선 후기 탕평정치의 군신관계와 그 정책들은 군국주의 일본 근대의 천황제를 형상화한 일군만민의 개념이나 공상적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로 재해석된 대동사회의 이념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144~145면)


○愚案: 정조가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을 ‘일군만민(一君萬民)의 대동사회’로 설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탕평정치가 “사대부의 공론을 중시하였던 군신공치(君臣共治) 전통을 배경으로 탄생”했는지는 별도의 논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붕당 간의 갈등이 스스로 조정ㆍ해결되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붕당정치가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탕평정치가 군신공치의 전통에서 등장했다는 주장은 그런 기존 연구와 배치되는 내용이므로 별도의 근거와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글 안에서 별도의 논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조의 탕평정치가 붕당정치 질서의 부정이라는 인식의 연장선에서역사학계에는 정조를 반(反)주자학자, 즉 주자학적 의리론을 부정한 군주로 설명하는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 그러나 정조는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이며, 공적(公的) 의리를 확립해야만 탕평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의리탕평론자이다. 이때의 의리는 군주와 신하의 공치(共治)를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주자학에서 강조했던 그 의리였음은 두말할 것 없다. 주자학자인 정조가 탕평정치를 통하여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 증명하듯, 주자학 역시 개혁론의 준거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주자학에 기반하고 있었듯, 실학이 반(反)주자학은 아니었다.(145면)


○愚案: 정조가 반(反)주자학자가 아니었다는 설명은 경청할 만하다. 다만 주자학과 반주자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정조의 개혁과 사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자못 피상적인 접근이 아닌가 한다. 정조가 ‘정학’(正學)으로서 주자학의 위상을 인정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주자학-반주자학의 구도 안에서 ‘정조는 주자학자였다’고 규정하는 데 머물면 정조가 조선 후기 사상사의 큰 흐름 속에서, 또 정조 시대 사상적인 지형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중요한 건 18세기 후반 조선 국왕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정조가 주자학을 어떻게 검토하고 수용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이 아닐까. 아울러 정조가 자신의 조건에서 해석해낸 주자학이 사대부나 관료들이 주자학을 바라보는 시선과 어떻게 달랐는지, 그 차이가 국왕과 사대부(혹은 관료)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를 빚어냈는지, 그 긴장이 18세기 정치ㆍ사상적 지형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히는 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정치의 역할이 다시 주목되는 시대이다. 정치는 정치에 참여하는 다양한 정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관리하고 공적 운영의 체제를 조직하는 국정 운영체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순전한 개인이 아니다. 정치사는 개인사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혁명은 특정 시기의 정치체제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을 때 새로운 판을 짜는 사회적 행위이다. 정치와 혁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정치체제는 근대적 국민혁명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구축되었다. 새로운 정치체제가 정착된 이상, 혁명의 경험보다는 정치의 경험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는 개인이나 사회혁명과 같은 비(非)정치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다.(149면)


○愚案: “정치와 혁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서술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정의하는 정치는 “정치에 참여하는 다양한 정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관리하고 공적 운영의 체제를 조직하는 국정 운영체계에 관한 것”이다. 국왕의 갈등 조정을 강조한 본문의 내용을 고려하면, 저자는 정치의 핵심을 ‘갈등의 조정’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혁명은 현재의 정치적 체제 안에서 갈등이 조정되지 못해 나타나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치’의 의미와 범주를 지나치게 좁게 규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정치의 핵심을 ‘갈등의 조정’이라는 좁은 의미로 규정한다면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글 안에는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집권적 봉건군주체제인 조선 후기의 사회·정치적 갈등은 천민(天民)을 대변한다는 국왕에 의하여 조정되고, 근대적 공화제 혹은 의회제인 현대의 그것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대통령 혹은 총리에 의해서 조정된다. 갈등 조정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국왕이든 대통령이든 총리든, 최고의 권력자가 해당 시기의 정치 참여층과 더불어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정치의 본질까지 다르지는 않다. 정치를 경제·사회·개인·혁명과 같은 비정치로 환원하려는 시각이야말로 정치의 영역·역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가 아니면 개인의 수양 문제로 귀결된다. 무릇 제대로 된 정치를 꿈꾼다면 정치의 경험을 제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조의 탕평정치를 온전히 설명하는 과제는 현재 우리의 정치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과제와도 닿아 있다.(150면)


○愚案: 이 부분에 관한 한 저자의 논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 대목의 서술은 설득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이미 정치를 ‘다양한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그 정의에 비추어보면, 정치는 각 정치세력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만이 행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왕이든 대통령이든 총리든, 최고의 권력자가 해당 시기의 정치 참여층과 더불어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저자의 서술은 그 자신의 논리에 충실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논점은 전제정치나 독재정치에서나 통용될 법한 발상이다. 저자는 이미 정조를 ‘일군만민’(一君萬民)의 계몽절대군주로 묘사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그러나 정치의 성패를 국왕의 권력 혹은 국왕 개인의 정치적 역량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점은 『영원한 제국』에 담긴 이인화의 논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편, 저자가 현재의 정치를 정조 시대의 정치와 연결 짓는 방식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정조가 통치하던 조선과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사회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국가ㆍ사회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의 기반은 ‘사회계약설’이고, 그 사회계약설은 저자가 ‘비정치의 영역’이라고 규정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한다. 개개인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국가ㆍ사회를 구성하는데 ‘동의’했고, 국가는 그 동의를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리학의 토대에서 구축된 조선의 정치질서와 민주주의 이념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의 정치질서는 근본부터 완전히 다르다. 그런 차이를 부정하고 두 시대의 정치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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