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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조선시대 대비 지위와 인조반정의 재검토

by 衍坡 2022. 9. 16.

오수창, 2022, 「조선시대 대비 지위와 인조반정의 재검토―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비판」, 『역사비평』 140



2022.09.16

 

모후의 반역
선조와 의인왕후는 혼인한 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대군이 없으면 군이라도 하루빨리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선조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후계자 선정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선조로서도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침내 선조와 신료들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아들로, 적자도 아니고 맏아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조의 여러 왕자들 가운데 광해군은 가장 총명하고 어진 성품으로 신료들의 신망을 받았다. 왜군이 한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의사를 내비쳤으나 세자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무군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분조가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아니나 망명 계획을 세우는 선조의 행궁에 비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일조했고, 이는 국왕으로서 선조의 견제 심리를 자극했다. 선조는 전쟁 기간 중 20여 차례에 이르는 양위 소동을 벌였는데, 실제로 광해군에게 양위할 생각은 없었다. 선조의 양위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세자 광해군은 엎드려 죄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분조를 이끈다고는 하나 실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출생서열이 왕위에 오르는 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선조만 해도 명종의 적장자도 아니요,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군의 막내아들이었다. 광해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문제는 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군신 간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 자리에 오른 이상 정국의 변화에 따라 세자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 사회에서 왕세자의 지위를 튼튼하게 해주는 요소는 첫째 왕의 신임, 둘째 종법상의 정통성, 셋째 신료들의 지지, 넷째 명 황제의 책봉인데, 이 가운데 광해군은 왕의 신임과 명 황제의 책봉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세자로 있는 16년 동안 광해군은 명으로부터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책봉을 거절당했고, 선조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세자는 세자도 아니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선조의 지나친 견제와 홀대, 영창대군 탄생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유영경 등 일파가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 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험난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라는 비아냥 섞인 뭇 시선은 세자 시절을 거쳐 왕위에 오른 광해군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어머니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
저자
계승범
출판
역사비평사
출판일
2021.05.10



계승범 교수가 쓴 『모후의 반역』을 정교하게 비판한 논문이 최근에 『역사비평』 140호에 실렸다. 오수창 교수의 「조선시대 대비 지위와 인조반정의 재검토―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비판」이다.

계승범 교수는 책 서문에서 “인문학 학술 원고를 제대로 심사하여 출판 여부를 결정하는 출판사는 한 손으로 꼽기도 민망할 지경”이라면서 “국내 인문학계의 크나큰 문제이자 약점”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오수창 교수의 비판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계승범 교수의 저서 『모후의 반역―광해군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을 검토하며 저자가 책머리에서 강조한 대로 인문학 학술 원고를 제대로 심사하여 출판 여부를 결정해야 할 까닭을 새삼 절감했다.”

『모후의 반역』에 대한 오수창 교수의 소감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문장을 담을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평은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논평자가 정리한 책의 핵심 논점과 그에 대한 비판을 하나씩 정리한다. 정리한 내용은 모두 논문의 원문을 가져온 것이다.


① 광해군대 인목대비를 둘러싼 논쟁은 충과 효의 충돌이다.

  • 광해군대 인목대비를 둘러싼 논쟁이 충과 효의 정면충돌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논란의 핵심을 잘못 짚었다. [546쪽]
  • ‘충을 저버린 인목대비’라는 설정은 근거가 없다. 시험 삼아 광해군 9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실록에 기재된 ‘충’을 검토해보았다. 이때는 인목대비에 대한 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지만, 실록에 수록된 수많은 논의에서 광해군과 인목대비 사이의 충, 또는 둘 중 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충을 거론한 사례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당연하다. 왕실의 충은 효와 분리될 수 없으며, 광해군으로부터 효를 받는 인목대비가 거꾸로 충을 바치는 존재일 수는 없다. 인목대비 논란이 충·효의 충돌이라는 저자의 규정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535쪽]
  • 인목대비 사안이 극단적 대립으로 치달은 것은 그것이 충과 효의 충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지위는 영창대군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인목대비를 둘러싼 충돌이 논란의 현장에서는 국왕의 효·불효와 같은 사은(私恩)의 문제가 아니라 의(義)와 충역의 문제였음이 확인된다. 인목대비를 가운데 둔 양 진영 사이에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저자의 주장처럼 보호론자들이 효를 절대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해군과 대북 세력이 반역행위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535~537쪽]


② 대비를 보호하는 인사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식이 부모를 처벌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방어 논리를 폈다.

