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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비망록

비망록 15: 이화동

by 衍坡 2024. 1. 31.

 

 

 

오늘 밤에는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질 않는다. 여태 잠들지 못해서 괴롭다.

1. 읽은 사료를 정리하던 한글 파일을 열었더니 마지막으로 사료를 읽은 날짜가 작년 5월 말로 표기되어 있다.  새삼스럽지만 시간이 참 빠른 것 같다. 그동안 빈둥거린 것도 아니고 잠이라도 실컷 잔 것도 아닌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 걸까? 글을 쓰려고 해도 아무 생각이 없어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니 부끄럽다. 내가 일과 본업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이런저런 일을 부여잡고서 넋놓고 있는 내게 본업을 놓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들에게 참 감사하다. 이제 정신 좀 차려야지.

2. 요즘 자꾸 해야 할 일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도대체 내가 왜 일을 자꾸 미루게 되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았는데, 내게 완벽주의적인 강박이 분명히 있다. 얼마전에 지인으로부터 들으니 내가 "그런 식으로 일 할 거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듣고 보니 자주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여하튼, 선택지가 일을 제대로 하거나 시작을 말거나 두 가지 밖에 없는 건 좀 극단적인 것 같다. 이런 나의 강박을 잘 조절해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3. 내게는 '성취'도 중요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진정성 있는 관계들을 맺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비록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관계 맺는 폭도 좁은 편이지만, 한 번 마음을 준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편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금방 아물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건 그런 내 성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해관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끊는 일은 내게 잘 맞지 않는다.

4. 학술을 가지고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사회구조' 같이 추상적인 대상을 때리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눈앞에 마주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망 안에서 내가 어떻게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건 훨씬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하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누군들 못하겠나? 꿈결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말들에 은근하게 묻어있는 계몽주의적인 로망들도 불편하다.

5. 사람은 누구나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그런 내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추구하는 인간상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데서 불편한 마음들이 쉼없이 생겨난다. 매일매일 나의 말과 행동을 곱씹으면서 불편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6. 어쩌다보니 지나간 시간들도 생각난다. 슬픔과 분노가 삶의 동력이던 시절은 이제 내 삶에서 완전히 지나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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