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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뇌뢰낙락서」를 통해 본 이덕무의 역사인식

by 衍坡 2023. 1. 13.

뇌뢰낙락서를 통해 본 이덕무의 역사인식

(2020, 역사를 바라보는 실학자의 시선 , 경인문화사)

 

2022.10.17

 
역사를 바라보는 실학자의 시선(양장본 Hardcover)
역사는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와도 이어진다. 〈역사를 바라보는 실학자의 시선〉은 10명의 저자들이 중국의 것이나 과거 고대에서 주로 영광을 찾던 시대에 과학, 지리, 언어, 예술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우리의 문화’를 이루어냈던 실학자들의 정신을 통해 그들이 과연 역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다루었다.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이익을 통하여 실학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현실주의적 관점이다. “천하의 일은 시세時勢가 최상이고, 행?불행이 다음이요, 옳고?그름은 최하이다.” 〈성호사설〉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의 글에서 성호가 한 말이다. 그는 역사의 주요한 결정요인으로 시세와 우연을 말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도덕성의 결정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좋은 계책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졸렬한 계획도 우연히 들어맞게 된 것이 있으며, 선한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가운데도 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 년 후에 어떻게 시비의 진상을 알 수 있겠는가?” 성호가 보기에, 역사는 성패가 결정된 후에 만들어지므로 결과에 따라 꾸며지기 쉬었다. 그래서 진실을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읽는 이에게는 사료의 한계나 도덕론의 선입견을 넘어서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고, 오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에게는 도덕성이나 명분만을 강조하는 것이 자칫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을 마비시켜 현실의 대응을 소홀이 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둘째, 객관적?주체적 관점이다. 성호는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송?명의 정통론에 대해, 금?원의 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문화적 화이론을 탈피했으며, 일본의 존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에게 우리 역사의 연구를 권장했다. 화이 분별의 명분론 내지 이념에 빠져 강약의 형세는 돌보지 않고, 내실을 꾀할 생각은 안하면서 대외강경론만 일삼는 무책임한 작태에 대해 성호는 비판했던 것이다. 셋째, 변화에 적극적인 관점이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다. 그런데 그는 서양 과학기술을 높이 평가했으며, 기술은 점차 발전한다는 관점을 가졌다. 기술에 관한 이런 관점은 변화의 폭발성이 있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개방성을 띠게 하고, 상고주의尙古主義를 벗어날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성호의 관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호학파 내에서도 서학에 대해 스펙트럼이 다양했듯이, 실학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획일적일 수 없다. 다양한 지점에서의 구체적 연구가 필요한 때에 본서가 학계는 물론 실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저자
조성을, 박인호, 김문식
출판
경인문화사
출판일
2020.11.01

1. 머리말

이덕무의 정체성

  •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 이른바 연암그룹의 일원으로 북학파 문인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덕무를 북학파 문인 학자로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 이덕무는 (…) 1763년(영조 39) 계미사행에 종사한 원중거(元重擧)와 성대중(成大中)에게 전해들은 지식 정보를 수용하여 「청령국지(蜻蛉國志)」를, 그리고 1778년(정조 2) 연행 뒤 「입연기(入燕記)」를 저술하였다. (…) 이를 제외하면 이덕무의 북학파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상당 부분 소거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의 고민도 깊어진다. (손혜리 2020, 271~272)

 

연구 목적

  • 필자 역시 그[이덕무-발제자]의 글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사실의 규명과 전달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이덕무의 세계관과 역사관의 또 다른 일면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 그의 저술 중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를 주목. (손혜리 2020, 272)
  • 「뇌뢰낙락서」는 (…) 뇌뢰낙락한 인물의 훌륭한 사적을 기록하여 역사에 길이 전함으로써 고평하려는 것이다. 이때의 ‘뇌뢰낙락한 훌륭한 인물의 사적’이란 명말 청초 시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킨 사람의 행적을 말한다. (…) 이덕무의 명청 교체와 명 유민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손혜리 2020, 272)
  • 이덕무는 분명한 목적 아래 대거 자료를 수집하여 「뇌뢰낙락서」를 편찬하였으나 생전에 미처 산정하지 못하였다. (…) 이는 달리 생각하면 번잡한 것을 잘라내고 체재를 마련하지 않은 원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덕무의 처음 기획 의도를 파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손혜리 2020, 273)

 

2. 명청 교체와 명 유민에 대한 기록

 

