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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비망록

비망록 14: 하루

by 衍坡 2023. 12. 29.

 

 
 
1. 어느새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올해에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참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각난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도 소소한 것들에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 다만 내 일상을 돌아보고 성찰할 여유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 게을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삶과 마음을 잘 가꾸어나가고 싶다. 내게 그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2. 나는 내가 엄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너무 게으르고 산만하고 느슨한 사람이다. 그런 내 모습이 항상 불만족스럽다. 더 부지런했으면 좋겠고, 더 질서정연하고 정돈된 일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좀 더 꼼꼼하고 완벽한 사람이고 싶다. 그런 내 스스로의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해서 아쉽다. 그런데 요즘 자꾸 주변 사람들이 내게 엄격한 사람이라고, 자기 기준이 높다고, 일상에 무슨 당위적인 기준이 그렇게 많으냐고 타박한다. 여전히 오기를 부리며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3. 이번 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고, 무사하게 한 학기를 마쳤다. 대개 첫 학기 강의를 하면 정신없고 힘들다고들 하는데 내게는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평소에 내가 하던 고민들을 강의에서 충분히 다 전달할 수 있었다. 강의를 통해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소통'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는 현재와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조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과거인의 삶을 당대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나'와 함께 살아가지만 완전하게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지닌 이웃과 소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감정을 배설해내기 바쁜 세상에서 역사학은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고민들을 학생들과 나누어보고 싶었다. 그런 내게 마음을 내어주고 내 고민에 귀기울여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마 이번 학기 강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4. 성적 처리가 꽤나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내 수강생들은 분명히 저마다의 처지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는데, 그들의 노력이 그깟 알파벳 몇 개로 규정되는 게 참 서글프다. 더구나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했던 학생들이 운 나쁘게 기말고사를 망친 걸 보면 정말 속상했다. 기말고사 답안지를 채점하는 동안 펜을 몇 번이나 내려놓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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