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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by 衍坡 2019. 7. 1.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 ‘종법’과 ‘가부장제’의 개념 문제에 관한 검토 -


2019.06.28

1. 조선의 가족질서 변화를 보는 시선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가족질서는 17세기를 기준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본다. 고려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15~16세기에 양측적 친속체계가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종법 질서가 확산하면서 부계 친족 중심의 가족질서가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를 기점으로 가족질서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많다.[각주:1]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이 출생 순서대로 족보에 기재했다. 친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족보에 싣기도 했다. 재산 상속이나 제사 문제에서도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았고, 혼인 형태도 남성이 여성에게 장가를 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17세기를 거치며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종법 질서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딸보다 아들을 더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외손이 족보에서 배제되었다. 재산 상속과 제사 역시 오롯이 장자(長子)의 몫이 되었다. 혼인의 형태도 여성이 남성의 집으로 시집을 가는 친영례(親迎禮)로 변화했고,[각주:2] 여성에게는 수절이 강요되었다. 그렇게 보면 17세기 이전과 이후의 가족질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 곧바로 부계 중심의 친족질서가 성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7세기에도 여전히 이전 시기의 양측적 친속체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한다.[각주:3] 물론 한편으로는 ‘가부장제’를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송시열은 늦은 나이에 시집을 가는 딸에게 “딸 같은 며느리”가 되기를 요구했다. 딸에게 친정 대신 시가(媤家)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기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부장제’를 정착시키려는 송시열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송시열 본인조차 친족의 범위를 부계 혈통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송시열은 자기 가문의 송씨 여성들과 같은 가문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그는 외가 사람들이나 사위, 외손과도 물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 사회가 완전히 부계 중심 사회로 변화하기 이전의 과도기적 현상이었다고 한다.


앞선 연구들은 조선의 일반적인 가족질서가 17세기를 전후하여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거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유용한 연구다. 하지만 두 연구에서 ‘종법’과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동의어로 이해하거나 유사한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남희가 17세기 가족질서의 변화를 “종법(宗法) 의식이 강화”한 결과로 본다면, 하여주는 “가부장적 가의식”이 강해진 결과로 본다. 같은 현상을 각기 ‘종법’과 ‘가부장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은 이 두 개념에 관한 정의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종법’과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혼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주자가례』에 실린 대종소종도(大宗小宗圖)


2. 주자 종법에 담긴 함의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확대된 17세기의 종법 질서는 주자가 제시한 종법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여 적용한 것이었다.[각주:4] 하여주는 당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던 종법 질서의 본질을 ‘가부장제’로 이해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종법 질서를 가부장제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두 개념을 동일시하면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종법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충분히 고려하기 어렵다.

물론 조선에서 시행된 종법이 부계 친족이 결속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던 점은 분명하다. 종법적 가족질서는 부계 친족 우위의 가족질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의 가족질서와 유사한 점도 있었다.[각주:5] 조선 후기에 그런 가족질서가 성립한 배경에는 물론 이념과 가치의 문제 못지 않게 현실적인 요인도 있었다. 즉, 사족의 재산과 사회적 위신이 부계 친족 중심의 가족질서를 창출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다. 양반가는 자신들의 재산이 점차 영세해지고 향촌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드는 상황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했다. 양반들은 효율적인 자원 배분과 현실적 위기에 관한 전략적 대응을 위해서라도 종자(宗子)를 중심으로 결속할 필요가 있었다.[각주:6] 하지만 현실적인 요인들은 종법이 어떻게 사회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는 있지만, 조선의 사대부가 왜 굳이 종법을 추구했는지는 답하지 못한다.

조선의 사대부가 종법을 추구한 근본적인 이유는 주자학적 종법에 담긴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주희(朱熹)가 추구했던 이상사회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여 체계적으로 구성된 사회 조직 안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천리(天理)의 실현을 지향하는 사회였다. 주희가 보기에 그런 이상사회를 실현하려면 천리를 추구하는 개인과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천하(天下)를 연결할 매개물이 필요했고, ‘가’(家)라고 불리는 조직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눈여겨볼 점은 주희가 생각한 ‘가’가 근대적인 가족과 달리 완전히 사(私)의 영역에 속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차등한 사랑을 인정하는 유가(儒家)의 관점에서 보면, 혈연 집단인 ‘가’가 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희는 ‘가’ 내부에서 나타나는 사랑[仁]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가천하’(家天下)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가’는 공(公)의 영역에 속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했고, 주희는 종자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각주:7] 그렇게 보면 종법은 단순히 부계 친족을 결속하는 차원을 넘어서 ‘가천하’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기도 했다.