뇌뢰낙락서의 저술 배경

  • 「뇌뢰낙락서」 는 이덕무가 연행 길에 오랑캐가 되어버린 중국을 목도하고 탄식하여 명에 관한 일사와 비승을 수집하고 돌아와 지은 명 말의 유민전으로, 미처 편집을 끝내지 못한 미완성 유고이다.
  • 윤행임, [李懋官墓碣銘-幷序]: 甞入燕見中州爲戎。飮酒悲歌。蒐購逸史秘乘歸。著明季遺民傳。命曰磊磊落落書。
  • 이서구, [李懋官墓誌銘]: 取曲禮小學遺意。著士小節三卷。以律其身。最習明季事。嘗寄余書曰。我明民也。結交隆曆啓禎間名臣處士。視世之眼前媕娿。背後睢盱。豈不賢哉。遂採甲申後遺民。著磊磊落落書七卷。以托其意。觀此二書。可以知懋官也。

뇌뢰낙락서평가

  •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사소절』과 「뇌뢰낙락서」가 세상에 도움되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서구의 발언과 비슷한데, 특히 「뇌뢰낙락서」의 경세서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
  •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은 (…)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을 읽고 자료적 가치를 고평한 바 있다. 「황명유민전」을 읽고 나서 이덕무의 「뇌뢰낙락서」를 널리 구한 것으로 보인다.
  • 「황명유민전」이 「뇌뢰낙락서」와 유사성 혹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에서 서술된 것. “「황명유민전」은 순서가 약간 바뀌고 공자의 후손 공지수에 관한 사적이 추가되었을 뿐, 「뇌뢰낙락서]와 일치”라는 286쪽의 서술을 참조.
  •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 집에 등사해 둔 「뇌뢰낙락서」가 있으며, 체재가 번잡하고 소략한 곳이 많으나 명나라 말 유민에 관한 자료로는 참고할 만하다는 내용이다.
  • 이규경의 글[에서] (…) 『명사(明史)』에 명나라 말 유민에 대한 기록이 없어 충신열사들의 사직이 전하지 않게 된 작금의 상황을 통탄하여, 이덕무가 「뇌뢰낙락서」를 편찬하게 된 속내를 파악할 수 있다. / [二十三代史及東國正史辨證說]: “大抵《皇明史》。非出一手。故雖朱、毛之博。亦未免紕謬之譏。且於崇禎革世之際。事多微婉 失實。時世當然。且不立遺民一傳。忠魂毅魄。泯沒無傳。故中原人有《排悶錄》等書。可見其志也。我王考靑莊館先生。爲之慨然有《磊磊落落書》。”

뇌뢰낙락서의 체재와 수록 인물 유형

  • 「뇌뢰낙락서」는 (…) 권1~10은 이덕무가 기록한 것이고, 보편 상하는 이광규가 부친의 사후 추가로 편입한 것이다. 「뇌뢰낙락서」에 기록된 인물은 720명이다.
  • 「뇌뢰낙락서」는 (…)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부터 시작되니 이덕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짐작할 수 있다.
  • [「뇌뢰낙락서」 권1과 권2에 수록된 인물 중 인적사항과 행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인물 외에] 남은 인물 중에는 유독 승려가 많은데, 명 말의 혼란한 시국에 머리를 깎고 절이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뇌뢰낙락서」에 인용된 서목
  • 「뇌뢰낙락서」의 인용 서목은 176종이며 저자는 142명이다.
  • 저자에 의하면, 2종 이상의 서목이 인용된 인물은 왕사진, 주이존, 덕잠, 전겸익, 모기령 등이다.
  • 이덕무가 명나라 말 유민을 취재할 때 전겸익의 『열조시집』과 『유학집』 및 모기령의 『서하집』과 『시화』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을 통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견결하게 지킨 인물을 취재하는 데 치력하여 역사에 길이 전하고자 한 의식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3. 대청인식과 변화의 추이

뇌뢰낙락서저술 동인: 대명의리

  • [이덕무는] 조선에 표류해 온 한족 출신 중국인을 직접 찾아가 학적 역량을 시험하고, 치발좌임(薙髮左衽)이라는 그들의 머리와 복식을 확인한 뒤 천하가 모두 오랑캐라 조선만이 예의를 숭상하니 조선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 명나라가 망한 후 조선이 명나라를 계승하여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였다는 의미이다.
  • [이덕무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견결하게 지킨 고염무를 고평하고 훼절한 모기령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 이덕무와 성해응이 고염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각각 「뇌뢰낙락서」와 「황명유민전」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고염무의 충절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다.
  • 이덕무는 태학을 방문한 뒤 시를 지었다. (…) “공자를 겉으로만 높인 지 오래되었으니, 태학엔 온통 풀이 우거졌구나. 만주 글씨로 현판을 붙였고, 원나라 비석이 뜰 앞에 우뚝 섰네[夫子陽尊久, 黌宮遍綠蕪. 滿書輝殿額, 元碣屹庭隅.]” 황폐해진 태학을 목도하고 비탄에 잠겨 지은 시이다. (…) 「입연기(入燕記)」 5월 22일자 기록에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 이덕무, [入燕記下] ○往東安門。謁太學。太學在北城內。有皇帝勑修文廟碑。乾隆初年。出內帑金二十餘萬兩。一新前朝舊制。改聖殿黃瓦。御書殿額門扁。盡易張𤥼舊名金書。大成門門旁。輒書滿州字。殿中諸位版。亦然。蕃人之書。胡爲乎聖賢之神版。如有明神。必不妥靈。