  • 국왕과 대비의 관계에 대한 폐위 반대자들의 견해가 저자가 정리한 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이 어미를 폐할 수 없다’라는 방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방향에 있기는 기자헌 정인홍 등 대북의 최고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목대비를 공격한 인사들마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직접 폐위할 수는 없다는 뜻을 밝혔다. [542쪽]
  • 대비 보호론자들은 당시 상황과 역사적 선례를 논의했을 뿐이지, 일어나지도 않은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명제나 공식을 수립한 적이 없다. 그들은 국가 체제의 최상층을 구성하는 대비와 국왕 사이에 기계적 공식을 명시하여 불필요한 논란이나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저자가 인목대비 폐위 반대론자의 주장과 인조반정의 명분을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은 어머니를 처벌할 수 없다’ 하는 문구로 정리한 것은 당대 논의를 극단적 공식으로 탈바꿈시킨 왜곡이다. [543쪽]


③ 그러한 논리는 주희의 해석에서 완전히 이탈한 조선만의 새 논리였다.

  • 저자는 주희의 견해를 거꾸로 파악했다. (…) 광해군대 인목대비 보호론의 논리는 주희의 견해에서 이탈하기는커녕 정확히 같은 방향에 있었다. [547쪽]
  • 주희가 직접 밝힌 견해가 저자 주장과 정반대다. “당 황실로 말하자면 무후를 죽일 만했으나 중종으로 말하자면 곧 그 아들이다. 재상·대신이 오늘 그 어머니를 죽이고 내일 어떻게 서로 바라보겠는가?” 주희에게도 종법의 그 원리는 마찬가지여서, 국가를 저버리기로는 최악의 죄인인 당나라 무태후에 대해서도 그 아들에 의한 처벌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저자는 주희의 견해를 거꾸로 이해한 까닭에, 조선의 논리가 주희의 해석에서 이탈했다고 잘못 평가했다. [541~542쪽]


④ 인목대비 폐위 논쟁 및 정변(반정)은 충에 대한 효의 최종 승리였으며, 그 이후 효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릴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자리를 굳혔다.

  • 인목대비 논란이 본질적으로 충과 효의 대립이 아니었던 만큼 인조반정이 충에 대한 효의 승리였다는 저자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547쪽]


⑤ 명실공히 충·효를 강조하던 조선은 계해정변(인조반정)을 기점으로 충의 깃대는 꺾인 데 비해 효라는 깃발만 힘차게 나부끼는 ‘이상한’ 유교국가로 변했다.

  • 저자는 조선이 인조반정(계해정변)을 기점으로 효의 깃발만 나부끼는 ‘이상한’ 유교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효의 달라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인목대비 보호 세력의 논리는 주희 생각과 어긋난 바 없으며 ‘이상한’ 상태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547쪽]


⑥ 인목대비 지위의 본질은 광해군의 모후, 부수적으로 영창대군의 어머니라는 데 있다.

  • 저자는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모후라는 사실만 강조했지만, 인목대비의 더 강한 정체성은 선왕의 배우자이며 왕실의 최상급자이자 유사시 국왕 폐립의 권한을 지닌 대비라는 사실에 있었다. [547쪽]
  • 저자는 책 전편에 걸쳐 인목대비의 정체성을 광해군의 어머니라는 존재에서 찾았다. (…) 흔히 조선 국가의 주권은 군주·국왕에게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주권은 ‘국왕’이라기보다 ‘왕실’에 있었다. (…) 왕위는 가문의 논리에 따라 계승되었다. 왕실의 사당인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 그 자체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인목대비 지위의 본질은 저자가 설명하는 대로 현 국왕의 어머니, 또는 국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의 어머니라는 데 있지 않았다. 선왕과 함께 국왕 지위의 원천을 이루는 존재가 그 국왕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532쪽]
  • 조선의 대비와 국왕은 그 자체로 군신 관계에 있었다. 예를 들어 국왕은 대비에게 바치는 옥책문에 ‘국왕 신(臣) 아무개’라고 자기 신분과 이름을 기재했다. (…) 국가를 다스리는 현실 권력은 물론 국왕에게 있었다. (…) 하지만 제도적 지위는 사뭇 달랐다. (…) 국왕과 다른 곳에 거처하는 대비의 공간은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分朝)’로서 신하들로부터 국왕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조알(分朝朝謁)을 받는 곳이었다. [532쪽]