조선의 사대부 역시 주희가 지향했던 가천하의 원리를 조선 사회에 구현하고 싶어 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한다면 조선에 구현된 주자학적 종법 질서가 주자의 구상을 온전히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이 균분상속을 철폐하고 종자 우대 상속을 확립한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주희가 구상했던 종법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사대부는 “종자를 중심으로 한 ‘가’의 확립, 그리고 그 ‘가’를 통해 이룩할 ‘평천하’를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각주:8] 만일 종법을 단순히 가부장제와 동일시한다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다. 조선 사회의 종법이 당대의 역사적인 맥락을 반영하는 개념인 데 반해, 가부장제는 그런 역사적인 맥락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묘

▲『주자가례』에 실린 가묘 배치도



3. 가부장제 개념 사용의 문제점

조선 후기의 가족질서를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파악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조선 시대인들이 지향했던 가족질서의 사상적ㆍ역사적 함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물론 ‘유교가부장제’라는 개념을 구사하면 조선이 유교 국가였음을 좀 더 부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교가부장제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일단 유교가부장제라는 개념은 가부장제의 원인을 유교의 본질적 속성으로 파악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여성주의자들이 유교가족이념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전형적인 가부장제로 간주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라는 범주 안에도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존재했다. '유교'라는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사유의 흐름은 유가의 경전을 후대의 역사행위자들이 나름대로 전유(appropriation)한 결과물이다. 그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유교를 단일하고 고정적인 실체를 가진 개념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유교가부장제론은 유교를 하나의 고정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 더구나 ‘가부장제’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현상은 비유교권 국가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므로 유교적 가족제도를 “전형적인 가부장제”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점도 있다. 유교가부장제론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시대의 가족질서와 20세기의 근대적 가족질서를 모두 ‘유교적인 가족제도’라는 틀로 동일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설령 20세기의 가족질서에서 여전히 ‘충효’(忠孝) 등 유교적 덕목이 강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국가와 근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재해석된 개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근대적인 가족제도를 처음 확립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들은 19세기 말에 메이지 민법(民法)을 제정하고 근대적인 호적제도를 시행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근대적인 가족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 가족에 걸맞는 새로운 가족윤리를 모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충효(忠孝)로 표현되는 유교 윤리가 ‘가족국가주의’라는 맥락에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유교의 도덕 담론은 애국심과 결부되고, 애국심의 연원으로 가부장에 대한 절대복종을 이끌어내며 충효라는 덕목에 기반한 가족국가주의가 자리를 잡아나가게 된 것이다.” 국가주의와 결부되어 재해석된 유교적 가족윤리는 20세기 동아시의 유교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각주:9] 그렇게 보면 유교를 가부장제와 연결하는 인식은 철저히 20세기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유교가 긴밀하게 결합한 20세기의 역사적인 맥락은 분명히 조선 후기의 현실과 다르다. 19세기 말에 성립한 근대적인 가족제도는 엄연히 사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근대 가족의 가부장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집단의 장(長)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 배경에는 국가와 가를 각기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해낸 근대적인 사회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가’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순히 사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국가가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하나의 공적 영역이었다. 양자 사이의 유사한 측면은 부계 혈연이 중요시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시대의 가족질서를 모두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적’이라는 표현으로 호명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이전과 이후의 가족질서를 모두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시선에서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가족질서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글은 2019년 1학기 '조선시대사 통론'의 중간 보고서로 작성되었음.

  1. 이남희, 2011, 「조선 사회의 유교화와 여성의 위상 –15ㆍ16세기 족보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48. [본문으로]
  2.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 후기에도 완전한 친영례(親迎禮)가 정착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에 정착한 혼례는 반친영(半親迎)이다. 이 예법에 따르면,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치르되 혼인한 지 3일째 되는 날 신랑의 집으로 돌아가 폐백을 행했다고 한다. (이남희, 2011, 앞의 글) 이런 사실은 비록 부계 친족 중심의 가족질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당대의 관습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3. 하여주, 2011, 「17세기 송시열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정착을 위한 노력과 좌절」, 『조선시대사학보』 79. [본문으로]
  4. 종법은 기본적으로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가족질서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로 특정해서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다. 종법은 본래 주나라 때 봉건 제후의 방계 친족을 결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제였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그 제도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송대의 주희는 어떻게 주나라의 종법을 재현할 수 있었을까? 엄밀히 말한다면 주희가 제시한 종법은 주나라의 종법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마주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재구성해낸 결과물이다. (이승연, 2011, 「조선에 있어서 주자 종법 사상의 계승과 변용」, 『국학연구』 19) [본문으로]
  5. 조선이 남성 중심의 사회이기는 했지만, 과연 ‘가부장제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따져볼 문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부계 혈통이 한 개인의 사회적 소속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다. 조선에서도 그런 면모가 매우 두드러지지만, 모계 혈통 역시 중요하게 고려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 사회에서 서얼에게 가해진 차별은 그런 현실을 잘 드러낸다.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서자 혹은 얼자로 규정되어 차별을 받았던 사례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호적에서 개인의 4조(四祖)를 파악하면서 외조부를 기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권내현, 2018, 「17~19세기 조선의 재산 상속 관행」, 『한국사학보』 70. [본문으로]
  7. 이승연, 2003, 「종법과 공사론」, 『동양사회사상』 7. [본문으로]
  8. 이승연, 2011, 앞의 글. [본문으로]
  9. 김미영, 2014, 「유교가족이념에 나타난 여성존재의 이중성」, 『철학연구』 1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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