뇌뢰낙락서송사전유민열전

  • 『송사전』은 정조의 세손 시절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수 차례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1791년(정조 15)에 최종 완성되었다. (…) 특히 「유민열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송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원조(元朝)에 출사를 거부한 119인의 열전으로 (…) 이 작업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이덕무이다.
  • 국왕 정조의 편찬 의도가 실무를 담당하는 검서관 이덕무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덕무는 검서관이 되어 『송사전』을 편찬하기 전부터 이미 「뇌뢰낙락서」를 편찬하고 있었다. (…) 「유민열전」이 어명이라는 큰 프레임 속에 저술된 것이라면 「뇌뢰낙락서」는 이덕무의 자발적인 의지에 기인한 것이다.

이덕무의 대명의리론

  • 이덕무는 자신이 만든 「유민열전」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충신지사(忠臣之士)가 아니라고 하여 의리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을 다시 한 번 피력하였다.
  • 「뇌뢰낙락서」는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근원에는 존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 이덕무의 대명의리는 다른 연암그룹 문인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다. 박제가와 이희경을 제외한 연암그룹은 기본적으로 존명배청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그의 대명의리는 다른 연암그룹 문인들에 비해 강도가 크고 (…) 지속적이다.
  • 인식의 전환
  • 1792년(종조 16)에 지은 「연경으로 떠나는 박감료와 이장암 건영에게 주다」에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 “중원을 헐뜯은들 무엇이 손해이며, 중원을 칭송한들 무엇이 높아지리. 우리의 안목 콩알 같이 작으니, 중원은 절로 중원일세. / 조선도 장점 있으니 중원만 아이 다 좋을 것인가. 도회와 변두리 구분 있을지언정 모두 평등으로 보아야 하네.”[中原毁何損。中原譽何尊。東人眼如荳。中原自中原。朝鮮亦自好。中原豈盡善。縱有都鄙別。須俱平等見。]
  • 마지막 구인 ‘중원은 절로 중원일세’와 ‘모두 평등으로 보아야 하네’는 13수 연작시의 주제의식이 부각된 바 타자를 객관화ㆍ상대화하여 인식하고 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나라를 비난한들 자아와 타자 모두에게 하등 변화가 없다는 말인데, 타자를 상대화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인식의 소산인 것이다. (…) 대청인식이 비교적 객관적 시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과연 이덕무의 대청인식은 기존의 대명의리론과 양립 불가능한가? 박지원의 인식과 비교해보면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 배우성, [『열하일기』와 중화(中華) 개념]: “박지원은 청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코 존명의리나 중화주의와 결별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청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청 치하의 대륙에 여전히 살아 있는 한ㆍ당ㆍ송ㆍ명의 유제다. (…) 그에 따르면, 북벌의 대의를 따르느라 청을 배척하기만 하는 행위, 대보단ㆍ상투ㆍ의관에 취해 조선 자신을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여기느라 번성하는 청을 직시하지 않는 자세는 일종의 시대착오일 뿐이다. 박지원은 존주론과 존명의식을 버리고 청나라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시의(時宜)에 맞는 존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시의에 맞는 존주인가? 북벌론과 대보단을 고집하는 존주가 아니라 삼대 이래로 중원에서 계승되어 온 한ㆍ당ㆍ송ㆍ명의 유제를 배우는 존주이다.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부심에 기대는 존주가 아니라, 조선의 낙후함을 인정하고 중국의 자기화를 지향하는 존주이다.

 

 

4. 맺음말

  • 이덕무는 대명에 대한 의리를 견결하게 유지하여 「뇌뢰낙락서」뿐 아니라 송사전 유민열전을 저술하였다. 송나라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천명하여 그 근원은 존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 박지원을 비롯한 이들은 대부분 존명배청 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덕무의 의리론은 그 강도와 지속적인 측면에서 훨씬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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