⑦ 인목대비의 혐의가 사실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문제는 그 혐의가 인목대비에게 끼칠 영향의 정도를 가늠하는 일이다.

  • 인목대비에게 가해진 혐의의 사실 여부를 저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한 것은 논리의 파탄이다. 그 문제는 당대인들에게 절대적 의미를 지녔다. 저자는 주희 생각에 비추어 당대 논의를 평가하거나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유죄판결’을 강조할 때는 성리학과 군주전제라는 당대의 논리 위에서 논지를 전개하다가, 인목대비의 혐의 입증이라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는 현대 역사가의 시각을 적용했다. 이중 잣대로 논지 불성립을 감추려 했다. [548쪽]


⑧ 인목대비 폐위는 성리학적 범주 내에서 충분히 토론 가능한 주제였으나, 효에 대한 극단적인 해석으로 인해 조선의 성리학은 유연성을 잃어가고 예송 논쟁 및 피의 숙청으로 이어졌다.

  • 저자가 제시한 『자치통감강목』 판본은 구해볼 수 없으며, 저자가 그 책에 실린 주희의 의도라고 인용한 위 구절은 『자치통감강목』에 없다. (…) 저자가 『자치통감강목』에 실린 주희의 지적이라고 길게 인용한 문장 또한 그 책의 내용이 아니다. 거의 동일한 글귀를 송나라 윤기신(尹起莘)의 『자치통감강목발명』과 그것을 옮겨놓은 『어비자치통감강목』에서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540~541쪽]
  • 인목대비 폐위가 충분히 토론 가능한 주제라는 저자의 주장은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대비 폐위에 대한 토론이 가능하지 않았던 이유는 저자가 설명하는 대로 보호론 쪽에서 새삼스럽게 효를 절대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정책이 조정에 반역을 야기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원인을 거꾸로 짚어서 조선 후기 성리학 이념의 경직화를 한껏 부각했다. [548쪽]


⑨ 계해정변은 국왕인 자식이 모후를 반역죄로 유죄판결하여 유폐한 것을 신하들이 돌이켜 바로잡겠다면서 일으킨 무력 정변이며 보복적 숙청의 형태로 나타났다.

  • 왕실과 국가가 중첩된 조선 정치 체제에서 광해군의 인목대비 처분이 얼마나 무리했으며 대비가 얼마나 막중한 권위를 지녔는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견해다. 인조반정은 그 시대 정치 체제와 부합하고 조선시대인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조정의 반역 상황을 해결하는 조치였다. [548쪽]
  • 인조반정은 매우 비상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처분이 조선의 국가 체제를 뒤흔든 것이 큰 이유가 되어 일어났다. 광해군 축출은 인목대비를 공격한 인사들도 충분히 예견한 사태였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폐출에 대한 당대인들의 광범위한 동의와 함께 왕실을 중심에 둔 조선의 정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사건이었다. 현대의 가치를 적용한다면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 시대의 정치 질서에 비추어볼 때는 저자의 설명처럼 ‘최악의 불충’이 아니라 광해군이 주재하던 반역 상황을 바로잡은 사건으로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념적으로 정당한 사건이었다. [546쪽]


⑩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충·효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가족·가계 집단 내의 상하 위계질서와 결속을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더 중요시하는 ‘효치국가’가 탄생했다.

  •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제기한 ‘효치국가의 탄생’은 거기 이르는 과정이 오류로 점철된 만큼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주장이다. 설령 과정의 오류를 덮어두더라도 저자가 근본적으로 오해한 사실이 있다. 조선 국가는 왕실과 분리되지 않으며, 왕실 안에 효와 구분되는 충이 따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하들에게 가문의 원리인 효와 국가의 원리인 충은 하나일 수 없다. 즉 인목대비 사안에서 문제가 된 왕실의 효는 처음부터 사회 일반의 효에 전이될 수 있는 원리나 가치가 아니었다. 인목대비를 둘러싼 효 논의로 인하여 사회 전체의 충과 효가 역전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조선 국가의 운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오류다. 따라서 저자가 ‘효치국가’를 내세우고도 그 정의만 제시했을 뿐 내용을 채우지 못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548~549쪽]
  • 저자는 조선시대 정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종묘와 국가의 관계를 의식했다면 왕실과 민간의 효를 한데 섞어 논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리학 사회 질서의 근간인 종법의 엄중함을 인식했다면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나이를 따지거나 주희의 사상을 그렇게 가볍게 재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또한 근대·전근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치의 기초 원리를 간과했다. 국가 운영은 권력과 권위 양자에 의해 수행되지만, 저자는 조선 국가 체제에서 권위의 측면을 외면하고 권력만 보았다. 저자는 인목대비가 왕위에 오를 수 없고 실권이 없다는 이유로 “인목대비가 누린 권력의 현실적 원천은 영창대군”, “날개를 잘린 새”, “말 그대로 뒷방 대비였을 뿐”과 같은 설명을 거듭했다. 왕실은 국왕 권력의 원천이며 국가 존립에 막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대비는 스스로 군주의 정체성을 지닌 왕실의 최상급자로서 일단 유사시에는국왕 폐립을 명령하는 존재였다. 오로지 현실 권력에만 초점을 맞춘 저자는 대비라는 지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인목대비를 둘러싼 논란의 현실적 핵심이 충과 효의 충돌이 아니라 충역 그 자체였음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상은 『모후의 반역』에 대한 오수창 교수의 비판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는 유익한 대목이 여러 곳 있다.

  1. 우선 조선 주권의 원천이 왕실이라는 설명이다. 현실 권력은 물론 국왕의 것이지만, 그 권력의 원천이 되는 권위가 '왕실'이라는 집단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중요하다. 그 왕실 안에서는 사가와 달리 충과 효가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는 지적도 통찰력 있는 설명이다.
  2. 그런 맥락에서 대비의 지위를 재검토한 점도 중요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계승범 교수의 책에서 그려지는 인목대비는 TV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의 사랑을 바라고 아들을 낳아 왕으로 만들려는 여인상 정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오수창 교수의 지적은 대비가 결코 그 정도 존재에만 머무를 수 없는, 조선의 정치 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매우 유익하다.
  3. 인목대비 폐위의 본질이 광해군의 반역행위에 있다는 설명도 모두 납득할 수 있다. 계승범 교수는 인조반정이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야만적인 사건이라는 전제를 강고하게 설정하고, 그 전제에서 광해군의 변호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오수창 교수가 지적한 이중잣대, 즉 어떤 대목에서는 당대의 가치를 따르고, 어떤 대목에서는 현대 역사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런 태도는 계승범 교수가 광해군의 변호인 역할을 하는 데서 기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계승범 교수의 전제는 그 자체로 논증이 필요한 설명이다. 『정지된 시간』을 읽을 때도 느꼈던 것인데, 저자는 본인이 던지는 주장과 비판의 선명함에 비해서 논증은 매우 취약하다.
  4. 계승범 교수가 엉뚱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주희의 관점으로 설명한 것은 변호해주고 싶어도 변호할 여지가 전혀 없다. 더구나 책을 살펴보면 계승범 교수는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의 논법을 깊이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에필로그에서 『효경』을 인용하면서 조선의 효치와 비교하고 있는데, 『효경』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닐 뿐더러 그에 대한 주희의 평가는 야박했다. 단지 자신의 논지에 필요한 문구만을 단장취의하는 것이 얼마나 엄밀한 연구 방식인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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